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경제적으로 회복되었으나 영적으로는 더욱 허우적거리는 [왕하 14:17-29]
 – 2024년 09월 28일
– 2024년 09월 28일 –
아마샤는 우상 숭배와 교만으로 인해 북이스라엘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부친 요아스처럼 반역의 무리에게 피살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아사랴를 왕으로 세워 다윗의 등불을 이어가신다. 한편 북이스라엘은 줄곧 아람의 핍박에 시달린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보고 여로보암 2세를 통해 구원하여 주신다. 여로보암 2세는 다메섹과 하맛을 되찾는다.
 
여로보암 2세는 제위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여 솔로몬 재위 때와 같은 크기로 회복하였다. 하맛 어귀는 다메섹에서 72km 떨어진 레바논 북부 바카에 있다. 이곳은 가나안 북부 경계이고 이스라엘 왕국의 북쪽 모퉁이였다.
 
 
 
1. 아마샤의 죽음과 아사랴의 등극(17~22절)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죽음 이후 아마샤는 15년을 더 살았다. 요아스가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약탈한 뒤 아마샤를 예루살렘에서 풀어주고 되돌아왔기 때문에, 아마샤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유다의 왕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15년 후에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을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패전 후 아마샤는 이전 권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서서히 내부 갈등이 생기면서 반역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반역을 당한 아마샤는 예루살렘에서 라기스로 도망간다. 라기스는 아모리 족속이 살던 다섯 성읍 중 하나로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요새화된 큰 성읍이었기에 반란 세력을 막고 안전하게 몸을 숨기기에 적합했다. 그러나 이 도주는 성공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다. 전체적인 상황을 유추하면 아마샤의 죽음은 백성의 상당수가 왕에 대한 반역을 지지한 결과이다. 아마샤는 아버지 요아스처럼 반란 세력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나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성에 장사된다. 반란으로 죽임을 당했어도 장례만큼은 왕으로서의 합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가 살아서는 백성들에게서 왕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죽어서는 왕 대접을 받은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한편 아마샤가 피살당했지만, 유다 백성은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를 왕으로 세운다. 당시 그의 나이 16세였다. 축출된 왕의 아들이 온 유다 백성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는데, 이는 반란 세력이 아사랴를 지지했다는 뜻이다. 즉 아사랴의 모친 가문이 반란 세력의 주축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아사랴가 왕위에 오른 후 아마샤처럼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처형했다는 보고가 없는 것을 볼 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한편 아사랴의 최대 업적을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로 복귀시킨 것이라고 기록한다(22절). 아사랴는 웃시야라고도 불리는데, 역대하 26:6~15에 따르면 엄청난 영토 확장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엘랏은 솔로몬이 아카바 만 꼭대기에 건설한 항구이며, 인근에 있는 에시온게벨 항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엘랏은 솔로몬 시대에 시작한 홍해 무역을 되살렸다는 의미를 갖는다. 유다는 이곳을 통해 아라비아, 아프리카, 인도와 교역을 시작했었고, 아사랴가 이를 회복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아사랴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2. 여로보암 2세의 등극과 업적(23~27절)
유다 왕 아마샤가 등극한 지 15년 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이스라엘 1대 왕 여로보암과 구분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여로보암 2세로 불림, 12대 왕, 예후 왕조 4대)가 수도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41년을 다스린다. 24절은 저자의 평가인데,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이 시기에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가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단과 벧엘에서 제자 지내는 것과 정의를 행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하라고 외쳤다.
 
저자는 여로보암 2세의 죄에 대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는 말로 요약하나, 이 시기는 물질적 풍요와 함께 사회, 종교적 타락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런 시기였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신 것이 아니었기에 선지자들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25절은 여로보암 2세가 영토를 회복하였는데, 여호와의 종 아밋대의 아들 요나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이루어졌다고 보고한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요나서의 주인공이다. 하맛 어귀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이스라엘 영토가 회복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은 본문에 등장하지 않지만, 저자는 이런 예언이 있었고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알려준다.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이고, 아라바는 남쪽 경계이다. 이는 솔로몬 시대의 땅을 모두 회복했다는 의미다. 즉, 여로보암 2세 치세의 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와 비교할 수 있을만큼 강했다는 의미다.
 
