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남 유당 왕 아마샤 _ 제거하지 못한 죄 한 가지 때문에… 교만 때문에… [왕하 14:1~16]
 – 2024년 09월 27일
– 2024년 09월 27일 –
남 유다의 아마샤는 선한 왕으로 평가받았지만,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다. 그는 교만과 불순종의 왕이었다. 물론 그도 역시 통치 초기에는 율법을 따랐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능력을 힘입어 에돔을 다시 정복하였다. 그런데 대승을 거두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북이스라엘을 도발하여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킨다. 이런 그의 교만과 어리석음이 그와 유다에 큰 해를 끼쳤다.
 
엘리사는 죽기 직전에 요아스에게 아람을 이길 기회를 주었었다. 하지만 요아스는 그의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아람을 완전히 진멸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엘리사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아람을 세 번 이김으로써 아람에게 빼앗겼던 성읍들을 되찾는다. 이때 유다는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이전의 동맹관계에서 전쟁으로 마주하게 된다.
 
 
 
1. 유다 왕 아마샤의 등극(1~4절)
유다 왕 아마샤의 등극 공식이다. 아마샤는 유다 왕 요아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데, 그는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 시대부터 여로보암 시대까지 유다의 왕으로 있었다. 17절에서는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죽은 뒤에도 15년간 더 살아있었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29년을 통치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여호앗단으로 예루살렘 사람이다. 이스라엘과 다르게 유다가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일부다처 사회에서 왕이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기 때문에 어느 왕비의 아들인지 밝히기 위해서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반정이 일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머니의 이름보다는 아버지의 이름을 밝힌다.
 
3절은 아마샤에 대한 평가인데,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히 합한 것도 아니었고, 그의 아버지 요아스 수준만큼 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요아스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했지만, 산당을 없애지 않아서 아쉬움을 남겼는데, 그의 아들 아마샤도 아버지처럼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
 
*산당은 이방신을 제사하고 분향하던 곳으로 이곳을 제거하지 않고 강력하게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은 계속 산당에서 이방신들을 위해 분향할 수 있었다. 이는 여호와와 함께 우상을 섬기는 영적 간음이다. 또 아마샤와 요아스가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황금 송아지를 없애지 못한 것과 같은 죄였다. 여호와 종교는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여호와만을 섬겨야 한다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신을 다양하게 섬길 수 있다는 당시 문화를 따르는 형태의 것이었다.
 
이렇게 당대의 관습을 벗어나거나 오랜 관행을 벗고 참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버지와 동일한 과오를 되풀이하여 저질렀기에 아마샤도 아버지처럼 반역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왕하 14:19).
 
 
 
2. 아마샤의 업적(5~7절)
아마샤는 반역자들이 아버지 요아스를 죽이는 바람에 왕이 된다. 그렇기에 왕위에 오르는 과정만큼이나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침내 아마샤가 권력을 쥐고 왕권을 강화하여 정적들, 즉 아버지를 죽인 반역 세력을 제거한다. 하지만 아마샤는 그의 자손들까지 모두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는 ‘아버지 죄 때문에 아들을 죽이지 말고 아들 죄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지 말라(신 24:16)’는 모세의 율법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모습으로 비추어 볼 때 아마샤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물이었음을 나타낸다. 7절에서는 아마샤가 에돔을 물리치고 영토를 넓힌 것으로 기록되는데, 그는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포로로 잡은 만 명의 사람들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인다. 이 장면은 역대하 25:12에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고대 사회에서 포로는 노예로 삼거나 팔고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죽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시 군인이 되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전쟁 방식이었다. 아마샤는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셀라(오늘날 요르단의 페트라 인접지역)”를 취하게 되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승리 소식이었다.
 
저자는 아마샤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과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셀라를 정복한 것을 연결하여 “여호와께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리를 주시고 땅도 얻을 수 있게 해주신다”라는 사상을 전한다. 이스라엘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3. 이스라엘과 유다의 전쟁(8~14절)
왕권을 강화하고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아마샤는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만나자고 제안한다. 본문에서 그 이유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역대하 25:6~16에 따르면 유다군이 에돔을 공격할 때 십만명의 이스라엘 군사를 용병으로 고용했지만, 유다가 돈을 주지 않고 돌려보낸다. 이런 유다의 처사에 화가 난 북이스라엘 군사들은 사마리아에서 벧호론까지 모든 유다 성읍들을 약탈한다. 아마샤가 요아스를 만나자고 한 시점은 약탈이 일어난 뒤로 보인다.
 
즉, 분쟁 상황에서 유다의 아마샤는 북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전쟁을 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전쟁은 항상 선전포고를 하고 먼저 말싸움을 한 후,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전쟁에 들어갔다. 아마샤는 요아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요아스는 레바논 백향목과 가시나무의 비유를 들며 만남을 거절한다. 고대 근동에서 레바논 백향목은 가장 값비싼 목재였고, 가시나무는 가장 가치 없는 나무였다. 가시나무가 백향목에게 서로 결혼하자고 말하는 것은 가시나무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백향목에게 함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부로 행동한 가시나무는 레바논의 들짐승에게 밟혀 최후를 맞는다.
 
