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분노 때문에 고난을 겪은 남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깊은 절망감이 일어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과 선하심에 기대야 할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잠잠히 기다린다.
가혹한 고난으로 괴로워하던 예레미야는 처음에 고난 자체에 집중했지만, 이제 절망적인 고난을 극복하는 전통적인 신앙의 태도를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남자는 하나님의 끝없는 인자하심을 노래하면서 비탄에 빠진 자를 압제하지 않으시고,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가장 높으신 이_엘룐)을 부르며 정의를 세우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처음에 가졌던 원망과 불평(1~18절)은 희망으로 바뀌고 어느 쪽도 버리지 않고 균형 감각을 유지한듯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마음에 품고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하나님은 성실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잠잠히 치욕을 참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인자를 베푸실 것이다.
1.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찬양(19~24절)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고초와 재난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한다. 기억해 달라는 것은 관계 회복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구원 시작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셨다. 이로써 출애굽이 시작되었다. 예레미야는 이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난을 기억해달라고, 그리고 구원해달라고 요청한다. 예레미야는 고초와 재난쑥과 담즙을 기억해 달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이것을 담아두니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예레미야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며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22절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함이 끝이 없다고 고백하는데, 직역하면 “하나님의 자비로 참으로 우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긍휼은 참으로 멈추지 않습니다.”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함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를 소개하실 때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하셨다(출 34:6~7). 예레미야는 그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 현재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지만, 자신들이 완전히 망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23절은 여호와의 사랑 증거들과 자비를 날마다 새롭게 경험한다는 의미로 “아침마다 새롭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성실함이 크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고백과 찬미로 하나님이 성실하시므로 약속을 꼭 지키신다는 의미이다. 24절은 예레미야의 마음이 좌절에서 소망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스스로에게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라고 말하며 그것 때문에 자신이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여호와가 나의 기업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기업을 빼앗겨도 하나님만은 자신의 기업으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믿고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2. 기다리는 자들이 해야 할 일들(25~30절)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이 무엇을 행할지에 대해 말한다. 25~27절은 여호와를 기다리고, 잠잠히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며,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멍에는 노예나 포로를 상징하는데, 이 멍에를 젊을 때 메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직 어려움을 견딜 힘이 있는 젊은 시절에 재앙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28절에서도 멍에에 대한 것이 이어지는데, 홀로 조용히 앉아서 그 멍에를 묵묵히 감당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멍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죄 때문에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풀어주실 때까지 감당해야 한다. 또 “잠잠하라”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벌 시간을 끝내고 다시 구원을 시작하실 날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으로, 곧 희망의 시간이다.
29절에서 “입을 티끌에 둔다”라는 것은 얼굴을 땅바닥에 붙여야 한다는 표현이다. 이는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행동으로 이렇게 최대한 낮추고 침묵하며 견디는 것은 혹시 여호와가 구원해 주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30절은 이런 기간에 받는 치욕도 견디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이런 치욕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해야 할 몫이며, 이런 치욕의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여호와의 구원이 오기 때문이다. 이런 예레미야의 모습에서 고난을 대하는 좋은 자세를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긍휼을 믿고 지금의 상황들, 심지어 치욕까지도 잘 견디라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정의(31~36절)
31절은 “왜냐하면”으로 해석되는 “키”로 시작된다. 즉,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왜 참고 기다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영원히 이스라엘을 내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70년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징계하시지만, 영원히 버리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32절은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많으므로 끝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을 고생하게 하며 근심하게 하는 게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기 때문이다(33절). 현재 이스라엘의 고난과 슬픔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지 하나님의 변덕이나 악함 때문이 아니다.
34~36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세 가지 악한 행동을 언급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과 연결된다. 먼저, 세상의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이다. 갇힌 자는 포로로 끌려온 자들로, 여호와가 특별하게 돌보시는 고아와 과부와 함께 갇힌 자가 포함된다(시편 68:5~6). 발로 밟는 것은 학대를 의미한다. 약자에 대한 학대를 하나님은 결코 좋아하지 않으신다. 둘째,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를 훼손한다는 뜻이다. 재판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기본적인 제도이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몰래도 아니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하였다. 셋째, 재판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지도자나 힘 있는 자들이다. 예레미야는 특별히 힘 있는 자들에게 약자들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37~39절)
37절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재난과 비극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만이 말한 것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38절에서도 동일하게 화와 복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고백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받는 벌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산(살아남은) 사람이 어찌 불평하느냐고 한다. 비록 살아남은 현실은 힘들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예레미야가 끔찍한 슬픔 가운데서도 희망을 품게 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배워야 할 참 신앙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나는?
-참혹한 현실이 주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희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레미야는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고난을 기억하며 낙심하였지만, 동시에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쓰디쓴 고난 속에서 자기 백성의 멸절이 아닌 회복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애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참한 심판을 보면서도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함이 끝이 없으시며, 아침마다 새롭게 그리고 신실하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과 열강을 기업으로 삼은 데 있었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면,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긍휼이 희망이다. 하나님은 잠잠히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며 구하는 이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며 새 소망을 주신다. 심판은 있어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획은 폐기하지 않으신다. 죄로 인해 당한 수욕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풍부한 자비와 긍휼에 기대어 구원을 소망하는 자를 통해 다시 그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의 고생과 근심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의 멍에가 주로부터 온 것을 인정하고 불평하기보다는 때리는 자에게 뺨을 맞아 내 몫의 수욕을 다 참으면서 주의 자비가 드러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힘겹더라도 내 마음이 주께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직은 엄살이 아니겠나.
-하나님의 의로우심만이 희망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수고와 근심뿐 아니라 불의와 부정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있고 불의한 승자인 바벨론에게는 절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악인의 번성을 부러워하지도, 추구하지도 말아야 한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려라. 예레미야는 심판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기에 자비와 긍휼을 풍성하게 주실 것을 신뢰한다. 그러면서 사람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에 저항하기보다는 그분의 자비와 긍휼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난과 절망의 상황은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소망의 발판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없는 자신의 가능성에 절망하여 겸손할 때 은혜의 삶은 시작된다.
*주님,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 주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믿음의 인내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