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모압을 위해 통곡하시는 하나님 [렘 48:26-35]
 – 2024년 08월 09일
– 2024년 08월 09일 –
모압의 심판을 결정하신 여호와께서는 모압의 멸망을 탄식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 온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으리니 무리가 길헤레스 사람을 위하여 신음하리로다(31절)” 이방 민족 모압의 심판 결정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렇게 가슴 아파하시는 심판을 왜 결심하셨을까? 예레미야는 모압이 조롱거리가 될 것을 말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모압에게 당했던 조롱과 일치한다(26~27절).
 
본문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토하다가 쓰러지거나 난장판을 벌이는 술꾼의 모습으로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진 민족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다. 인사불성이 된 술꾼에 대한 심판은 기본적으로 술꾼의 잘못과 수치를 내포한다. 술꾼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수치에 떨어지듯이 여호와의 심판 의지에 사로잡힌 백성도 멸망의 수치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압에게 취하도록 술을 먹여 그가 토한 것 위에 나뒹굴게 하신다. 
 
 
 
1. 취하게 할지어다(26~28절)
모압의 심판이 “여호와에 의한 모압의 술 취함”으로 표현된다. 여호와께서 모압에게 술 취하도록 술을 먹이라고 명령하신다. 문맥상 “파멸하는 자(8절), 술을 옮겨 담는 사람(12절)”이 모압을 술 취하게 만드는 “너희”가 된다. 여호와께서는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 26절에서 “모압이 여호와를 거슬러 교만했기 때문”이라고 고발한다. 모압의 교만을 구체적으로 고발하기에 앞서 술자리의 꼴사나운 모습에 비교하여 모압을 조롱하는 것이다. 모압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자기가 토한 것 위에 나뒹구는 자와 같이 되어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6절).
 
이렇게 모압이 조롱거리가 되는 이유는 이들이 이스라엘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모압은 이스라엘을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켜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처럼 조롱했다(27절). 도둑이 아닌 이스라엘을 도둑으로 멸시했기에 모압이 멸시를 당한다.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은 곧 여호와를 조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교만이다. “머리를 흔들다”는 표현은 오만하게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태도이다.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여호와를 거슬러 으스댄 모압에게 심판이 선고된다(28절). 모압 주민들은 성읍을 버리고 바위틈에서 살아야 한다. 성읍에서의 편안한 삶은 이제 끝났다. 성이 더는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어떤 성읍도 적의 침략을 피할 수 없기에 목숨을 구하려면 성을 떠나 적의 칼이 미치지 않는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 사냥꾼의 눈을 피해 골짜기 벼랑에 둥지를 틀고 사는 비둘기처럼 모압 사람들은 험한 골짜기에 힘겹게 살아야 한다. 어릴때부터 편안하게 살았던 모압이 광야처럼 폐허가 되고, 들짐승의 거처가 모압 주민들의 거주지가 된다.
 
 
 
2. 모압의 교만(29~30절)
모압의 교만을 고발한다. “우리”는 문맥상 모압에게 술을 먹이도록 명령을 받은 “너희”다. “우리”가 들은 모압의 교만을 여호와께서 아시기에 “너희”에게 모압을 징벌하게 하신다. 29절은 비슷한 의미를 갖는 다섯개의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모압의 교만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고발한다. 예레미야는 교만의 내용보다 교만 자체에 집중한다.
 
교만은 모압의 상징이자 본질이었다. “우리는 모압이 교만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모압이 매우 교만하여 우쭐대고 뻐기며, 오만하고 거만을 떤다는 것을, 우리는 들었다(새번역_29절).” 우쭐대다, 뻐기다, 오만하다, 거만을 떤다는 등의 표현되는 교만의 장소로 “마음”을 언급한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마음”은 사고와 계획과 결정을 담당하는 신체 기관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교만”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모두 교만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모압에 대하여 들은 교만에 대한 이야기를 확증하여 주신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모압의 교만함을 안다. 그의 자랑도 허풍뿐이며, 그가 이루었다는 일도 거짓말이다(새번역_30절).” 개역개정이 “노여워함의 허탄함”으로 번역한 단어(에브라)는 한계 또는 정도를 넘었음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 단어는 평정심의 한계를 넘는 문맥은 노여워함으로 사용되고,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문맥이라면 교만함으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후자인데, 모압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 이상의 높은 것을 탐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모압의 자랑은 입술의 자랑에 불과하다. 실체 없는 허황한 말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3. 내가 모압을 위하며 울며(31~35절)
일반적으로 고발의 말씀 다음에는 심판의 말씀이 나오지만 본문은 탄식이 나온다. 심판이 이미 이뤄진 것을 전제하고 탄식하는 것이다. 이는 심판이 가능성의 영역을 떠나 확정됐음을 보여준다. 탄식의 주체는 33, 35절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여호와이시다. 모압의 교만을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모압의 멸망을 탄식하신다. 이는 단지 문학적인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의 결정과 집행에 따른 여호와의 안타까움과 아픔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심판하시지만, 한 민족의 멸망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직접 모압의 죽음을 애도하신다(31절).
 
