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탄식의 소리를 지나치지 않고 대신 보복하시는 하나님 [렘 51:33-44]
 – 2024년 08월 21일
– 2024년 08월 21일 –
본문은 여호와의 보복을 기록한다. 바벨론은 시온에 대하여 “폭행과 학대”를 자행했다. 바벨론에게 당한 대로 되갚아 주기를 호소하는 시온에 절규에 여호와께서 긍정적으로 반응하신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송사를 들으시고 시온을 위하여 보복하신다. 바벨론의 행위대로 보복할 것이고 바벨론을 돌무더기로 만들어 승냥이의 소굴이 되게 하신다. 
 
 
 
1. 시온의 송사를 들으시는 여호와(33~40절)
바벨론의 방어선이 침략군에 의해 차례로 허물어지는 긴박한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 후에 여호와께서 다시금 바벨론의 종말이 왔음을 선포하신다. 본문에 등장하는 익은 곡식을 잘라 거두어들이는 추수와 마른 곡식의 이삭을 떠는 타작은 자주 심판의 표상으로 사용된다. “때가 이른”으로 번역된 것은 직역하면 “밟아야 할 때가 된”이다. 고대의 타작마당은 보통 성문 안쪽 평편하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마련된다. 이곳은 가을 수확기 한두 달만 사용되고 나머지 기간은 그대로 놀렸다. 추수 때가 되어 타작마당을 다시 사용하려면 바닥을 발로 밟아 다지는 단계가 비유로 사용된 것이다. 이제 곧 바벨론에 추수 때가 닥친다. 사람들이 타작마당을 밟듯이 바벨론이 침략군에 의해 곧 짓밟힌다. 
 
바벨론이 자기에게 저지른 악행을 시온이 재판장 여호와께 호소(송사)한다. 시온은 자신을 “빈 그릇”에, 바벨론 느부갓네살을 자기 배를 가득 채워도 배부르지 않는 괴물(큰 뱀)에 비유한다. 바벨론은 시온을 정복하고 시온의 귀한 것들을 모두 빼앗아 가져가고 빈 그릇(껍데기)만 남겨 놓았다. 그렇게 배를 채운 바벨론은 시온 주민들을 사로잡아 갔다. “큰 뱀(타닌)”으로 번역된 단어는 “바다 괴물”로 옮기는 것이 좋다. 그만큼 바벨론의 엄청난 힘을 비유한 것이며 유다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세력임을 표현한다. 바벨론이 유다를 잡아 먹으려하면 먹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편 74:13에서는 이미 여호와께서 탄닌의 머리를 부수셨다고 노래했다. 즉, 바벨론이 무서운 괴물처럼 보이지만 이미 여호와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된 괴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의 무자비한 폭력에 넘겨져 피를 흘린 시온은 여호와께 되갚아주시기를 호소한다(35절).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로 번역된 표현은 직역하면 “나의 폭행과 나의 살”로 그 의미가 분명하다. 바벨론이 행한 폭력은 “내 피”라는 표현과 함께 유추하면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야만스러운 폭력이었음을 드러낸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호소에 반응하여 그를 위하여 보복하신다(36절). 바벨론의 바다를 말리시고 그의 샘을 메마르게 하신다. 바다와 샘은 유브라데 강과 수로들을 지칭한 듯하다. 유브라데 강은 바벨론의 생존에 결정적이었다. 그 강물이 말라버리면 바벨론도 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바벨론은 돌무더기가 되어 승냥이의 소굴이 되고 인적이 끊긴다. “혐오의 대상과 탄식거리(놀람과 조롱거리)”가 된다. 바벨론 백성은 굶주린 사자들의 무리로 비교되는데(38절),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자는 자주 왕을 상징했지만, 여기서는 바벨론 사람들로 확장된다. 이와 같은 표현은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바다와 샘을 말리기로 하셨지만, 이를 모르는 갈대아인들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39절은 여호와께서 술자리를 마련하시고 이들이 술에 취해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신다.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잡으려고 올무를 놓으셨던 것처럼(50:24) 술자리를 베풀어 이들이 정신을 잃고 취하게 하신다. “열정이 일어날 때에(그들이 뜨거워졌을 때에)”라는 표현을 통해 싸움과 약탈의 흥분과 열기로 들뜬 상태에서 연회에 참석하여 취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진다. 승리에 도취된 바벨론이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즐기기만 하다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진다. 
 
40절에서 다시 표상이 바뀐다. 38절처럼 짐승에 비유하여, 도살장으로 가는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로 표현된다. 여호와께서 갈대아인들을 어린 양들처럼, 숫양과 숫염소들처럼 도살장으로 끌고 가신다. 으르렁거리며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에 달려들던 사자와 같았던 바벨론이 술에 취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가 된다. 
 
 
 
2. 바벨론에 대한 애가(41~44절)
본 단락 41~43절까지의 애가는 바벨론의 멸망을 전제한다. 한때 여호와의 망치(철퇴)로 온 세상을 부수었던(20~23절) 바벨론이 함락됐다. ‘온 세상의 칭찬(자랑거리)’였던 바벨론이 민족들 가운데 공포의 대상이 됐다(41절). “황폐하였도다”는 “공포의 대상이 됐다”의 의미다. 이는 느부갓네살이 전리품과 조공과 정복민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바벨론 제국의 수도 바벨론을 화려하게 건축하였다. 영원할 것 같았던 바벨론의 영화가 한순간에 끝장이 났다. 이를 바라보며 “슬프다(에크)”를 두 번 반복하여 탄식의 깊이를 표현했다. “세삭”은 바벨론의 암호에 해당한다. 바벨론의 몰락이 홍수로 인한 침몰에 비교된다. 바닷물이 밀려오고 바벨론은 요란한 파도에 잠겨 버린다(42절). 적의 공격으로 성읍들이 파괴되고 “마른 땅과 사막”이 된다(43절). 유브라데 강의 풍부한 수량과 촘촘하게 연결된 관계수로 덕분에 물 부족을 모르던 바벨론이 마른 땅이 된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바다와 샘을 말리셨기 때문이다(36절). 찬란했던 바벨론은 이렇게 폐허가 되고 만다. 고대의 세계관에서 폐허가 된 도성은 신의 저주가 내린 곳이기에 사람들은 멀리 돌아갔다. 
 
