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의 기도로 수넴 여인의 아들이 살아났다. 이 사건을 통해 수넴 여인과 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권능과 살아계심을 확실하게 알릴 수 있었다. 본문에도 사람들을 살리고 풍성하게 먹이는 엘리사의 사역이 이어진다. 길갈에 흉년이 든 때 엘리사는 선지자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필요를 돌봤다. 그는 그들을 위해 국을 준비시켰는데, 국 재료에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독성을 제거하여 안전하게 먹게 하신다. 또, 바알 살리사 주민이 첫 수확물을 가져와 엘리사에게 드렸고 하나님은 적은 음식으로 100명이 먹고 남게 하셨다.
1. 독이 든 국을 해독함(38~41절)
엘리사는 북이스라엘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역하고 있었고, 돌아다니다가 길갈에 종종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길갈은 벧엘 북쪽 중앙 고지대에 위치한 지역으로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사와 함께 출발한 지역이기도 하다. 엘리사가 이 지역에 다시 방문했을 때 심각한 기근이 들어 있었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 앞에 앉았다. 극심한 기근으로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을 본 엘리사는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보다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사환에게 큰 솥을 걸고 제자들을 위해 국을 끓이라고 명령한다.
이에 한 사람이 채소를 채집하기 위해 들로 나간다. 이 사람은 야생 포도나무를 찾아냈고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왔다. “들호박”으로 번역된 식물은 “노란 조롱박”으로 독성이 강해 위험한 식물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옷에 가득 따와서 그것을 썰어 국 솥에 넣었다. 사람들은 국 속에 노란 조롱박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국을 나누어 먹는다. 국을 받아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국 안에 죽음이 있다고 소리친다. 이는 국 안에 죽음에 이를만한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뜻이다. 선지자의 제자들이 모두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엘리사는 호의를 베풀려다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는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다가 아이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곤란하게 된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엘리사는 그 말을 듣자 마자 급하게 달려와나 제자들에게 이름 모를 가루를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바로 솥에 넣은 후 바로 퍼서 먹으라고 말한다. 가루를 넣음으로서 국의 독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여리고에서 나쁜 물에 소금을 넣었던 사건과 유사한 것으로 죽음의 국을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생명의 국으로 만든 것이다.
수넴 여인의 아들 사건과 이 사건은 호의를 베풀었지만 뜻하지 않게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거나 위험에 빠지게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결국 엘리사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처음에 가졌던 선한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엘리사 선지자의 연민과 좌절, 극복 등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2.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100명을 먹임(42~44절)
이 기적은 바알 살리사에서 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이제 막 보리 추수를 끝내고 첫 열매로 보리떡 20개를 만들고, 밭에서 재배한 채소를 자루에 담아 엘리사에게 가지고 왔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는 첫 열매를 여호와께 바친다는 의미로 가져왔을 것을 의미한다. 일종의 제물이다.
보리는 밀 추수보다 빠른 4월에 추수가 시작되고, 보리 추수 시작 직전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배 고픈 시기이다. 이 사람이 가져온 양을 보면 그도 역시 경제적으로 그다지 넉넉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적은 양이라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추수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 밖에 안 되는 것을 엘리사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먹게 하라고 한다. 그러자 사환은 어떻게 이것으로 100명을 먹이겠냐고 난색을 표한다. 사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자신들도 먹기 힘든데 얼마 되지 않는 양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있느냐고 항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살펴보면 엘리사 당시 선지자의 제자들이나 선지자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선지자의 자녀들과 과부는 빚 때문에 고생하고, 선지자는 누군가의 부양을 받고, 선지자 무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산이나 들에서 먹을 것을 채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사는 길갈에 가서 배고픈 제자들을 먹이는 일을 먼저 했고, 바알 살리사에서도 자신들에게 들어온 적은 양식을 나누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사환의 말처럼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는 1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사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다시 말하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먹고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이 말을 듣고 사환이 그들에게 떡과 채소를 나누어 주었는데, 정말 여호와의 말씀대로 먹고 음식이 남았다. 이것은 광야에서처럼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준 기적의 사건이었다.
