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은 이제 바꿀 수 없는 여호와의 결정이다. 유다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 군대와 끝까지 싸우다가 완전히 멸망하거나 바벨론에 항복하여 최악의 상황은 모면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1. 또 임한 여호와의 말씀(1, 7절)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 특징은 1절에서 어느 시점에 예언이 주어졌는지에 대한 관심보다 바벨론의 엄청난 군대 병력에 초점이 있다(1절). 예루살렘과 유다를 공격하는 바벨론 군대를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곳은 본문이 유일하다. 이에 따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거느리고 예루살렘과 유다를 공격해 온 것이다. 이 상황은 유다 주변에 있는 국가들도 바벨론을 도와 공격하는 상황임을 암시한다.
7절의 정보는 더욱더 구체적인데, 이렇게 막강한 바벨론 군대에 의해 유다의 모든 성읍이 점령당하고, 예루살렘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인 라기스와 아세가만 남았다고 설명한다. 이 두 성마저 함락당하면 예루살렘은 완전히 고립된다. 라기스는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이고, 아세가는 예루살렘 남서쪽 약 30km, 라기스 북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유다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
2. 첫 번째 말씀_예루살렘과 시드기야의 절망적인 운명(2~3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2a절). 내용은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시드기야의 사로잡힘”이다. 이를 묘사하며 여섯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예루살렘 성의 멸망에 2개, 시드기야의 사로잡힘에 4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시기에 시드기야 왕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손’에 넘겨진다. “넘기다(나탄)”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예루살렘과 시드기야의 운명이 하나로 묶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와 시드기야의 사로잡힘을 결정하셨기에, 최소한의 소망마저 다 사라진다. 실제 역사는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예루살렘 성이 점령 당하고(39:2; 52:6), 한 달 후인 다섯째 달 열째 날에 화염에 휩싸인다(52:12~13). 시드기야의 운명에 대해 39:4~7과 52:7~11에 소개된다. 성벽이 무너지자, 시드기야 왕은 야음을 틈타 왕실 정원길을 따라 성벽 사이의 통로를 지나 도성 밖으로 탈출하여 아라바 쪽으로 피신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갈대아 군대의 추격을 받아 여리고 평지에서 사로잡혀 하맛 땅 립나(리블라)의 느부갓네살 사령부로 끌려간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아들들을 죽인 후에 그의 두 눈을 뽑고 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힌다.
3. 두 번째 말씀_시드기야의 평화로운 죽음(4~5절)
예루살렘의 운명을 함께 짧게 언급한 첫 번째 말씀과 달리 두 번째 말씀은 오직 시드기야의 운명에 집중한다. “시드기야 왕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4절).”라고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4절)”라고 밝힘으로써 여호와께서 시드기야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두 번째 말씀의 내용은 “시드기야가 맞이하게 될 죽음”이다. 시드기야는 칼에 맞아 죽지 않고 평화롭게 죽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장례 의례에 따라 이전 왕들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격에 맞게 향불을 피우고 애곡할 것이다(5절).
첫 번째 주셨던 말씀과 심각하게 충돌한다. 시드기야가 사로잡히고 유배됨을 선포하였는데, 두 번째 말씀에서는 그의 평화로운 죽음을 약속한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고대의 유배지에서의 죽음은 결코 평화로운 죽음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평화로운 죽음과 왕에게 걸맞은 장례 의식은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시드기야의 죽음은 극히 비참하게 유배지의 감옥에서 맞이한다(39:4~7; 52:7~11; 왕하 25:4~7). 그렇다면 본문에는 직접 언급이 없지만, 조건이 함축된 약속으로 보아야 한다.
즉,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에 의해 확정된 운명이기에 피할 수 없다. 유일한 가능성은 바벨론에 항복하고 완전한 파멸을 모면하는 것뿐이다(21:8~10).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여호와의 심판 의지로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한다면, 그에게는 평화로운 죽음과 유다 왕에 합당한 장례 의식이 허락될 것이다(38:17~18) 라는 예언인 것이다.
4. 예레미야의 명령 이행(6절)
여호와의 명령(2a절)을 예레미야가 그대로 이행했다는 6절의 보고는 매우 특이하다. 일반적으로는 표적 행위의 경우와 달리 명령 이행에 관한 보고가 기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것은 예레미야의 즉각적이고 단호한 순종과 시드기야의 침묵(불순종)을 대조하기 위한 것인 듯 하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네 번 정도 직간접적으로 여호와께 신탁을 구했다(21:1; 37:3, 17; 38:14_백성들에게 선포한 내용까지 더하면 대략 일곱 번이다). 그런데 이렇게 구하여 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그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 철저히 침묵(불순종)으로 일관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내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지만, 그는 듣기만 하고 따르지 않았다. 더 나아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체포하고 구류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한 것이다.