10절에서 요아스는 네가 에돔을 쳐서 마음이 교만해졌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 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를 자초하여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아마샤는 요아스의 경고를 듣지 않는다. 이스라엘 용병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승리를 누린 것을 잊은 채 아마샤는 자기 힘으로 승리했다고 자만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아마샤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있던 사람은 요아스였다.
 
결국 아마샤와 요아스는 벧세메스에서 전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마샤가 패하여 도망한다. 아마샤는 요아스에게 잡혀 예루살렘까지 끌려오고, 요아스는 예루살렘 성벽을 400규빗가량 헐어버리고, 성전과 왕궁의 곳간을 털어 보물들과 볼모로 잡은 사람들을 데리고 사마리아로 돌아간다. 완전한 요아스의 승리였다. 아마샤는 치욕을 당했고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약탈 당했다.
 
주변의 적에게는 이기고 승승장구하던 아마샤가 동족 이스라엘에게 철저히 약탈 당하고 파괴되는 수치를 당하게 된 것은 그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역대하 25:14~16은 아마샤의 패배는 우상을 숭배하고(산당을 제거하지 않고) 선지자의 충고를 무시한 결과라고 했다. 에돔을 정복하면서도 끊어 버리지 못한 우상숭배가 결국 남 유다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다.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멸망하게 되었다. 우리 안에 은밀히 행하는 우상숭배와 믿음의 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는 교만함이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4.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죽음(15~16절)
북이스라엘 요아스의 죽음에 대한 공식이다. 그의 가장 기억할만한 업적은 유다 왕 아마샤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이라고 말한다. 요아스는 큰 믿음을 갖지 못해 엘리사가 자신에게 준 큰 기회를 아쉽게 만든 인물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4대 동안 그 후손을 왕으로 세워 주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도 무사히 왕권을 지켰고 아들 여로보암에게 왕권을 넘겨주고 죽었다. 그리고 평안히 사마리아의 묘실에 묻히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온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살았기에 대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넘길 수 있었다. 온전하지 못한 신앙에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잊으면 안된다.
 
 
 
나는?
-아마샤는 알고도 방치한 죄를 지었다. 29년이라는 매우 오랜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다. 하지만 다른 선왕들처럼 그 역시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고 백성이 산당에서 제사하고 분향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백성이 산당에서 제사하고 분향하는 것만은 눈감아 주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철저하게 함구한다. 하지만 그 앞의 왕들도, 그 뒤의 왕들도 그랬던 것을 보면, 백성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한 통치 전략이 아닌가 싶다.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을 알면서도 ‘다들 그런다’라는 핑계로 눈감고 있는 일은 없을까?
 
-아마샤는 아버지를 죽인 신복들을 처형한다. 하지만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를 죽이지 말라는 율법을 따라(신 24:16, 참조 렘 31:29) 그 자녀들을 죽이지 않았다. 아마샤는 성경이 가르친 대로 개인적인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데 주력한 것이다. 개인의 감정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내 감정을 복종시킬 수 있을까?
 
-아마샤의 교만이 불러온 참패를 본다. 아마샤는 다윗이 에돔을 굴복시킨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승리한다. 기고만장한 아마샤는 이스라엘에게도 도전한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가시나무가 주제넘게 백향목 앞에서 무례하게 굴다가 짓밟힌 우화를 들려주면서, 아마샤가 에돔을 이긴 것 때문에 교만해졌다고 조롱한다.
 
-결국 요아스는 유다 땅 벧세메스에서 아마샤를 쳐서 이긴 후,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고 성전과 왕국 곳간의 금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간다. 어제 승리의 환호를 하루아침에 수치와 조롱의 신음으로 바꾼것은 다름 아닌 아마샤의 교만이었다. 역시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이다(잠 16:18). 하나님과의 동행의 여정은 겸손함을 잃어버리면 유지될 수 없다.
 
-이 사건은 훗날 바벨론에 의해 파괴될 예루살렘을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끝까지 말씀에 귈르 닫고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때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하지 않고 몰려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마샤는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요아스(왕하 12:3), 아사랴(왕하 14:4),요담(왕하 15:35)과 함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 결국 파멸에 이른다. 많은 부분 순종하더라도 계속해서 제거하지 못한 죄 하나가 인생이라는 둑을 무너뜨린다. 결단하여 단호하게 쳐내지 못한 죄악 하나가 우리의 영적인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 
 
 
 
*주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결국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봅니다. 많은 부분을 순종하더라도 계속해서 제거하지 못한 한 가지 죄가 파멸에 이를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나를 형통케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늘 잊지 않고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겸손이라는 지팡이를 굳게 의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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