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다. 병도 고쳤고, 생명도 15년 연장되었다. 또 다윗 가문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에 따라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해주셨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러 온 바벨론 사절단과의 만남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하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만다. 그가 교만해져 자신의 부귀영화를 자랑하고 만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히스기야가 그들에게 자랑한 모든 보물과 재산이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을 선언하신다. 히스기야는 그제야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만, 이미 늦었다.
1. 바벨론 사절단에게 모든 것을 보여준 히스기야(12~15절)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발라단의 아들)’이다.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속국이었다. 브로닥발라단은 앗수르 왕의 압박 가운데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고 같이 앗수르 왕에게 대항하기를 원한듯하다.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은 우호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으므로 편지와 예물을, 사절단을 통해 보내온 것이다. 히스기야는 이 사절단에게 매우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앗수르의 강력한 압박에 함께 연합하여 대응할 동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히스기야는 자기 보물창고의 금은과 향품과 무기와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만다. 저자는 히스기야가 그의 왕궁과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보여주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강조한다(13절). 히스기야가 매우 경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의 저변에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는 입장에서 유다의 국력을 드러내어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때 당시는 아직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와 조공으로 왕실과 성전의 모든 은금을 가져가기 전이라 창고에 물건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런 히스기야의 행동에 선지자 이사야는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이사야는 히스기야를 찾아와 사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다. 히스기야는 그들이 멀리서 왔다는 것을 강조하며 바벨론에서 왔다고 대답한다. 신 29:21에서는 먼 지방 사람들은 진멸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으로 표현하는데 그들이 종종 심판의 도구로서 쓰임 받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히스기야가 멀리서 왔다고 강조하는 것은 진멸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동맹을 맺을 수 있지 않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자 이사야는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도 묻는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보물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고 대답한다. 이런 히스기야의 행동에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히스기야의 입장에서는 앗수르의 심각한 군사적 위협 속에서 바벨론이 동맹을 맺자고 손을 뻗어 온 것이 매우 반갑고 든든했을 것이다.
2. 여호와의 심판 선언(16~18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말씀하신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라는 준엄한 명령으로 여호와의 심판 선언을 전달한다.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그날에는 왕궁의 모든 것과 조상들이 창고에 쌓아두었던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고,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맨 마지막을 “여호와의 말씀하셨다”로 마무리하며 자신이 한 말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전달한다. 계속해서 히스기야의 직계 후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거세되어 왕궁의 환관이 되는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왕이나 왕자들이 바벨론 궁의 종이 되는 굴욕을 겪을 것이라는 의미지만 그 이상을 내포한다.
신명기 23:1에서는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인데, 왕의 직계 후손들이 거세되는 것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 끊긴다는 생물학적 문제와 함께, 다윗 가문의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다는 신학적 문제를 함께 일으킨다. 이것은 왕궁의 모든 물건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럽고 심각한 문제였다.
이 예언은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는 의미다. 왕하 19장에서는 히스기야가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적을 물리쳐 주셨다. 하지만 20장에서는 여호와가 아닌 바벨론을 의지하려 했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의지하려는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런 경험은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고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위협을 가할 때에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게 했던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결국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은 막을 수 있었지만, 바벨론의 침략은 막을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고 의지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럴수록 교회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약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회개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려 하기보다 외부적인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요인들에 교회가 약해짐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본문은 분명하게 선포한다. 생명을 주관하시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 어떤 힘도 무너뜨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3. 히스기야의 반응과 죽음(19~20절)
이런 하나님의 유다에 대한 심판 선언에 히스기야의 반응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미지근하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다고 말한다. 이는 자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평안과 진실함을 주시면 그걸로 만족하겠다고 고백한다.
“평안(샬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호하심을 가리키고, “진실(에메트)”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히스기야와 언약 관계 속에서 성실함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으로 자신은 만족하겠다는 의미다. 히스기야의 분명한 믿음의 한계이다. 히스기야는 믿음의 인물로 여호와와 동행하며 신실하게 살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는 자기 삶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는 자식들과 가족들에게 여호와 신앙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후손들도 대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도록 관심을 두고 인도하는 데는 실패했다. 어떻게 보면 히스기야는 자신의 인생에만 관심이 있었다.
20~21절은 히스기야의 죽음 공식이다. 저자는 그의 특별한 업적으로 저수지와 연못을 만든 것을 언급한다. 이는 역대하 32:2~8에서 앗수르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가 여러 가지 등장하는데, 원활한 물 공급을 위해 만든 히스기야 터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전쟁 전략은 주로 오랜 기간의 철통같은 포위를 통해 성안의 사람들을 고사 시키는 것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물이 마르지 않도록 대비한 것이었다.
히스기야는 15년 수명을 연장받았지만, 결국 죽는다. 그를 이어 므낫세가 왕위를 계승한다.
나는?
-병중에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했으나, 바벨론 왕의 사신 앞에서는 교만했다. 반 앗수르 동맹을 강화할 목적으로 예물과 편지를 보낸 바벨론 왕의 사신에게 왕궁과 보물고, 군기고, 창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경제력과 군사력을 과시하여 자신이 얼마나 믿을만한 존재인지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그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결코 할 수 없고 또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마음속에서 여전히 세상이 나를 무시하지 못할 존재로, 또 대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안달하는 인생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어리석은 행동은 지적했다. 세상이 우호적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세상과 교회는 흥정의 대상이나 관계가 될 수 없다. 하나님과 세상은 혼돈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백성은 자신의 안전을 세상에 맡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요새이다.
-히스기야의 교만이 가져온 끝은 결국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왕의 병을 낫게 하시고 또 앗수르의 손에서 유다를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셨으나 그것이 영속적인 안전보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조건적이고 기계적인 약속이 아니라 인격적인 약속이었다. 히스기야가 보여준 모든 것이 언젠가 바벨론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의 아들이 바벨론의 환관이 되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의 우방이 될 수는 없기에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수용한다. 그 말씀이, 그 판단이 선하다고 인정한다. 자신이 오만했고, 교만했으며, 온전히 신실하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다. 선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 그대로(고전 10:12) 어제의 눈물과 통곡의 기도는 오늘의 거만한 미소로 바뀔 수 있다. 그렇기에 날마다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나를 쳐서 주님께 복종시켜야 하는 이유이다.
-한편으로 아쉬운 것은 하나님 심판의 메시지를 들은 히스기야가 자신의 생명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 그저 만족한 채 계속되는 심판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회개와 영적인 개혁을 소홀히 하였다. 물론 히스기야가 사는 날 동안만이라도 평화와 안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겠지만, 유다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무관심은 히스기야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오늘 내 삶의 안정뿐 아니라 우리 후손의 미래를 위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주님, 큰 기적과 은혜를 맛보았지만,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움을 봅니다. 작은 흥분에 겨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주께서 주신 회개의 기회를 붙잡아 늘 은혜와 자비 안에 거하겠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이 믿음을 더욱 전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