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는 아합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아합은 나봇을 죽이고 이스라엘 땅에 바알 신앙을 퍼뜨린 인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길르앗 라못 전쟁에서 죽는다. 이후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아버지의 길과 어머니의 길을 따라 행한 악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본문은 아하시야와 엘리야의 만남을 통해 그가 왜 악한 왕으로 평가되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바알세붑(2절)”은 에그론(블레셋의 5대 도시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성읍, 여호수아서에서는 유다 지파와 단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으나 블레셋의 땅이 된 곳이다)이 섬기는 우상이다. 직역하면 “파리 떼의 왕, 파리들의 주” 정도로 번역할 수 있고, “”파리(질병이나 전염병)를 불러오는 신” 또는 “질병을 다스리는 신”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의 원래 이름인 “바알세불(높은 거처의 주)”을 폄하하고 모욕하기 위한 명칭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바알세불은 지하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사탄을 바알세불로 불렀다. 고고학적인 유물들에서는 우가릿 주문들 가운데 질병 귀신을 내쫓기 위해 바알세불에에 기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저자는 이방 우상들의 신탁을 파리 떼가 윙윙거리는 소리로 점치는 것과 같은 무가치한 것으로 보았다는 뜻도 있다.
1. 모압의 반역_배경(1절)
아합왕이 죽은 이후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한다. 이것은 다윗에게 패한 이후(삼하 8:12),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있었던 모압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배반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일반적으로 정치적 반역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러한 모압의 행동은 아합왕 이후에 이스라엘의 국력이 매우 약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매우 역설적으로 아합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고 두로와 동맹을 맺고 두로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며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국은 여호와만 섬기면 나라를 부강하게 일으킨 다윗 때보다 국력이 더 약해졌다는 것을 드러낸다. 나라의 부강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신명기 9장은 가나안 땅을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였고, 사무엘하 8:14에서는 다윗이 모압과 에돔과 암몬을 차지하게 된 것을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게 된 사건은 여호와께서 더는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을 이기게 하지 않으셨고, 이스라엘에 관한 호의를 거두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여호와의 말씀을 왕의 사자에게 전달한 엘리야(2~4절)
모압이 독립을 부르짖을 때 이를 막아야 할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난간에서 떨어져 심한 병에 걸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병이 나을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도록 신하에게 명령한다. 저자가 “바알세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에그론의 우상을 섬기는 것은 바알을 파리 떼가 윙윙거리는 소리로 점치는 것과 같은 매우 무가치한 존재로 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아하시야가 자기 운명을 여호와가 아닌 이방신에 물어본다는 것은 그가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자기 부모처럼 이방신을 섬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아합왕이 죽었지만, 북이스라엘에서는 여전히 이방신의 영향력이 강력하였음을 드러낸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사자를 보내서 에그론으로 가려는 왕의 사자의 길을 막고 지신의 불쾌한 심정과 왕의 운명에 대해서 전달하라고 명령하신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라는 말은 여호와의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난 표현이다. 여호와께서는 아하시야가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표현은 1장에서 세 번(4, 6, 16절) 반복해서 등장한다. 아하시야는 아버지 아합처럼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받은 것이다.
3. 왕에게 엘리야의 말을 전달하는 왕의 사자(5~8절)
엘리야를 만난 왕의 사자들은 에그론의 바알세붑에게 가라는 왕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그대로 왕에게 돌아온다. 왕의 사자들이 왕의 명령보다 엘리야를 통해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아하시야는 그냥 돌아온 이유를 그들에게 묻는다. 사자들은 한 사람을 만났고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했다고 고하면서 엘리야에게 들은 말을 가감 없이 왕에게 전달한다.