엘리사는 제자들이 실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도해주겠다, 가서 배부르라, 평안히 가라” 하며 말로만 위로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적으로 먹을 것을 제공하여 제자들의 배를 채워주었고, 돈이 될 만한 것을 제공해 빚을 탕감하게 하였다. 어려운 제자들의 형편을 살피고, 이들을 실제적으로 돕기 위해 애쓴 모습이 역력하다. 그는 먼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 먼저 솥단지를 걸고 들에서 식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자신에게 들어온 얼마 안 되는 식량을 제자들을 위해 먼저 내놓았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엘리사가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100명을 먹인 기적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을 기억하게 한다. 한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배고픈 백성들을 위해 넘치도록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셨다. 예수님의 능력은 엘리사의 능력보다 몇 백 배크지만,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엘리사와 예수님의 마음은 동일하기만 하다.
우리 마음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나는?
-흉년이 심하여 선지자들의제자들도 들에 나가 야생풀을 뜯어 국을 끓여야 할 만큼 절박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독성이 든 들호박인 줄 모르고 국을 끓여 그나마 마련한 음식도 못 쓰게 되었다. 최선의 노력마저 물거품이 되고 간신히 버뎌온 지지대마저 무너졌을 때의 심정을 잘 안다. 그런 어려움이 덮칠 때면 항상 나의 삶의 최후의 보루는 하나님 한 분이셔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 아닐까….
-이스라엘의 기근은 하나님과 율법으로부터 등을 돌린 결과였다. 그런데 이 흉년이 선지자 생도들에게도 예외없이 영향을 미쳐서 먹을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인해 생명이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이들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게 되었다.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 몸으로 경험한 그들이 하나님의 또 다른 한 사람으로 성장해 갔을 것이다.
-엘리사는 이름 모를 어떤 가루를 솥에 던져 독을 없애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게 한다. 우상숭배의 독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해독하고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보여준 기적이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떤 독에 의해 죽음의 문화가 만들어져 가고 있을까? 우리의 자녀들과 성도들을 살리려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긍휼에 늘 의지해야 하리라. 말씀의 가루를 늘 준비해야 하리라.
-흉년의 때에 첫 익은 보리와 채소를 가져온 한 사람의 헌신을 받아 엘리사는 굶주림에 지친 백 명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일으킨다. 현실적이고 사리에 맞는 계산으로 엘리사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한 사환은 그 시대의 전형이었다. 눈에 보이고 상식에 맞는 것만 믿는 시대는 하나님을 요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진정한 결핍은 흉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불순종에서 온다. 이 시대 먼저 구할 것은 세상 가치와 필요보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 회복이다.
-엘리사와 게하시의 믿음이 대조된다. 한 사람이 가져온 처음 익은 식물을 엘리사는 무리에게 나누러 주라고 한다. 자기 자신보다 선지자 무리의 필요를 염려하였다. 환경에 압도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행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게하시는 이 식물로는 어림없게 보았다. 그러니 나누어 주는 것이 의미없다고 보았다. 오병이어 현장의 빌립과 같은 계산법이다(요 6:7). 하나님을 신롸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모습이다.
-나는 어떤 상황과 여건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바라보는가? 아니면 인간적인 계산에 능한가? 하나님 바라보기가 능한 삶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에게 필요한 것을 풍성하게 베푸시는 분이시다. 말씀대로선지자의 생도들을 먹이시고 풍성하게 하셨다. 항상 나의 필요를 채우시지만, 우리의 필요도 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 속 각종 우상에게 붙잡혀 중독되어 가는 영혼을 살리는 말씀의 가루를 늘 준비하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마음과 선뜻 내미는 손이 나의 마음과 손길이 되도록 추구하고 순종하리라
*한편 하나님께서 주인인 땅, 약속하여 주신 땅에도 기근이 덮쳤다. 하나님의 사람을 꿈꾸며 고된 훈련을 하는 공동체에도 흉년은 예외없다. 위기는 그 땅이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기에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에게 찾아온 위기는 영혼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마음을 담대하게 이끈다. 믿음의 시도를 더욱 모험적으로 시도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풍성하게, 더욱 의미있게 신뢰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 시대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여기 하나님 나라의 은혜가 죄악이 더 깊어지고 진해진 세상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지 않겠는가!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0)”
*주님,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북이스라엘 땅에 고통스러운 기근을 허락하셨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깃든 가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뭄속에서도 필요를 채워받는 기적을 맛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진노중에라도 그치지 않음을 엘리사와 선지생도들을 통해 깨닫습니다.
*주님, 누구에게든지 언제라도 영혼을 살리는 말씀의 가루를 준비하고 주님의 인자하신 마음과 손길처럼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죄가 더한 이곳에 은혜가 더욱 풍성할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더욱 담대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