반복 사용된 “모압을 위하여”는 모압의 멸망이 그분께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는지를 보여준다. 여호와만 통곡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애도할 때 이웃들도 함께하는 것처럼 길헤레스 주민들을 위해 불특정의 사람들도 슬피 운다(17절). 길헤레스는 모압의 도성들을 대표하며 “옹기 조작들의 성”이라는 지명의 의미처럼 질그릇이 깨지듯이 길헤레스가 완전히 파괴될 것을 암시해 준다.
 
32~33절은 모압의 유명했던 포도 농사를 배경으로 멸망을 표현한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포도나무가 본문에서는 모압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당시 포도 산지로 유명한 십마와 야셀에 들이닥친 파괴자들에게 ‘여름 과일과 포도’를 모두 빼앗긴다. 폐허가 된 포도밭과 과수원은 수확하는 즐거움이 사라지고 적막감만 감돈다. “내가 포도주 틀에 포도주가 끊어지게 하리니”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준다. 모압의 교만을 징계하시려고 수확의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그치게 하신다.
 
한편 여호와께서 모압을 위해 통곡하시고 울부짖으시지만, 모압의 멸망은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십마와 야셀을 유린한 재앙은 다른 성읍들로 확장된다. 울부짖는 소리가 “헤스본에서 엘르알레를 지나 야하스까지”들리고, “소알에서 호로나임을 지나 에글랏 셀리시야”까지 가득찬다(34절). 모압의 북쪽 지역과 남쪽 지역이 모두 유린 당한다. 또, 모압이 폐허가 되기 전에 산당에서 제사를 바치고 신들에게 분향하는 자들도 모두 사라진다(35절). 모압의 멸망은 모압 신들의 무능함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여호와의 심판 앞에 모압의 제의와 신들은 자신의 숭배자들을 구해주지 못한다.
 
 
 
나는?
-준대로 돌려받는 조롱과 수치를 보게된다. 조롱하던 나라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번영과 부요에 취하여(32~33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만한 모압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술에 취하여 자기가 토한 데서 뒹굴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교만하여 이스라엘을 조롱하였고, 이스라엘이 도둑질하다 들키기나 한 것처럼 머리를 흔들며 비웃음거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에서 나의 공정하지 못한 비아냥과 비웃음은 언제든지 내게 돌아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만하고 교만하던 나라가 능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오만의 대가로 받은 위태로운 생존을 이어가게 된다. 요새를 자랑하던 모압은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외딴 곳에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하나님과 맞설 만큼 크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26절),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가 빈말로 큰소리쳐도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그가 분내는 것도 헛되다는 것을 아신다. 교만한 자에게는 늘 허풍과 거짓이 있다. 이런 교만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마저 속일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에서 나온다. 부디 이런 교만과 오만에 빠지지 않기를 늘 경각할 뿐이다. 죄성이 완성한 인생은 언제든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압의 멸망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슬픔… 하나님께서 모압의 멸망을 슬퍼하신다. 온 모압을 위하여 애곡하여 부르짖으신다. 비록 심판하시지만 풍요롭고 번성한 모압에 찾아온 황폐함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풍성한 결실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했던 모압 땅의 포도주 수확 소리가 끊어지고 대신 심판의 고통에 울부짖는 절규에 가슴 아파 슬퍼하신다.
 
-심판은 악을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다. 하지만 심판을 즐거워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기를 원하셔서 심판의 때를 늦추고 또 늦추신다. 이 하나님의 긍휼이 나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한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기 전에 이 복음의 소식을 묵묵히 전해야 할 것이다.
 
-모압은 이스라엘(하나님)을 조롱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압을 조롱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민족을 생각하며 통곡하신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깊이 숙고해야 할 모습 아닌가? 세상은 경쟁이 심화되면서 점점 자기만을 숭배하고 있다. 남의 슬픔을 쉽게 생각하고 심지어 죽음을 조롱하는 이들까지 서슴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너를 생각하여 더 많이 울고 있다(새번역_48:32)”는 말씀이 구원받은 우리의 태도여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울어 줄 수 있는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주님, 조롱하던 모압이 조롱 당합니다. 교만하고 오만한 웃음에 취해 있던 그들이 울부짖습니다. 그 모습에 여호와께서 아파하십니다. 나의 삶이 모압과 같은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조심하겠습니다.   
*주님, 이웃을 위해 울어 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면, 마음이 삭막해 지지 않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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