그러자 왕은 이런 말을 전한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묻는다. 사자들은 털이 많은 사람이며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에 아하시야는 그가 엘리야임을 바로 알아차린다. 털이 많다는 것은 머리를 길렀다는 것과 같고 가죽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그의 모습은 풍요로운 이스라엘 사회 체계와 질서 속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닌 사회 규범과 관습을 벗어나 야생적이고 길들지 않은 모습이다. 실제로 엘리야는 항상 아합과 이세벨의 반대편에 서서 강하게 비판하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항상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겨 다녔고, 이스라엘 성읍은커녕 그 땅에서 살지 못할 때도 있었다.
불의한 시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참 선지자, 참 목자, 참 성도의 모습을 엘리야가 대변한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시대에는 선지자들도 대접받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겠지만, 불의한 자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바른말을 하기 위해, ‘정상적인 삶’을 포기해야 했다. 아하시야가 겉모습만 듣고도 엘리야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된 것은 엘리야의 삶이 얼마나 구별되어 살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4. 왕의 부름을 거절하는 엘리야(9~12절)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불러오기 위해 군사 50명을 보낸다.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었고, 여차하면 강압적으로 엘리야를 끌고 오려는 속셈이었다. 엘리야는 이때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다(아마도 갈멜산이었을 것이다. 이 산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한 곳이자 제자 엘리사의 거처가 있는 곳이었다_왕하 2:25; 4:25).
오십 부장은 엘리야를 보자마자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이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라며 왕의 말을 전달한다. 하지만 엘리야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50명을 불사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50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즉, 엘리야가 왕의 명령대로 산에서 내려오는 대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왕의 군사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자 아하시야는 다시 50명의 군사와 오십 부장을 보냈고, 또다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불살라 죽인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왜 50명의 군사를 두 번씩이나 죽였냐는 것이다. 이는 엘리야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과 오십 부장들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엘리야를 왕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오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엘리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왕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일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아하시야는 더 이상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않았기에 바알신을 찾아다녔다. 그런 왕과 신하들에게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신이며 권능자란 것을 보이기 위해 하늘에서 불이 내려 엘리야를 위협하던 군대 장관과 군대를 태운 것이다.
이는 마치 갈멜산에서 여호와가 진정한 신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기 위해 제단에 불을 내려 제물들을 태운 것과 같았다. 여호와께서 끔찍한 방법을 사용한 것은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왕과 백성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깨닫지 못할 만큼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추락하는 이스라엘…. 엘리야가 선고한 대로(왕상 21:29) 오므리 왕조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아합이 죽자, 이스라엘이 약화한 틈을 타 속국 모압이 배신한다. 설상가상으로 모압의 조공 중단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이스라엘의 왕 아하시야(여호와께서 붙드셨다)마저 난간에서 “추락하여” 병들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던 손을 놓으면 누구든 대신 붙들던 것과 함께 무너지고 말 것이다.
-추종하는 이스라엘…. 아하시야가 에그론 신 바알세붑에게 자기 ‘사자’를 보내자, 하나님은 자기 ‘사자’를 엘리야에게 ‘올려’보내 그 사자를 중간에 만나 왕의 허물을 꾸짖고, 왕이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란 말을 전하게 하신다. 오늘날 주님의 자녀들이 “우상”에게 찾아가는 나를 도중에 가로막으시고는 “세상에 하나님이 없어서 그걸 의지하느냐?”고 호통치시지 않겠는가?
-충돌하는 이스라엘…. 두 ‘사자들’을 통해 아하시야의 말과 여호와의 말씀이 충돌한다. 엘리야는 추상같은 정치권력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왕의 죽음을 선포한다. 그는 살아계신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인 신 바알세붑을 쫓는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참말”인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오늘 우리는 “거짓말”이 무성한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가야 한다.
-참담한 이스라엘…. 아하시야는 외모만 보고도 엘리야임을 알아보았지만, 그는 자기가 체포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그의 말씀에 붙들려야 할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합이 죽고, 나라가 무너지고, 부하들이 하늘에서 내린 불에 즉사하는데도 마음을 꺾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사자)은 나의 명령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임을 거부한 채,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재촉한다.
*주님, 아하시야의 어리석음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여전히 계심을 알지 못한 영적 어두움이 혹시 이 나라와 민족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