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언약관계에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인자를 베푸신 이야기들을 이어나간다. 고라 도당이 제사장이 되려했던 사건, 금송아지 숭배 사건, 바알브올 사건 등이 주요한 스토리 라인을 구성하고 있다. 모든 진술의 초점은 이스라엘을 향해 끝까지 인내하시며 주도적으로 언약을 성취해나가신 하나님께 있다.
1. 광야에서 반역한 이스라엘(13~15절)
1~12절에 이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한 일들을 설명한다. 13~15절은 이스라엘의 반역 패턴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었음을 지적하고(13절), 광야에서 욕심을 내어 하나님을 시험하였다고 평가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일을 잊게 될 때, 그들은 욕심에 떨어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다. 이때 벌어진 결과를 15절이 서술한다. 그들이 요구하시는 것을 주시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풍성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쇠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핵심도 아니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 결과 오히려 더 쇠약해질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할 때,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게 되며, 쇠약해지지 않는 건강한 신앙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2. 고라 도당의 반역(16~18절)
16절부터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한 반역의 일들을 차례로 언급한다. 먼저 고라 일당의 반역(민 16장)을 소개한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질투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통치 질서와 구속 사역의 구조를 뒤흔들려 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한 고라 무리에게 지진과 불이 벌로 주어졌다. 17~18절은 따이 갈라져 그들을 덮었고, 불이 그들 살랐음을 설명한다.
3. 금송아지 숭배 반역(19~23절)
-19절부터는 출애굽기 32~34장에 등장하는 금송아지 숭배 사건을 다룬다.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역사적으로 보면 고라 도당의 반역보다 금송아지 숭배 사건이 먼저 일어난 사건이다. 106편의 서술이 연대기적 순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6~18절의 고라 사건은 한 가족과 무리의 반역이었던 것에 반해, 19~23절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언약 백성 전체의 반역이었다. 더 중요한 사건을 뒤쪽에서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건이 모두 반역 사건이지만, 금송아지 사건이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반역 사건이다.
19절은 충격적이게도 이스라엘이 언약을 체결했던 호렙산에서 모세가 그 산 위에서 하나님과 만나 성막 건설에 대해 듣고 있던 그 순간에 하나님과 언약을 파기하였다. 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였는데, 20절은 이 사건은 그들의 영광을 소의 형상으로 바꾼 행위였다. 개역개정에는 “자기 영광”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직역하면 “그들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영광을 우상으로 대체하고 말았던 반역의 행위였다.
이 사건의 의미는 21~22절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일과 그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다’는 것이다. 22절에서 언급한 애굽 땅에서의 재앙은 시편 105편에서 서술 되었고, 홍해에서 행하신 일은 106:1~11절에서 서술되었다.
*105편과 106편에서 “기억함”의 중요성을 선포한 바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13~15절에서 이 부분이 반복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은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이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 금송아지를 경배하게 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셨다고 기록한다. 인느 매우 놀라운 일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구속사 가운데 거듭 행하신 패턴이기도 했다.
23절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갈라짐이 메꾸어지고, 진노함이 돌이켜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다시 언약의 성실함을 베푸셨다.
4. 광야에서 반역한 이스라엘(24~27절)
24~27절은 이스라엘이 다시금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사실을 기술한다. 먼저 백성들의 죄악의 내용을 고발한다(24~25절). 그들은 기쁨의 땅을 멸시하고 말씀을 믿지 않았고, 장막에서 원망하고 주님께 불순종했다는 사실이다. 26절에는 그 결과를 명시한다.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백성이 광야에서 엎드러지게 하셨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읊 인간의 육신적 형태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상징하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신현을 뜻하는 표현이다.
27절은 그들을 열방 중에서 무너지게 하시고 이방중에 흩으실 것을 선언한다. 아브라함 언약을 따라 열방을 향한 축복의 통로로 서야 하는 이스라엘(창 12:3)이어야 하고, 시내산 언약을 따라 열방을 회복케 하는 제사장 나라로 쓰임 받아야 하는 민족임에도(출 19:6), 그들은 불순종함으로 이방 앞에 패배하고 이방 가운데 흩어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긴박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 이어지는 바알브올 사건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5. 바알브올의 반역(28~31절)
바알브올은 “브올의 바알”이라는 뜻인데, 브올 지역에서 섬겼던 우상 바알을 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제단의 제물을 먹고 그 제사 행위에 동참하여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였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에게 큰 전염병이 돌게 된다(민수기 25장).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할 범죄행위였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앞선 금송아지 숭배 사건에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다시금 언약 백성으로 회복시키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비느하스의 중재를 사용하셨다. 아론 자손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일어나 죄인들을 심판했고, 이를 지켜보신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용서하시고 재앙을 그치신다.