나는?
-최후의 경고 말씀이다. 공격은 시작됐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새롭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실 것이고, 왕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서 바벨론 왕 앞에 설 것이다. 그러니 항전을 멈추어야 한다.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심판을 수용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시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본문을 전체적으로 대조한다면, 예레미야를 통해 피할 수 없는 유다의 멸망(2, 3절)과 시드기야 왕의 평안한 죽음(4, 5절)을 예언하게 하셨다. 이제라도 애굽을 의지하지 않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징계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고 말씀에 청종하는 백성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이 그에게 향할 것이다. 징계를 받고도 불순종의 길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 더 큰 화를 당하기 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은 피할 수 없지만 시드기야가 비참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내주신다. 하나님이 돕겠다고 나서시면, 온 세상이 달려들어도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안전할 수 있지만, 심판하겠다고 결심하셨다면 살길이 없다. 항복해야 평안히 죽고 왕의 존귀함을 보존할 수 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끝내 이 마지막 은총을 거절하여 자기 눈앞에서 아들들이 죽는 것을 본 후에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고 만다(39:4~7; 52:7~11). 믿음과 자기 신념을 구분하지 못한 맹신과 자기기만이 가져다준 비참한 결말이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실현되기 시작한다. 경고대로 바벨론이 쌓아 올린 흉벽이 완성되고 예루살렘을 향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외에 이제 남은 성은 애굽의 도움을 기대하며 항전하고 있는 애굽 접경의 두 성인 아세가와 라기스뿐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절대 일어날 리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선지자를 가두고 그 입을 막을 수는 있었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의지를 묶을 수는 없는 것이다. 바벨론뿐 아니라 그 통치 아래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백성들까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 동원하여 이스라엘의 숨통을 조이신 것이다. 혹시 믿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아서 고집 피우며 불순종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은 불타고 시드기야는 붙잡혀 간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평안한 죽음 대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마지막 기회를 저버리고 끝까지 애굽의 힘을 빌려 바벨론에 저항했으며, 결국 도주하다가 붙잡혀 두 눈이 뽑히는 수모를 당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혹시 내가 지금 도모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저버리는 일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시기상 시드기야를 향한 마지막 경고인듯싶다. 그런데도 시드기야는 외면한다. 그저 애굽의 도움만 바랄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탈출한 나라를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이라니…. 그런데 이런 고집스러운 모습이 우리의 삶과 닮지 않았는가?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한 이 세대와 말이다. 또 고집스럽게 국민을 외면하는 지도자와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심판의 경고를 반복하신다. 바벨론과 주변 연합국이 밀고 내려와 두 성만 남긴채 점령당했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갈음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심판이 실행되고 있는 중에도 경고와 선택의 기회를 주신다. 그럼에도 순종하지 않는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의 쇠고집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속에서도 반복해서 “말씀”을 들려주신다. 심판과 징계의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할지, 항복해야 할지 결정해야하는 시드기야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선명하게 “말씀”해주신다. 심판 중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은 무엇일까? 기적적으로 심판을 거두어 주시는 것일까? 아니다. 그때 그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하여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순종”으로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드기야는 순종하지 않는다. 그의 운명에 대하여 분명한 선택의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어리석게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상황 속에서도 아직 라기스와 아세라가 남았고, 예루살렘은 건재하며, 더구나 예루살렘 성은 난공불락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 세 성만 남고 모두 점령 당했지만, 아직도 버티고 있고, 또 애굽으로부터 지원군이 반드시 도착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실로 하나님이 없었던 것이다.
*자기중심의 현실적인 판단과 지기 희망이 하나님의 기회를 열어 주시는 “말씀”을 끝까지 외면하게 했을 것이다. 너무나 황당하지만, 시드기야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몰상식에 근거한 헛된 믿음도 한몫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지 모르겠다. 시드기야 자신만 깨닫지 못한다.
*심판중에라도 하나님의 긍휼은 여전하다.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깨달아진다면, 주저없이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심판중에라도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이 들려지고 깨달아지며 나의 양심과 마음을 헤집는다면 희망이 있다. 여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니까….
*주님,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를 향해 경고하시는 단호한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로 향하실까 두렵습니다.
*주님, 잘 듣고 올바르게 순종하고 싶습니다. 시드기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서도 침묵하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각성하겠습니다.
*주님, 심판 중에라도 “말씀”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봅니다. 지금 저에게도 이 긍휼이 임하고 있기에 오늘도 반응하고 순종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