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의 멸망과 하나님 백성의 멸망은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멸망했지만, 여호와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심판으로 완전한 멸망에 떨어지지만, 유배민들은 구원을 경험하고 자기 땅으로 돌아간다.
여호와의 손에 들린 금잔으로서 여호와의 계획을 집행한 바벨론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져 멸망한다. 땅 위에서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실천했지만, 바벨론은 의로운 도구는 아니었다. 바벨론은 자신의 탐욕과 정복욕에 따라 만족들을 침략했을 뿐이었다. 여호와께서 그런 바벨론의 욕망을 활용하여 유다를 포함한 민족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바벨론이 여호와의 성전을 파괴한 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허락에 따른 파괴 행위였지만, 여호와를 무시하는 바벨론의 교만을 보여주는 죄이기도 했다. 바벨론은 여호와께 대든 잘못에 책임을 져야 한다.
1. 재난의 날(1~6절)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심판을 선언하신다. 2절의 키질 비유에 등장하는 “멸망시키는 자의 심령”은 “멸망시키는 바람 혹은 파괴하는 바람”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성경은 자주 파괴적인 심판의 표상으로 “바람”을 사용한다(4:11~12; 13:24; 18:17; 22:22; 49:36). 북쪽에서 “큰 민족의 무리”를 일으켜 바벨론을 쳐들어가게 하신(9절, 41절) 여호와께서 파괴하는 바람을 일으켜 바벨론을 치게 하신다. 이와 함께 “키질하는 자들(타국인)” 보내 바벨론을 키질하여 그 땅을 비게 하신다(2a절). “타국인(자림)”의 본래 의미는 “낯선 사람”인데, 이는 본토 사람들 가운데 섞여 사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키질은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작업이다. 바람이 적당히 부는 곳에서 마른 곡식을 던지면 가벼운 쭉정이는 날려가고 무거운 알곡만 남는다. 분리 작업이기에 보통 성경에서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심판의 표상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쭉정이뿐 아니라 알곡까지도 “파괴하는 바람”에 다 날려간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키질하는 자들이 바벨론 땅에 있는 것을 모두 광풍에 던져 날려 버린다. 이로써 바벨론 땅이 깨끗하게 비워진다. 주민들은 다 쫓겨나고 땅은 폐허가 된다.
2b절은 바벨론의 심판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선포한다. 재앙의 날에 침략자들이 바벨론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공격한다(50:14~15, 29절). 여호와께서 “바빌로니아의 군대가 활을 당기지 못하게 하고, 갑옷을 입지 못하게 하여라. 너희는 바빌로니아의 젊은이를 무자비하게 죽이고, 그 모든 군대를 진멸시켜라(새번역_3절).”라고 침략자들에게 명령하신다. 침략군이 퍼붓는 화살(50:14)에 바벨론의 젊은이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군대는 궤멸한다(50:30). 동정심을 모르는 침략군으로 인해 바벨론이 죽음에 넘겨진다. 갈대아 땅에는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고, 거리에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들뿐이다(4절).
그러므로 바벨론의 멸망이 확정적이기에 살고 싶으면 바벨론에서 도망쳐야 한다. “너희는 바빌로니아에서 탈출하여, 각자 자기의 목숨을 건져라. 바빌로니아의 죄악 때문에 너희까지 함께 죽지 말아라. 이제 주님께서 바빌로니아를 그가 받아야 마땅한 대로 보복하실 때가 되었다(새번역_6절).” 전쟁의 심판이기에 바벨론에 남은 자는 누구도 칼을 피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바벨론에서 도망하라”고 경고를 받은 대상은 누구일까? 5절의 문맥을 따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유배민임을 알 수 있다. 6절 하반절에서 “이제 주께서 바빌로니아를 그가 마땅한 대로 보복하실 때가 되었다”라는 언급이 이를 뒷받침한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에게 책임을 물으실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벨론이 민족들에게 행한 대로(50:15) 여호와께서 그에게 보복하신다.