바벨론의 멸망을 전제하는 애가가 끝나고, 여호와께서 다시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신다(44절).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가 삼킨 것을 그의 입에서” 끄집어내신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바벨론 제국의 신 마르둑의 무능함과 바벨론이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로 치장된 제국의 수도 바벨론은 민족들의 시선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이기에 많은 이방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 바벨론의 자랑인 성벽이 무너진 것은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상징한다. 넓은 의미로는 예루살렘 성벽의 파괴와 연결되기도 한다. 즉,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성벽을 허물었던 바벨론이 그대로 되갚음을 당한다.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분이시다. 철두철미하게 악을 행한대로 공의로 되돌리신다. 
 
 
 
나는?
-바벨론을 타작마당으로 비유하신다. 그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악을 밥 먹듯이 자행했던 바벨론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불태워질 것이다. 
 
-유다가 바벨론이 한 일을 하나님께 아뢰며 고발한다. 바벨론은 유다를 빨아먹은 뒤 빈껍데기만 남겨 놓았다. 괴물같이 나타나 유다의 좋은 것을 다 빼앗고 사람들을 사로잡아갔다. 유다는 그 고통을 바벨론도 당하기를 원한다고 혼잣말로 탄식했다. 강자의 횡포에 세상 어느 곳이든 이런 약자의 신음과 탄식이 들려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약자들의 음성을 들으신다. 하나님 나라 백성도 이웃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마음으로 반응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혼잣말을 들으신다. 탄식에 귀를 기울이시고 행동하신다. 하나님의 명령하신 도를 넘어 스스로 주권자 행세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유린하고 하나님의 성전마저 욕보인 자들의 생명줄을 말리신다. 그리고 그들의 거처에 승냥이만 거하는 돌무더기 가득한 황무지가 되게 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이 당했던 것처럼 세상에서 혐오와 탄식거리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혼잣말이라도 자기 백성의 탄식을 흘려 듣지 않으신다. 얼마나 큰 위로인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 달라는 간구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더라도 견딜 수 있다. 응답이 반드시 실행되기 때문이다. 
 
-힘없는 유다 백성이 호소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들이 당한 잔학이 고스란히 바벨론 사람들에게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그들의 탄식이 바벨론에서의 고된 삶을 대변한다.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고 나의 탄식하는 기도를 낱낱이 듣고 계신다는 위로가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나의 탄식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시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바벨론은 탄식만 남는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취하게 하는 금잔으로, 젊은 사자같이, 새끼 사자같이 기세를 올리며 잔뜩 흥분한 바벨론에게 연회를 베푸신다. 교만한 바벨론은 자신들에게 마땅한 잔치라고 여기겠지만,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죽음의 연회가 되게 하실 것이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숫양의 마지막 식사와 같게 하실 것이다. 온 세상의 자랑거리였던 바벨론이 탄식거리가 될 것이다. 거민은 물론 지나가는 자도 없을 만큼 황폐한 땅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온 세상을 삼켰던 바벨론을 무너뜨림으로서 그가 삼켰던 것들을 끌어내실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한다. 우리의 삶도 흥망성쇠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닫는 다면, 오늘을 더욱 주님께 간구하며 응답하시고 보복하시는 섭리를 신뢰하며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이다. 
 
-바벨론의 찬란한 위용이 순식간에 황무지로 무너진다. 하나님이 없이 이룩한 것이 이토록 허망하다. 나의 삶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것이 굳건한 반석위에 세운 것과 같다. 주님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굳게 서리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신음과 호소에 귀를 기울이신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셨다. 바벨론의 억압에 터져나오는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의 신음과 한숨 소리에 꼼짝 못하신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마 25:40).
 
*”내가 너의 호소를 들어주며, 너의 원수를 갚아 주겠다. 내가 바빌로니아의 바다를 말리고, 그 땅의 샘들도 말려 버리겠다(새번역_51:36).” 내가 너의 호소를 들어주겠다는 말씀에 힘이 난다. 너의 원수를 내가 갚아주겠다는 주님의 단호함에 든든하다.
 
*악행이 점점 정점을 향해 가는듯한 이 시대, 악을 행하고도 오히려 횡포를 부리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농간을 부리는 이들이 득세하고 있다. 이들이 휘두르는 권력의 철퇴에 무수한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다. 하지만 작은 신음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붙잡는다. 우리 하나님은 가련한 지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악행을 저지르는 그들의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주님, 혼잣말이라도 허투루 듣지 않고 세밀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합니다. 나의 삶이 주님의 손에 의해 인도됨을 믿습니다. 
*주님, 바벨론을 철저히 무너뜨시는 것이 자기 백성이 당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보복임을 봅니다. 이렇게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저도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 악을 저지르고도 정의롭다고 자처하는 이들을 준엄하게 심판하시는 섭리가 위로가 되는 아침입니다. 이 땅의 악한 정치로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어서 소망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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