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심판으로 치닫게 하는 고집…. 어떻게든 불순종하겠다는 교만 [렘 43:1-13]
 – 2024년 08월 02일
– 2024년 08월 02일 –
경고의 말씀에서 우려했듯이 요하난 일행은 예레미야가 전달해 준 여호와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 바룩의 부추김을 받아 예레미야가 신탁을 왜곡했다고 주장하며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의지하는 애굽을 바벨론을 통하여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가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한다. 그들의 생각에 바벨론이 쳐들어오는 것이 뻔한 상황에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은 그 자리에서 죽으라고 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고 결국 애굽으로 내려가 다바네스에 정착한다(7절). 이때 요하난은 예레미야와 바룩도 애굽으로 데려간다. 추측하기로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생을 마쳤을 것이다.
    
바벨론 침략에 의한 유다의 멸망으로 하나님 백성이 바벨론, 애굽, 가나안으로 흩어졌다. 597년 유배 이후 하나님 백성은 가나안에 남은 자들과 바벨론으로 유배를 당한 자들로 나뉘고, 587년 멸망과 제 2차 유배로 가나안에 남은 자들과 바벨론 유배 공동체와 애굽으로 피난한 자들의 공동체로 세분된다. 왕정시대 말까지 하나의 공동체로 살았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세 곳으로 흩어져 서로 독자적인 공동체로 발전시켜 갈 것이다. 이로인해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어느 공동체가 미래에 주도적인 회복의 역할을 할 것인가 였다. 세 공동체 모두에게 기회는 주어지지만, 가나안에 남은 자들은 그다랴가 살해 당한 뒤 갈림길에 놓였다. 이들에게도 미래의 구원에 참여할 기회는 주어지지만, 가나안에 남으라는 여호와의 권면을 무시하고 애굽으로 내려감으로써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42장). 애굽에 먼저 피난해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에도 기회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들도 예레미야의 회개의 요청을 거절하고 만다(44장). 이렇게 하여 결국 바벨론 유배 공동체만 미래의 재건을 주도적으로 감당할 남은 자의 자리에 남게 되는 것이다. 
    
    
    
1.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1~7절)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전하자(1절),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된다. “호사랴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거짓”으로 규정하며 강력하게 반발한다(2절). 그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 들어가서 살지 말라는 말을 하라고 너를 보내셨을 리 없다고 항변한다. 단순하게 예레미야가 전한 메시지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의 순수성을 의심한 것이다. 또 왜곡의 주범으로 예레미야의 동역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지목한다. 바룩이 자신들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 죽여버리거나 바벨론으로 유배를 보내려고 예레미야를 부추겼다는 것이다(3절). 이들의 주장은 순식간에 함께 따르던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한다.
    
군 지휘관들을 포함한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는다(4절). 요하난 일행이 모두 예레미야를 찾아와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할 것을 확약했지만(6절), 예레미야가 열흘 후에 이들을 모두 불러(8절)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자, 이들은 모두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는다(4절). 이들은 여호와보다 바벨론을 더 두려워한 것이다. 바벨론의 보복을 더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바벨론 왕을 겁내지 말라(42:11)”는 여호와의 권면은 실체 없는 약속처럼 들렸다.
    
이들은 처음 생각했던 대로(41:16~18) 애굽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모두 함께 길을 떠난다. 5~6절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명단을 자세하게 보고한다. 그다랴의 통치 때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유다를 떠나 애굽으로 들어간다. 이로써 여호와께서 칠십 년의 통치권을 허락한 바벨론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된 그다랴가 살해되고 요하난 일행이 여호와의 권면을 거절하고 애굽으로 내려감으로써 가나안에 남은 백성은 미래의 구원 사역에서 탈락한다. 물론 모든 유다 백성이 모두 가나안을 떠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하난 일행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데리고 애굽으로 간다(6절). 왜 데리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원문에 사용된 동사 “라카흐(개역 개정_거느리고)”는 “취하다”라는 의미가 있기에 예레미야와 바룩이 자진하여 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추측하기로는 자신들의 결정과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예언자 예레미야와 바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흥미롭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은 40:1~6에서 바벨론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가 포로들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불러 말하여 “예루살렘 멸망이 유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였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요하난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신탁을 거짓으로 규정하고 그를 강제로 애굽으로 데려간다. *이방인은 여호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유다인은 불순종의 파국적 결과를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고 있음을 본다.
    
    
    
2. 표적 행위(8~13절)
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표적 행위”를 명령하신다(8절). 이 표적 행위는 애굽으로 도피가 구원이 아닌 재난의 길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전달한 권면과 경고의 말씀(42:10~22)이 거짓이거나 바룩의 주장이 아니라 여호와의 의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벨론에 의한 피의 보복이 두려워 나일 삼각주 동편에 있는 애굽의 다바네스로 피신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 애굽을 침략하게 하심으로 이들의 불순종을 징계하실 것이다.
    