재난의 날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언급이 눈에 띈다. 5절 “비록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거역해서, ④그들의 땅에 죄가 가득 찼으나, 자기들의 하나님 만군의 주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다(새번역).”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자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되는데, 이 부분에서는 독특하게도 “여호와에게 버림받은 홀아비”로 개역 개정은 번역하였다. 이는 매우 신학적인 통찰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여호와께 저지른 넘치는 죄과로 멸망하고 사로잡혀 유배살이하고 있지만, 여호와와 맺은 언약 관계는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시켜 주는 표현이다.
이사야 50:1에서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 어머니를 쫓아내기라도 하였느냐?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써 준 이혼증서가 어디에 있느냐? 내가 너희를 채권자에게 팔아넘기기라도 하였느냐? 이것 보아라, 너희가 팔려 간 것은 너희의 죄 때문이다. 너희 어머니가 쫓겨난 것은 너희의 죄 때문이다(새번역).”라고 증언한다. 바벨론 유배에 대해 여호와에 의해 쫓겨남(이혼)으로 간주한 것이다.
2.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7~10절)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1~4절) 후 예레미야의 탄식이 이어진다. 바벨론이 이미 멸망에 떨어졌음을 전제하고 탄식하는 것이다. 이는 바벨론이 여호와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언자는 먼저 화려했던 바벨론의 과거와 절망적인 현재를 대비한다. “7 바빌로니아는 주님의 손에 들린 금잔이었다. 거기에 담긴 포도주가 온 세상을 취하게 하였다. 세계 만민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미쳐 버렸다. 8 바빌로니아가 갑자기 쓰러져서 망하였다(새번역_7~8a절).” 주님의 손에 들린(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_개역 개정) 금잔”이라는 표현은 바벨론이 여호와께서 역사를 경영하는 데 사용하시는 도구였음을 보여준다. 이미 25:9에서 여호와께서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내 종”으로 부르셨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집행자로 삼으셨기에 민족들은 바벨론의 술잔을 마시고 취해야 했다(25:15~29).
바벨론에 의한 민족들의 정복은 여호와의 “역사 의지”를 구현해 가는 과정이었다. “금잔”은 바벨론의 넘치는 부와 패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점령지의 금은보화가 바벨론의 창고를 가득 채웠고, 바벨론은 모든 주변 나라를 발아래 굴복시켰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영화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바벨론이 갑자기 쓰러져 멸망한다. “갑자기”는 여호와의 간섭에 의한 멸망을 시사하는데, 맡겨진 역할이 끝나면 지체 없이 역사의무대에서 퇴장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바벨론 제국은 전무후무하게 가장 짧은 제국으로서의 존속 기간을 거쳤다. 성경과 관련된 바벨론은 고대사의 신바빌로니아를 지칭하는데, 주전 626년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킨 아람계 칼데아 부족의 나보폴라사르가 바빌로니아 왕조(칼데아 왕조)를 열었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경의 느부갓네살)의 황금기를 지나, 주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성경의 고레스)에 의해 멸망한다. 약 87년의 짧은 왕조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멸망한 바벨론을 바라보는 자들의 반응이 바벨론의 시각에서 다양하게 묘사된다. 사람이 죽으면 남은 자들이 죽음을 애도하며 통곡하듯 바벨론의 멸망을 애도하며 통곡한다(8절). 바벨론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와 같다. 고대 세계의 상처 치료와 진통제로 쓰이는 유향을 발라보지만, 아무 효과가 없다(8b절). 바벨론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지만 아무 효과도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칼에 맞아 생긴 중상이기에 일반적인 치료제로는 회복할 수 없다. 이처럼 바벨론의 멸망을 막아보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난다.