31절은 이러한 비느하스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었다고 서술한다. “의(쩨다카)”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세워졌음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비느하스가 한 행위로 인해 이스라엘이 보존되었고 그 자신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들어갔다는 것이다.
금송아지 사건에서는 모세 때문에, 바알브올 사건에서는 비느하스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시고 언약 백성을 지켜내셨다. 106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했음을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의 언약 관계를 지켜내셨음을 밝힌다. 진노하시는 것이 합당함에도 백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하심이 계속해서 106편의 시편에서 흐르고 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망각은 죽음을 낳는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망각과 조급함에서 왔다. 스스로 넘지 못할 장애물을 만나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어려움을 주신 뜻을 상고하기보다 속히 불평하였다. 다단과 아비람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모세와 아론을 향해 질투하여 심판을 받는다. 그들은 자기 자리를 사랑하지 않았고 남의 자리까지 욕심을 냈다. 큰 욕심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되 불평과 시험에 어울리는 재앙도 같이 주셨다.
-주의 뜻을 구하고 주의 때를 기다리지 않은 채 내 욕심이 채워지는 것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꺾고서라도 꼭 이뤄야 할 만큼 중요하고 절박한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은혜에 대한 망각이 우상숭배를 낳는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없는 사이에 아론을 부추겨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다. 출애굽의 구원자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홍해에서 보여주신 이적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받은 구원의 은총을 멸시하고 스스로 구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모세의 중재가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다 멸절당해야 마땅하다. 갖가지 우상을 만들어 내 만족과 내 안전을 책임지려는 인간의 탈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예수님의 중재가 아니었더라면 죽어 마땅한 어리석은 존재가 우리다. 내 삶에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황금 송아지는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약속에 대한 불신은 멸망을 낳는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나안 사람들의 위용에 놀라 기쁨의 땅을 선물로 받기를 거절하였다. 도리어 원망의 소리를 키우고 하나님의 음성에는 귀를 막았었다.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의 난관 앞에서 허튼 소리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했다. 언약을 믿지 않으면 내가 바라는 대로 심판을 받는다.
*신앙에 있어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무엇일까? 단연코 “망각과 조급함”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새 주님이 하신 일들을 잊어버리고,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새번역_13절).” 상상을 넘어서는 놀라운 은혜를 맛보았어도 그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다리지 않았다.
*망각과 조급함이 삶을 지배하면, 탐욕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점점 탐욕이 강해지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교만에 이르게 된다(14절). 하지만 하나님이 조급함에서 오는 탐욕의 시험을 들어주셔도 돌이키지 않고 도리어 영혼은 점점 메말라 간다(파리하게 된다_15절). 결국 망각과 조급함의 바이러스는 영혼을 메마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혼이 메말라지면 갖가지 죄악을 서슴치 않고 행하게 된다. 지도자를 질투하고 시기하며(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_16절), 우상을 숭배하는 데까지(19절) 질주하게 된다. 영혼이 메마르면 시기와 질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며 그 결과는 말할 것 없는 파멸이다. 이 모든 것이 망각과 조급함이 가져온 무서운 결과이다.
*그런데 이런 망각과 조급함에 빠져 파멸에 이르는 백성을 위한 모세의 역할이 눈에 띤다. 즉, 지도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지도자는 공동체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온 몸으로 막는다. 우상숭배의 늪에 빠졌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분노를 막았고, 바알브올에게 정신 못차릴 때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일어나 심판을 집행하여 이스라엘이 살아났다.
*즉, 백성들이 망각과 조급함의 덫에 걸려 탐욕과 쾌락의 죄를 따라갈 때 필히 멸망으로 가는 그 길로부터 구원으로 돌이키도록 하는 존재가 지도자라는 의미다. 그렇게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지도자는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손에 붙들여 살아가야 한다. 그런 지도자가 있다면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잊지 않게 하고, 인간적인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보지 못해 조급해하는 이들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를 확인시켜주는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하나님은 말씀을 늘 묵상할 때 말씀을 통해 가르치신다. 또한 바른 말씀이 선포되는 공동체의 예배에서 삶의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은혜를 공급하신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다리는 삶이 망각과 조급함의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최고의 처방약이다.
*주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음으로 스며든 반역과 우상숭배로 실패한 이스라엘에게, 심판보다 구원의 기회를 주기 위해, 모세와 비느하스의 중보와 의를 받으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성실함에 감사합니다. 그 언약적 성실하심이 나에게도 여전히 역사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망각과 조급함의 바이러스가 내 영혼을 메마르지 않게 해주십시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늘 기다리고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