표적 행위는 여호와의 명령(9절)과 이 행위의 해석(10~13절)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실행 보고는 기록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유다 사람의 눈 앞에서”큰 돌들을 날라다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 입구에 있는 벽돌로 쌓은 축대 진흙(진흙으로 다져진 광장?)에 묻을 것을 지시하신다. 그리고 이 명령에 대하여 해석해 주신다. “그런 다음에 너는 유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사람을 보내어, 나의 종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을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는 내가 묻어 놓은 이 돌들 위에 자기의 보좌를 차려 놓고, 그 위에 차일을 칠 것이다(새번역_10절).”
    
이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 느부갓네살(25:9)을 불러 애굽을 치게 하고, 그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왕궁’ 입구에 놓인 느부갓네살의 보좌는 애굽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상징한다. 애굽은 전쟁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결정해 놓으신 대로, 어떤 자는 죽고, 어떤 자는 사로잡히고, 어떤 자는 칼에 맞는다(11절). 누구도 피하여 목숨을 구하지 못한다.
    
이 패배의 파국적인 결과는 애굽에 사는 사람들을 넘어 애굽의 신전과 신상에도 미친다(12절). 여호와께서 애굽의 신전들(애굽 신들의 집들)에 불을 지르시고 그분의 종 느부갓네살은 신상들을 태우거나 전리품으로 약탈해 간다.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는 아마도 철저한 약탈을 보여주는 비유인 듯하다. 느부갓네살은 많은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안전하게 애굽을 떠난다(겔 29:19~20). 이때 느부갓네살은 애굽의 신전들을 불살라버리고 태양 신전의 돌기둥(벧세메스의 석상)을 부순다(13절). 그가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분의 결정을 집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기도를 부탁하며 “여호와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하던 자들(42:5)이 자기들의 기대하는 대로 말해주지 않자 그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며 그가 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거짓말이라고 억지를 부린다. 심지어는 예레미야의 배후에는 자신들을 죽이거나 바벨론에게 넘기려는 바룩의 음모와 부추김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들의 거짓 맹세와 하나님 대신 애굽을 맹신하는 마음을 감추려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 심지어 자신이 한 말까지 부정한 것이다. 회칠한 무덤처럼, 허위의 가면이 벗겨지면 이처럼 초라하고 사납고 무자비한 본색이 드러난다. 말씀이 드러내는 내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면 더 큰 치욕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람이 멸시하고 훼손할 수 없다. 요하난 일행은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뜻을 거짓이라고 짓밟았다. 대놓고 하나님을 멸시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분의 말씀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멸시한다고 하나님의 거룩성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멸시 가운데도 거룩하시고, 기어이 자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실 것이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결국 유다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예레미야와 바룩까지 강제로 끌고서 애굽 땅으로 들어간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기다린다고 했음에도 절대 고집을 꺾지 않는다. 선지자를 인정하지 않으니, 심판의 경고가 두려울 리 없었다.
    
-이런 모습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이 말씀을 듣지 않은 채 만끽하는 평안의 위태로움과 순종의 기쁨을 모르는 자들의 번영이 결코 축복일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근본이다. 오늘,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선지자를 강제로 데려가도 어리석음의 길이 지혜의 길로 변하지 않는다. 내 고집을 꺾으려고 애쓰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고집을 꺾으려고 애쓰며 사는가?
    
    
-놀랍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통치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유다 땅의 경계를 넘어서 애굽 땅에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곳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저 멀리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종으로 삼아 이곳 애굽까지 데려와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하게 하여 온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증명하실 것이다.
    
-애굽과 애굽 신들의 신전들이 불타고 신상들이 파괴될 때, 그제야 하나님을 떠나서 안전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부인한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기어코 역사를 만들어내고야 만다는 것을 심판을 당하는 순간에 깨닫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유다의 남은 자들이 의지하던 애굽보다 강하시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벨론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애굽과 애굽의 신을 깨뜨리시고 그들의 신전들을 불살라버리실 것이다. 바벨론이 애굽을 정복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큰 돌을 묻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외에 의지하거나 두려워할 대상은 없다. 다 잃어도 하나님을 잃지 않으면 하나도 잃은 것이 아니다.
    
-내가 의지하던 것을 불살라 버리고, 내가 두려워하던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리라.
    
    
    
*주님, 내가 고집하고 있어, 하나님의 뜻조차 반항하게 하는 완고한 것이 있다면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 거부하고 완고하여 결국 허망한 길로 치닫는 모습을 바라보고 소신이라고 포장하는 고집을 성찰하고 내려놓는 용기를 구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하나님을 떠난 곳은 아무리 제 눈에 안전하게 보여도 결국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늘 주님 안에 있는 내 영혼이 안전함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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