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에 초점이 맞춰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이스라엘의 구원을 함께 선포하신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목적을 이스라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춰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고 바벨론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은 아니다. 바벨론 심판이 가지는 또 하나의 목적은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될 만큼 그의 죄가 가볍지 않음에 대한 심판임을 놓치면 안 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의 손아귀에서 당신 백성을 구출하기에 충분히 강한 구속자이시다. 이제 여호와께서 바벨론 때문에 평안을 잃었던 땅이 다시 평안함을 누리게 해주시고, 폭력을 즐겼던 바벨론 주민들은 불안하게 하신다.
예레미야서에서 절이나 단락이 반복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본문에서도 나타나는데, 41~43절은 6:22~24의 반복이고, 44~46절은 49:19~21절의 반복이다. 이렇게 반복을 한 의도에 대해 바벨론 신탁 첫 장의 마지막과 에돔 신탁 마지막의 일치는 당시 근동을 장악한 제국과 변방에 속한 작은 나라가 여호와의 심판에 동일하게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작은 나라나 큰 나라나 여호와의 심판에 있어 차이가 없다. 특히 41~43절의 반복은 유다의 심판과 바벨론의 심판을 연속적인 사건으로 보게 하여 자기 백성 유다의 운명을 결정하신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운명도 결정하신 것을 확인시켜 준다. 또 유다는 여호와의 백성이기는 하나 심판의 집행에 있어서는 이방 백성의 경우와 다르지 않은 것도 깨닫게 한다.
1. 이스라엘의 구원자 여호와(33~34절)
다시금 교만한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이 연계된다. 예레미야의 시선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유배당한 자들에게로 향한다(33절; 4, 20절).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 당하여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 자손들과 주전 597년과 587년에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사로잡혀 간 유다 자손들이 여전히 억압받고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34절은 그렇게 학대(억압)당하는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구원자(고엘)로 소개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의 손아귀에서 자기 백성을 구출하시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강한 구원자이시다(34절).
고엘(구원자)은 원래 씨족이나 친족의 구성원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권리를 되찾아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킨다. 그는 집안의 일원이 살해되었을 때는 “피를 보복하는 자”로 살인자에게 복수해야 하고(민 35:19~27), 가장이 후손 없이 죽었을 때는 그 부인과 결혼을 해서 죽은 자의 아들을 낳아주어야 하며(룻 3:12; 4:14),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곤경에 처하거나 종이 되었을 때는 그 빚을 갚아주거나 속량해 주어야 한다(레 25:23~28, 47~49). 이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유배자들의 권리를 되찾아주신다. 유배자들을 위한 여호와의 개입이 온 땅에 그 영향을 미친다. 즉, 바벨론으로 인해 평안을 잃었던 세상에 다시 평안히 회복되고, 폭력과 억압을 즐겼던 바벨론 주민들은 불안에 떨게 된다.
2.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35~40절)
35~38절은 바벨론 주민들이 어떻게 불안에 떨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칼이 임하게 하신다. 전쟁의 재앙이 바벨론에게 닥친다. 칼이 갈대아인들과 바벨론 주민들과 그 고관들과 지혜로운 자들에게 떨어진다(35절). 또 칼이 신탁제사장들(자랑하는 자)에게 떨어져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만든다(36a절).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제사장들은 거짓 신탁만 내린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에서 유명했던 바벨론의 지혜와 종교가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칼이 용사와 말들과 병거들과 용병들(여러 민족) 에게 떨어진다(36b~37a절). 바벨론이 자랑하던 군사력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칼이 보물 창고에 떨어져 보물이 약탈당한다(37a절). 그리고 바벨론의 풍부함의 기반이었던 유브라데 강이 가뭄으로 말라버린다(38a절). 즉 바벨론을 지탱해 온 모든 것이 전쟁으로 남김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이렇게 바벨론이 칼의 재앙에 떨어진 이유는 바벨론 사람들이 우상에 미쳤기 때문이다(38b절). 헛된 우상을 숭배한 결과로 바벨론은 여호와께서 뒤엎으신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는 폐허가 된다(40절). 인적이 완전히 끊기고 황무지에 사는 대표적인 짐승들인 사막의 들짐승과 승냥이와 타조가 대신 자리를 잡는다(39절). *실제로 바벨론제국의 수도 바벨론의 유적은 20세기 초 발견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아서 바벨론 제국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 고고학자들이 꽤 있었다. 그 정도로 바벨론의 몰락은 철저했다.
3. 바벨론을 치시는 여호와(41~46절)
이렇게 바벨론을 치려고 “한 민족이 북쪽에서” 오고, “큰 나라와 여러 왕이 땅의 끝에서” 일어난다(41절). “보라”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이미 사건이 일어나 진행 중임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북방 민족의 침략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재앙이다. 바벨론을 치는 민족은 많은 왕을 봉신으로 거느리고 있는 큰 나라이다. 이미 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큰 민족의 무리를 북쪽에서 올라오게 하여” 바벨론을 쳐들어가게 하리라 말씀하셨다.
문학적인 표현이지만, “땅 끝”은 두려움을 모르는 야만족이 사는 신화적인 장소이다. 바벨론을 목표로 원정을 떠난 자들은 사납고 무서운 제국의 군대이다. 활과 투창으로 무장한 이들은 동정심을 모르는 잔인한 자들로, 그 함성은 바다의 포효처럼 땅을 뒤흔든다(42절). 이들은 말을 타고 신속하고도 거침없이 내달리며 벌써 전열을 갖추고 바벨론을 공격할 준비를 끝냈다.