26~27절은 어떻게 여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이 강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고난의 시간들을 보냈는데, 그 시절을 보내면서 스스로 매고 풀 수도 없으며, 그들을 도와줄 사람도 없는 절대적인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비웃음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고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으며 부국강병을 꾀하였지만, 그 결과는 철저한 무능과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비참한 상황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이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거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기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 2세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아직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이 남아 있기에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버릴 수가 없었고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즉, 여로보암 2세 시대의 풍요는 철저히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의 산물이었다. 동시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마지막 신호이자 이스라엘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 이 풍요가 자신들의 힘과 이방신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하나님을 멀리하는 행동을 하였다. 결국 여로보암 2세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 여로보암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국내외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고 만다.
 
 
 
3. 여로보암 2세의 죽음(28~29절)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왕 중에서 솔로몬에 버금가는 영토를 얻고 풍요를 누렸으며 주변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하여 널리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업적은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다만 다메섹과 하맛을 회복한 정도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그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열왕기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업적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선했느냐 악했느냐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업적과 이력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신앙과 삶으로 평가하신다. 여로보암 2세가 죽고 스가랴가 왕이 되었으나, 이후로 이스라엘은 엄청난 내란에 휩싸이게 된다.
 
 
 
나는?
-과분한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이다. 여로보암 2세 시대에 큰 번성을 허락하신다. 여로보암 치세 때 요단 동편 땅을 회복하였다. 또 모압과의 국경도 확정된다(25절). 북이스라엘은 솔로몬 전성기 때의 이상적인 국경 경계를 되찾는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요나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시고 그 예언대로 성취되게 하셨다.
 
-그러나 이 축복은 왕이나 백성에게 그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었다(24절). 학대를 당하나 도울 자 하나 없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지 않겠다는 자기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 때문이었다.
 
-공감과 긍휼과 약속의 기억 때문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때가 차매” 보내셨고 도말되어야 마땅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닐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의 마땅한 반응이다.
 
-악한 역사를 되풀이 하기만 하는 아마샤이다. 북이스라엘 요아스에게 사로잡혔다가(14:13) 풀려난 아마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반역을 당한다. 결국 라기스에서 죽는다. 부왕을 죽인 심복들을 죽인 왕(14:5)이 자기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를 사로잡은 북이스라엘 요아스 왕보다 15년을 더 살았지만, 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15년을 헛 산 것이다. *매일 매일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은혜의 기회이다. 매일 주시는 이 소중한 선물을 하나님보시기에 선하게 세우고 채워야 하지 않을까!
 
-세속의 기준으로 큰 성공을 거둔 여로보암 2세였다. 무려 41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경제적으로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의 제2의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왕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처럼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데 그친다. 그에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도 않는다.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룬 성취로 평가하지 않고 그분과의 관계의 진정성으로 우리를 평가하신다.
 
-16세에 왕이 된 남 유다의 아사랴는 외국 무역이 활발한 항구이자 국제 교통로인 엘랏을 재건한다. 이를 통해 과거 솔로몬이 이룬 홍해 무역을 다시 일으켰다. 하지만 아하스 왕 때 이 엘랏을 다시 빼앗기고 만다(왕하 16:6). 하나님 앞에서는 물질적인 정비보다 영적인 정비가 우선이다. 진정한 회복은 성을 하나 되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속히 복귀 시켜야 할 내 삶의 하나님 영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 2세에게는 사람을 구원할 만한 인격이나 자질이 조금도 없었다(24절).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시고 빼앗긴 영토를 되찾게 하셨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깊은 죄악과 불순종의 수레바퀴 속에 있을 때 조차도 하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형통케 하신다.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시는(시 103:10)”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깨우쳐야 하리라.  그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는 나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스라엘은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위급함에 빠졌지만, 하나님이 그 상황 속에서 그들을 구원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이름을 지워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를 항상 지켜보고 계시며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 구원의 손길을 보내 주신다.
 
 
 
*주님,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하지만 영적으로 고달픈 시기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시지 않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오늘 나에게도 풍성하게 임한줄 믿습니다.
*주님, 진퇴양난에 빠져 생기를 잃어버릴 때라도 주님이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깨닫게 됩니다. 주의 손이 나를 꼭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담답한 지경에 빠진 이 땅의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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