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46장)과 블레셋(47장)과 모압(48장)과 암몬(49:1~9) 다음으로 에돔에 대한 신탁이다. 에돔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하다. 거기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머무르는 사람도 없는 폐허가 된다.
창세기(25:21-34; 27장)에 의하면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예였다. 이스라엘은 에돔을 같은 조상에서 나온 친족으로 인정했지만, 양국은 늘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했다. 반목과 갈등이 그치지 않았다. 에돔의 영토는 북쪽과 서쪽의 경계가 분명했지만, 남쪽과 동쪽은 매우 불분명했다. 영토가 대부분 사막과 산악 지대로 이뤄졌기에 비교적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하지만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를 잇는 통상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에돔은 주전 587년 유다 멸망 후 네겝(유다의 남부지역)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1. 그가 없어졌느니라(7~11절)
여호와의 심판이 에돔을 향한다. 7절 원문에 의하면 세 개의 수사의문문으로 에돔의 재난에 대하여 묘사한다. 데만에는 더 이상 지혜가 없느냐? 명철한 자들에게 조언이 사라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다하였느냐? 라고 연이어 되묻는다.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난 앞에 에돔이 자랑하는 지혜가 한계와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무릇 지혜자라면 나라가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제안을 해주어야 하는데, 에돔의 지혜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명철하다는 자들이 지혜가 바닥난 듯 한마디 조언도 하지 못한다. 방향키를 잡고 있는 책임자들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조차 모르기에 에돔은 멸망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
데만이 언제부터 특정 지역의 지명으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불분명하다. 본문의 문맥에서는 에돔과 동의어로 사용된 것이 틀림없다. 창 36장에 따르면 데만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맏아들로 데만 족속의 우두머리이다.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세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인 엘리바스는 데만 사람이었다(욥 2:11; 4:1). 고대 세계에서 데만(에돔)은 지혜로 유명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유명한 데만의 지혜자들이라도 갑작스럽게 재난의 파도가 닥치면 그 파고에 그대로 휩쓸려 어찌할 바를 모르기에 살려면 도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에돔 사람이 아닌 드단 사람에게 달아나서 깊은 곳에 숨으라는 경고가 주어진다(8a절). ‘드단’은 에돔의 영토 밖에 있는 아라비아 북서부의 중요한 오아시스 가운데 하나로 교역의 중심지였다. 상식적으로 ‘에서의 재난’이 미치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드단”이라는 표현은 교역을 위해 에돔에 들어온 드단의 대상이나 에돔에 머무는 드단의 상인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또 이사야 21:13~14과 에스겔 25:13에서는 드단이 데만과 함께 등장한다. 이를 보면 드단과 에돔은 교역의 주요 대상이 틀림없다. 그런 드단에게 경고한다. 에돔과 함께 멸망 당하지 않으려면 에돔의 산악 지대를 떠나 더 깊은 곳으로 피신해야 한다. 도망해야 하는 이유는 에돔을 덮치는 재난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호와께서 에돔을 징벌하시는 때의 재난이기 때문이었다(8b절).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심판이기에 에돔은 피할 수 없다.
9절은 재난으로 황폐해질 에돔을 두 개의 비유로 서술한다. 먼저, 포도 수확의 비유이다. 포도를 거두는 자들이 와서 포도송이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모두 거둬가듯이 에돔이 남김없이 약탈 당한다. 둘째, 도둑의 비유인데, 밤에 도둑들이 들어와 원하는 대로 털어가듯이 적들이 에돔을 마음껏 짓밟고 멸한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에서의 재난”으로 에돔이 최소한의 소망도 가질 수 없게 철저히 파괴된다.
에돔을 침략하는 적의 정체는 블레셋이나 모압처럼 달리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에돔이 적들의 침략으로 완전한 멸망에 떨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생존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에돔을 발가벗기시고 그의 피신처가 드러나게 하시기에 어디에도 몸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10a절). 험한 산악 지대에 자리 잡은 에돔에는 몸을 숨기기에 좋은 곳이 많이 있었지만, 여호와께서 숨은 곳을 들추어내시기에 무용지물이 된다. “옷을 벗기다”는 ‘피신처를 들추어 내다’를 의미하지만, 에돔이 그 주민들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도 보여준다. 이렇게 멸망에 떨어진 에돔은 어디에도 도움을 구하지 못한다.
그의 자손과 형제와 이웃이 다 멸망한다(10b절). 형제는 한 혈통에서 나온 부족들을, 이웃은 에돔과 우호관계였던 드단과 같은 부족들을 가리키는 듯 하다. 에돔이 멸망할 때 가까운 곳에 있거나 멀리 있거나 에돔과의 관계 있는 자들도 함께 멸망한다.
11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구절이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한 여호와의 남다른 관심이 에돔의 고아와 과부에게도 똑같이 유효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에돔이 멸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을, 남편을 잃은 여인들을 여호와께서 직접 돌보신다.
2. 영원히 황폐하리라(12~18절)
25:15~17, 28~29절에서 민족들에게 마시게 한 잔이 에돔에게 주어질 것이다. “잔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자도 반드시 잔을 마셔야 한다면, 네가 벌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벌 받지 않을 수 없으리니, 너는 반드시 마셔야 한다”(12절). 민족들이 마신것처럼 에돔도 잔을 마셔야 한다. 에돔은 어떤 경우에도 잔을 면제받을 수 없다. ‘잔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자’는 추측컨데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당신 자신을 두고 에돔의 멸망을 맹세하신다. ‘보스라(에돔의 수도)’가 ‘놀램과 치욕 거리와 황폐함과 저줏거리’가 되고 보스라의 모든 성읍이 영원히 황무지가 된다(13절). 여호와께서 되돌릴 수 없게 결정하신 것이기에 에돔에게 멸망을 피할 길은 애초에 없다.
