매일성경 묵상
여호와께서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도다 [애 3:40-54]
 – 2024년 10월 23일
– 2024년 10월 23일 –
예레미야는 53절까지 개인적인 감정에 초점을 두고 고통과 슬픔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공동체를 향해 우리들의 행위를 낱낱이 조사하고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호소한다. 그럼에도 극단적인 고통과 슬픔으로 인한 불안함에 멈추지 않는 눈물로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하나님께 절실하게 호소한다.
 
여호와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철저한지를 토로한 예레미야는 그런데도 자신을 구원할 분은 여호와 나의 주밖에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며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를 구한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고난을 잠잠히 받아들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들을 멈추라고 종용한다. 그러면서 공동체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권면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공동체의 죄를 고백할 것을 말한다. 예레미야는 심판의 혹독함을 호소하며 눈물로 여호와의 도우심을 바란다.
 
 
 
1.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제안(40~41절)
20절부터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생각하고 여호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25절부터는 일반적으로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독백 형식으로 이야기한다. 이제 40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권유한다. 예레미야는 먼저 지금까지의 행동을 살피자며 말을 시작한다. 행위를 살핀다는 것은 지금까지 왜 이스라엘이 이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아보려는 반성을 의미한다. 그것도 대충이 아니라 철저하게 검증해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과 반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걸음이다. 그런 후에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권유한다. 지금까지의 길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다. 회개와 회복의 전제 조건은 내면을 면밀하게 살피고 우리 안에 어떤 죄와 문제들이 숨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죄와 문제들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41절에서 예레미야는 이제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손을 들자고 권유한다. 손을 드는 것은 일반적인 기도의 모습을 함축한다. 예레미야는 손만 드는 형식적인 기도만 하지 말고 마음까지 드리는 진정한 회개의 기도를 드리자고 권유한다.
 
 
 
2. 공동체의 죄와 심판에 대한 고백(42~47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공동체의 죄를 고백한다(42절). “우리는 죄를 범하였고 반역하였습니다. 당신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공동체의 범죄 사실과 여호와의 용서하지 않으심을 강조하며 강조한다. 그리고 43절부터 공동체의 범죄와 하나님의 용서하지 않아 초래된 재난에 관하여 서술한다.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라는 여호와의 진노가 여호와의 모습을 가릴 만큼 크다는 뜻이다. 큰 진노는 결국 자기 백성을 추격하여 죽이시고 전혀 인정을 베풀지 않으시는 것 같은 심판으로 나타난다.
 
44절은 “가린다(싸카크)”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본문은 하나님이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심을 드러낸다. 본래 출 19:9나 신 4:11, 민 12:5 등에서 여호와는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고 나타나셨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죽을까 봐 걱정되어 베일로 가리듯 구름으로 가리고 백성들을 만나러 오신 것이다. 하지만 본문은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하나님이 방어막을 치듯 구름으로 자신을 감싸셨다. 예레미야는 신명기 4:7~8절의 익숙한 표현을 반대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철저한 거절을 잘 드러낸다.
 
45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쓰레기와 폐물로 두셨다고 한다. 이는 출애굽기 19:5에서 “내 소유” 즉 내 보물(쎄굴라)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반대의 상황이다. 열방 중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특별한 보물이었던 이스라엘이 지금은 열방의 쓰레기요 폐물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본래 부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와 돌보심으로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왕국으로 살아남으며 나름대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교만해서 부와 힘의 근원인 여호와를 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쓰레기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빠진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닌 밖에 버려져야 할 존재가 된다. 이런 상황을 보고 적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린다(비웃거나 조롱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47절은 하나님의 거절 결과로 이스라엘이 맞이한 상황을 드러낸다. 곧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의 상황이다. 곧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의 상황이다. ‘두려움(파하드)’은 보통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예기치 않은 출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묘사한다. ‘파멸(쉐트)’은 파괴, 멸망, 혼돈 또는 죽음을 전형적으로 묘사하는 단어다. 그리고 ‘멸망(쉐베르)’은 부서짐, 깨짐을 뜻하는 단어로 여기서는 ‘흩어짐’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의 심각성을 부각한 것이다.
 
 
 
3. 예루살렘의 고난에 대한 슬픔과 원수들의 공격(48~54절)
이 단락은 예루살렘에 닥친 파멸을 본 예레미야의 반응이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애가 1:2 및 16절과 같이 이스라엘의 “흩어짐”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울고 있다. 49절은 눈물이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쏟아진다고 고백한다. “흐르다(나가르)”로 번역된 단어는 “쏟아지다”라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고 고백한다.
 