이렇게 멸망이 확정된 바벨론과 죽지 않고 살려면, 바벨론을 저버리고 저마다 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9a절). 바벨론을 치료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는 바벨론을 돕는 민족을, 바벨론을 떠나는 “우리”는 바벨론에 사는 이방 사람들을 가리킨다. 결국 바벨론은 중상을 견디지 못하고 홀로 남겨져 죽음을 맞는다. 이는 “바빌로니아의 재앙이 하늘에까지 닿았고, 창공에까지 미쳤(새번역_9절 하반절)”기 때문이다. 바벨론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파멸적인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벨론은 “징벌의 크기가 하늘에 닿았음을 물론이고, 그의 죄과(罪過)가 하늘에 미칠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한편 바벨론 심판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는 구원사이기도 하다. 바벨론에서 도망친 자들이 시온에 와서 바벨론의 멸망을 “여호와께서 우리 공의를 드러내신” 사건으로 고백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한다(10절). ‘우리 공의’는 유배민들의 구원이 관련된 것이고, 구원이 의로움의 인정이라는 점에서 유배살이로부터의 해방과 귀향은 “우리 공의”가 되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론을 치기 위해 한 나를 일으키신다. 천하를 호령하던 바벨론이 하나님 앞의 쭉정이에 불과하니 바람을 일으켜 키질할 자들을 부르셨다. 그 앞에서 바벨론은 오금이 저려서 활을 당기지도 못하고 갑옷을 입지도 못할 것이다. 무자비하고 잔혹하기로 소문난 바벨론에게 약간의 동정도 보이지 말고 전멸시켜서, 바벨론 거리에 칼에 찔려 죽은 자의 시신이 나뒹굴게 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만한 자들은 그들을 무겁게(영광스럽게) 여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낙심할 필요 없다. 도리어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의와 정의와 나라가 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 하나님 나라!!
-여기서 우리는 자기 백성일지라도 심판하셔서 의과 공평의 나라를 세우시는 주권자 하나님을 살펴볼 수 있다. 자기 백성일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의 창조주를 버린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계하셨다. 의과 공평이 가득해야 할 땅에 죄악만 가득하여서 치셨지만, 그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과부가 되지 않으셨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홀아비가 되게 하지 않으셨다. 행한 대로 우리에게 돌려주셨다면 우리는 이미 멸절되어야 했다. 이 은혜를 당연하게 받으면 안 된다.
-한 나라의 악행을 다른 나라의 심판 기회로 사용하시는 주권자가 되신 하나님이시다. 바벨론은 한때 하나님의 진노 잔을 온 땅에 쏟아부어 심판하는 수단이었지만, 갑자기 넘어져 파멸하게 하신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 멸망을 믿을 수 없어 이스라엘마저 유향을 구하여 낫게 해보자고 하지만, 멸망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이것을 공의의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내리신 벌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시온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역사를 전파하고자 한다.
-바벨론이 무너질 줄 몰랐듯이 우리도 세상의 나라와 권력이 영원하리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혹은 누구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도구라고 부르며 불의를 정당화하지도 말아야 한다.
-역사의 주인, 나라와 민족들을 마음대로 사용하신다(1~2절). 하나님께서는 천하무적이던 바벨론을 칠 강력한 적을 일으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신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와 민족들은 하나님의 섭리 앞에 잠잠하고 겸손하게 서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홀아비처럼 두지 아니하고(5절), 약속하신 대로 구원을 베푸셨다. 구원의 은혜, 속량의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사랑의 증거 자리에서 여호와의 일(구속의 역사)을 선포해야 한다(10절). 지금, 여기에서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멸망 받을 바벨론에서 도망하여 나오라고 외치신다(6절). 그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금 여기에서도 죄로 심판받을 세상에서 도망쳐야 한다. 세상에 연연하다 세상과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다.
-바벨론은 온 세상에 죄를 확산시켰다(7절). 죄를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범죄이다. 죄 가운데 있는 바벨론은 다시 치료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무너졌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떠난 이 세상도 동일하다. 바벨론의 흥망성쇠가 지금 여기 세상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는 어떤 희망도 없다.
*주님, 주님의 심판 의지가 너무도 강력하고, 심판의 동기도 확연합니다. 완전히 멸망할 그곳에서 빨리 도망치라는 하나님의 구원이 급박하고 생생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이 이와 같을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주님,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서 늘 하나님의 구속 은혜를 노래하고 선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