바벨론을 향해 오는 군대를 바라보는 예레미야의 시선이 바벨론 궁으로 옮겨진다. 바벨론 왕은 북쪽에서 적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맥이 풀린다(43a절). 군대를 이끌고 침략군에 맞서 싸워야 할 왕이 먼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마치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른다(43b절). 바벨론은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멸망의 공포에 사로잡혀 죽은 목숨이 된다.
44~46절에서는 바벨론을 치는 주체가 북쪽에서 오는 어떤 잔인하고 무자비한 민족에서 여호와로 바뀐다. 한 민족에 의한 바벨론의 멸망이 여호와의 결정에 따른 것임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직접 바벨론을 치신다. 바벨론을 공격하시는 여호와께서 들짐승 가운데 가장 힘이 세고 무서운 사자에 비유된다(44절). 요단의 깊은 숲에서 사자가 올라와 물가에 있는 푸른 초장을 습격하여 그곳에서 풀을 먹거나 쉬고 있는 양 떼를 쫓아내듯 여호와께서 한순간에 바벨론을 쳐서 그 주민들을 몰아내시고 택하신 자들을 세우신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다스릴 자로 택하신 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초점은 민족들을 다스리던 바벨론이 이방 통치자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것은 여호와의 결정으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와 같은 자는 어디에도 없다. 여호와와 맞설 수 있는 목자(왕)는 없다.
45절은 여호와의 바벨론에 대한 계획이 이미 확정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 주가 바빌론 도성을 두고 세운 계획을 듣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땅을 두고 생각한 나의 구상을 들어 보아라.” “양 떼 가운데서 아주 어린 것들까지 끌려갈 것이니, 온 목장이 황무지가 될 것이다(새번역).” 여호와의 결정이 바벨론을 포함한 민족들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우신 계획에 따라 땅 위의 역사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의 계획에 따르면 바벨론은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42절). 바벨론의 멸망은 전면적이다. 양 떼의 어린 것들마저 다 쫓겨나 초장이 황폐해진다(45b절). 이렇게 바벨론은 주민들을 다 잃고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된다. 한때 민족들을 지배했던 바벨론의 참혹한 멸망이 세상을 뒤흔든다.
바벨론이 함락됐다는 외침에 땅이 흔들리고 그 부르짖는 소리가 민족들 가운데 들린다(46절). 멸망한 바벨론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온 땅에 퍼짐으로써 모든 민족이 바벨론의 함락을 알게 된다.
나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분이다. 하나님보다 더 강한 것 없으니, 지금은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꽉 붙들고 있지만, 머잖아 구원자가 나서실 것이다. 애굽의 바로를 향해 싸워 자기 백성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셨던 하나님께서 학대받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 하나님의 칼이 바벨론 모든 사람 위에 떨어질 것이다. 특히 고관들, 지혜로운 자들, 자랑하는 자들 위에 떨어져 그들을 어리석게 할 것이다. 용사들 위에 떨어져 놀라게 할 것이다. 말과 병거와 바벨론 안의 여러 민족에게 떨어져 그들을 여인처럼 마음을 약하게 할 것이다. 보물 위에도 떨어져 다 약탈당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하셔서 바벨론이 떠받들고 있던 것이 얼마나 헛되고 무익했는지를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면 약속의 땅에는 안식이, 바벨론에게는 불안이 찾아올 것이다. 하나님을 붙잡고 앞세우는 삶에 쉼이 찾아온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의 우상숭배 때문이다. 바벨론은 조각한 신상들을 숭배하고 미친 듯이 “무서운 것(우상)”을 섬기던 땅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땅은 물이 마르고 사람이 거하지 못하며 오직 승냥이와 타조만 들짐승과 함께 노니는 황량한 성읍으로 바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에 미쳤던 참담한 파괴가 바벨론에도 임할 것이다. 이렇게 바벨론의 우상숭배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우상을 가증하게 보시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을 계획대로 이루신다. 한 큰 나라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을 불러 바벨론을 치게 하실 것이다. 활과 투창으로 무장하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이 성난 바다 같은 소리를 하고 기병대를 앞세워 바벨론 앞에 서면 바벨론은 진통하는 여인처럼 두려워 떨 것이다. 바벨론의 침략 소식에 당황하고 괴로워하던 유다가 당하던 것(6:22~26)을 이제 바벨론이 당하게 하신다.
-바벨론의 침략과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하거나 더 좋은 의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다. 바벨론은 그 계획을 따라 멸망 당한다.
*전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물으셨으나, 이제는 자기 백성 편에서 원수를 갚으신다. 하나님의 능력을 감당할 자는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잡아간 자들이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지만, 만군의 여호와께서 풀어 주신다. 자기 백서의 탄원을 들으신 것이다.
*구속(고엘)이란 원래 빚을 지고 노예가 도니 사람을 가까운 친척이 몸값을 치르고 해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용어를 사용하여 자기 백성과의 친밀감을 나타내신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던 바벨론이 당할 심판은 철저하다. 한때 하나님의 도구로 붙잡힌 바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등을 돌리니 아무리 강한 권세도 이처럼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바벨론을 꺾으시기로 뜻을 세우시고 착오 없이 진행하셨다. 가장 강력한 국가였음에도 바벨론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힘으로 군림하던 바벨론이 더 강력한 힘에 굴복된다.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열강이 등장했다 사라졌다. 바벨론의 멸망은 힘이 센 나라가 되는 것보다 그 힘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오늘날 세계 패권국가로 자부하는 미국이나, 이 지위에 도전하려는 중국, 힘을 잃은 패권을 되찾으려는 러시아 등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이 가진 힘이 패권을 쥐게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군림하려 하나, 궁극적인 힘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끄심을 역사가 이야기해준다.
*주님, 누구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막아설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국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존재가 아님도 깨닫습니다.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강력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