50절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스라엘의 형편을 굽어보실 때까지 이런 눈물이 흐를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개입을 간절히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한다. 51절에서는 예루살렘 성의 모든 딸로 인해 나의 눈이 나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모든 딸”은 예루살렘과 주변 마을들을 가리킨다.
 
52~53절에서는 원수들의 괴롭힘에 대해 고백한다. 원수들이 이유 없이 자신을 새처럼 사냥한다고 한다(52절). 마치 아이들이 새총을 가지고 장난으로 새를 잡듯이 그렇게 자신을 다루고 있다고 호소한다. 53절에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진다고 호소한다. 54절은 53절과 연결되어 원수들이 시인을 물이 있는 구덩이에 넣고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는 이런 원수들의 공격에 이제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호소한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촉한다. 애가 타는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때때로 죽을 것 같은 고통에 휩싸인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때에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울며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을 때가 있다. 예레미야 또한 한편으로는 잠잠히 기다리라고 말하다가도(애 3:26) 극심한 고통 앞에서 다시 무너지고,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촉하는 기도를 한다. 그러면서 근근이 이 고난의 시기를 이겨내고 있다.
 
 
 
나는?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선지자는 죄의 결과를 슬퍼하기보다는 죄의 근원을 철저하게 파헤쳐서 깊이 반성하고 회개하자고 한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이제 여호와께서 가리키시는 길로 걷자는 것이다. 손만 아니라 이젠 마음까지 여호와께 들고, 옷만 아니라 마음까지 찢고(욜 2:13) 주께 나아가자고 한다. 그럴 때만 범죄와 패역을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두루뭉술한 말로 회개를 대신하지 말 일이다.
 
-가장 좋은 것은 심판이 오기 전에 돌아서는 것이다. 진노하시어 심판하기로 결심하시면서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열국 중에 값진 보배 같은 하나님 백성을 쓰레기와 폐물같이 만들어 버리신다. 언제든 내가 돌아서면 이유 불문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예레미야는 먹이를 잡아 삼키려고 달려드는 성난 짐승처럼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두려움을 호소한다. 백성들의 파멸을 보면서 흐르는 통곡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경고하셨지만 정말 오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죄를 슬퍼하라. 재난을 초래한 죄 때문에, 재난이 가져다준 고통 때문에, 선지자의 눈물은 그칠 줄 모른다. 하지만 민족의 아픔을 짊어진 이 지도자의 눈물은 절망과 패배감의 눈물이 아니라, 주께서 언젠가는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봐 주실 것이란 확신 가운데 흘리는 눈물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해 우시는 예수님의 눈물과 같았다. 선지자는 자신이 쫓겨난 참새와 구덩이에 던져진 존재 같았고 원수들의 핍박은 끝이 없어서 멸절만 남은 듯했지만, 그에게는 호소할 하나님이 계셨다.
 
-죄의 결과로 오는 고통을 탄식할 것이 아니라 고통의 근원이 되는 죄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40~42절). 결과를 슬퍼하면 죽음밖에 없으나 그 원인을 슬퍼하면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진노하시면 자기 백성이라도 용서하지 않으시며, “모세와 사무엘이 그 앞에 설지라도(렘 1:1)”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열국 중에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출 19:5)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끼같이(고전 4:13) 만들어 버린다(43~45절).
 
-성난 짐승이 먹이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듯이 대적이 이스라엘을 집어삼켰다. 엄청난 공포에 질려 도망가지만, 곧 함정에 빠져 진멸된다. 예레미야는 이런 현실에 통곡할 뿐이다(46~48절). 이런 일을 당하고 돌아서기보다는 말씀으로 경계를 삼고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선지자는 조국의 죄악과 심판을 자기 문제로 여기고 슬퍼한다. 다만 하늘에서 여호와께서 돌아보시기를 바란다. 예레미야의 슬픔은 그 눈물이 속으로 흘러 심령을 아프게 할 정도였다(49~51절). 고난에 직면할 때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크게 뉘우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기를 기대해야 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운명을 쫓겨난 참새에 비유한다. 또한 일찍이 자신이 경험했던 곤경(렘 38:6)을 떠올리면서, 지금 구덩이에 빠져 돌을 맞고 물이 넘쳐 멸절될 처지에 있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이것은 소망 없는 자의 탄식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아뢰는 기도이다. 지금 나의 삶이 멸절만이 남은 것 같은 비통한 삶을 사는가? 있는 그대로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내 삶의 고통 중에 유일한 소망 되심을 고백합니다. 언제라도 주의 긍휼을 기다리겠습니다.
*주님, 여호와께서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 예레미야의 비통한 심정이 지금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나라와 민족, 교회에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특히 필요한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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