예언자가 여호와에게서 들은 소식을 전한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에돔을 치도록 그들을 소환하신다. “너희는 모여와서 그를 치며 일어나서 싸우라(14절)”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도구로 활용하여 에돔을 심판하신다. 에돔을 민족들 가운데 하찮은 자로, 사람들 가운데 멸시받는 자로 만드신다(15절).
에돔의 자신감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에돔은 산악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외부침략이 매우 어려웠다. 마치 절벽에 둥지를 튼 독수리와 같았다. 에돔을 침략하는 자들은 그 지리적 환경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16절).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지형이 에돔을 구해주지 못한다. 에돔은 결국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된다(18절).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공포에 떨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된다(17절).
3.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냐(19~22절)
에돔을 치는 여호와께서 들짐승 가운데 가장 힘이 세고 무서운 사자에 비유된다(19절). 요단의 깊은 숲에서 사자가 올라와 늘 푸른 초장으로 달려들듯이 여호와께서 한순간에 에돔 땅에서 주민들을 몰아내시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그곳에 세우실 것이다. 에돔을 향한 여호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자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여호와께서 에돔을 다스릴 자로 택하신 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에돔은 결국 이방 통치자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여호와의 의지가 에돔을 포함한 민족들의 운명을 지배한다. 이 땅 위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획”이 결정한다(20절). 그렇기에 에돔의 멸망은 전면적이다. 에돔 사람들이 쓰러지는 소리로 땅이 흔들리고 그 울부짖는 소리가 홍해까지 들린다(21절). 심판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철저하게 집행된다.
나는?
-철저한 심판 중이라도 기어이 남기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포도 추수꾼도 약간의 열매를 남기고 도둑도 다 훔쳐가지 않지만, 하나님은 발가벗겨진 에서(애돔)가 숨을 쉴 데가 없고 형벌을 면할 사람이 없을 만큼 철저히 진멸하실 것이다. 놀람과 치욕거리와 황폐함과 저주거리가 되게 하시되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스스로 자신과 맹세까지 하시면서 진노의 잔을 거두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애굽에, 모압에, 암몬에 희망을 남겨두셨듯이 에돔에도 가장 무방비 상태인 고아와 과부들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안전을 자신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보다 어린아이 같은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끌어내어 멸시를 주는 심판이다. 스스로 높고 두려운 자로 여기던 에돔을 작고 멸시받는 자로 끌어내실 것이다. 에돔은 보금자리를 높은 데 짓는 독수리처럼 천혜의 요새를 자랑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독수리가 먹이를 덮치듯이 교만한 에돔을 공격하게 하셔서 끌어내리시고, 그들의 용사를 진통하는 여인같이 두려움에 떨게 하실 것이다.
-높은 곳이 안전하다고 하는 세상의 말에 더는 속지 말아야 한다. 낮은 데 처하든, 높은 데 처하든, 하나님을 가장 높여 모시는 삶이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삶이다.
-에돔은 추방 당하고 울부짖는다. 열방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스스로 착각하던 에돔이 열방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실 것이다. 목자가 당해낼 수 없는 사자가 양 떼를 공격하듯, 에돔에서 백성들을 쳐서 쫓아내실 것이다. 열방은 에돔의 부강함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초토화되고 그들의 울부짖음이 홍해까지 들릴 만큼 엄청난 재앙이 임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 할 것이다.
-하지만 심판 후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세우심으로써, 여호와의 지혜에 필적할 자 없고 여호와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할 자가 없음을 알게 하실 것이다.
-자기를 지키지도 못하는 헛된 자랑의 에돔은 지혜와 명철을 자랑하더니 자신의 멸망을 막는 데는 아무 책략도 내지 못한다. 자신을 살릴 줄 모르는 지혜라면 참 지혜가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의 지혜는 도리어 자신의 멸망을 재촉하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세상에서 인정받으며 살아남기 위한 처세에는 능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미련한 사람이 아니겠나?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에돔의 지혜는 그들의 조상이자 욥의 친구였던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자신의 지혜로 헛된 위로를 욥에게 한 것처럼, 자신만 드높이다 썩어 없어지고 만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지혜가 얼마나 무익한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교만과 자만을 부츠겨 심판에 이르게 하고 이웃에게 두려움과 피해를 떠넘기는 지혜를 과연 지혜라 할 수 있을까?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며, 이웃을 세워주는 것이 아닐까?
*지혜의 나라라고 일컬을 정도로 지혜자가 많은 에돔의 지혜가 심판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또, 천혜의 요새라고 불릴 정도로 에돔 주민들의 교만을 불러 일으킬만한 안전한 요새와 같아도 무너진다. 지혜자가 많아도, 천혜의 요새라고 해도 나라가 망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조건들이 멸망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고아와 과부를 살려주신다. 힘도, 지혜도, 능력도 없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살려주신 것이다.
*생존의 조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긍휼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달리 없다는 것을 에돔의 심판이 깨닫게 한다. 나의 지혜, 내가 거하는 지형(형세), 누리는 조건 등이 나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듯한 국제 관계 속의 우리나라가 새겨 들어야 할 것이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어느 것 하나 기댈것 없는 곳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주님, 나의 지혜를 의지하는 어리석음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는 참 지혜로 살겠습니다.
*주님, 내가 가진 것을 맹신하는 교만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을 기댄 겸손으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