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는 표제(1절)가 말해주듯 여호와의 ‘신탁’이다. 말라기에 “여호와가 말씀하셨다”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메시지는 바벨론에서 돌아와 유다 지역에 거주한 포로 후기 공동체를 향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사랑하는 백성이 되었으나, 백성으로서의 특권과 의무를 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도 자기 죄를 깨닫지 못했다. 하나니은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이들을 책망하며 회개를 종용하신다.
1. 표제:말라기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1절)
말라기는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말 1:1; 슥 9:1; 12:1)로 시작한다. “경고(마싸)”는 특정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또는 선지자가 본 계시 등을 가리킨다. “마싸”라는 단어는 “짐, 부담”이란 뜻이나 “여호와의 짐, 또는 선지자의 짐”이라는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므로 “경고, 계시, 신탁”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 뒤에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므로, 심판을 내리실 하나님이나 전달하는 중개자의 부담이나 고통도 이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
2.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2~5절)
말라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질의문답을 통한 논쟁 형식으로 계시가 전개된다. 이 형식은 1:2~4:3까지 여섯 차례 등장한다. 하나님의 진술, 이스라엘의 반문, 하나님의 설명과 책망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 단락은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택함 받은 언약 백성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었노라”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줄곧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충실하게 대하셨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한다(2절). 이 물음의 속뜻은 ‘대체 무슨 일을 우리에게 해주었다고 우리를 사랑했다고 하는 겁니까?’라는 뜻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불만과 의심의 표현이다. 말라기의 기록 시기가 포로 귀환 및 성전 재건 이후로 추정되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언약을 깨고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냈다고 여겼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이미 오래 지났지만, 기대한 만큼 정치, 경제적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바램대로 해주어야 사랑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뿐 하나님을 멸시하여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는 자기 실체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백성들의 반문에 하나님은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2~3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의 대조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신 것이다. 이것은 고대 외교 관계에서 사용되었던 관념화된 언어다. 즉, 동맹이냐, 적대관계냐 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동맹 관계로 여긴다면, 에서는 적대적 관계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에돔이 이스라엘의 형제 나라지만,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모든 나라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자신의 적으로 표현하시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냐고 묻는 이스라엘에게 에서를 미워했고,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했고, 그가 물려받은 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다고 대답하셨다(3절). 한편 에돔은 우리가 무너졌지만 황폐한 곳을 다시 쌓겠다고 말한다. 이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 쌓을지라도 나는 헐겠고, 사람들이 그곳을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고,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고 말할 것이라 경고하셨다(4절). 이렇게 선포하신대로 유다는 포로에서 돌아와 재건했으나, 에돔은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에돔 멸망의 주체는 ‘만군의 여호와’이다. 말라기에서 ‘만군의 여호와’는 20회나 반복될 정도로 강조한다. 인격적인 언약의 이름과 함께 전사이신 하나님을 강조한 칭호다.
에돔과 반대로 멸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끝장난 것 같았던 야곱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이다. 에서와 야곱의 관계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이스라엘도 목격한 바이기에 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3. 제사장들의 죄(6~14절)
말라기를 통한 하나님의 첫 번째 계시는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확증했다면, 1:6~2:9은 본격적인 책망의 시작이다. 제사장을 이스라엘의 대표로 지목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제사를 업신여겼다고 꾸짖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종의 비유를 들어 아들과 종이 각각 아버지와 주인을 공경함이 마땅하다고 하신 후, 제사장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주인이신 하나님을 왜 공경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신다(6절; 사 1:2~3). 제사장조차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백성들의 상황은 어떨까?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셨다. 이에 제사장들은 ‘어떻게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절) 하며 어리둥절해 한다. 적반하장이다. 이 반응을 통해 이스라엘이 얼마나 영적으로 둔감하고 악하며 무지한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이 더럽고 부정한 떡이나 병들고 눈먼 희생제물처럼 적합하지 않은 제물을 백성에게서 받아 하나님께 드린 행위가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멸시하는 일이었다고 밝히신다(7~8절).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레 1:3, 10; 3:1) 하지만, 이 규례에는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리어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했나이까?(7절)라고 반박하며 하나님의 식탁(제단)을 거룩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런 곡물과 짐승을 총독에게 드려보라고 비꼬신다(8절).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께 그런 제물을 드리며 은혜와 용서를 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은 제단 불을 꺼 예배를 없애고 성전문을 닫는 게 낫다고 하신다(10절). 진정한 제사가 하나님께 속죄하고 순종과 헌신을 드리는 것이지만, 그런 제사가 예배의 진정한 의미가 누락되고 가식적인 행사로 남는다면 하나님은 그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의 이름은 제사장과 백성에게 소홀히 여김을 받고 있지만, 그 이름은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열방 중에서 크게 될 것이다(11절; 사 45:6). 그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예배하며, 그가 명령하고 기뻐하시는 정결한 제물을 드릴 것이다.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 있었고 자연재해도 있어서(3:11) 자신들의 형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하나님께 드릴 것을 아까워한다. 이스라엘이 가지 모든 소유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온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단과 제물을 멸시하고, 제사를 번거롭게 여기며, 훔친 것이나 병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12~13절). 제물에 합당한 수컷 짐승이 있어도 흠 있는 것을 가져와 하나님을 속이고 서원하며 복을 구했다. 하나님은 이처럼 공경심도 감사도 순종도 없는 제물을 저주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아버지와 주인이신 하나님이 온 땅의 큰 임금이며 ,열방으로부터 그 이름이 경외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14절). 제사장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책망을 겸허히 받고 하나님 경외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였다. 성전이 건축되었으나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영광스런 미래가 빨리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듯이 그분의 사랑도 우리 방식으로 정의할 수 없음을 몰랐다. 내가 원할 때 내가 바라는 것을 손에 쥐여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심판의 자리에 있어야 마땅한 사람이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불평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아들과 종은 아버지와 주인을 공경하고 두려워 하지만, 제사장은 자신의 아버지이고 주인인 하나님을 멸시하였다. 인간 총독도 받지 않을 저는 것과 병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 더러운 떡으로 주의 단을 더럽혔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악행이고 무례였다.
-자사장들은 하나님을 전혀 공경하거나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아쉬울 때는 긍휼과 은혜를 구하였다. 하나님께서 차라리 성전 문을 닫는 것이 낫겠다고 분노하실 만큼 형식적이고 불손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많으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에는 무관심하지는 않는가?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에 기쁨과 감격 대신에 싫증과 짜증이 가득했다. 율법에 따라 제물 드리는 일을 성가시게 여겼고, 가져와서는 안 될 짐승을 서슴지 않고 바쳤다. 불법(레 27:10)인 줄 알면서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짐승이 있는데도 흠 있는 것으로 바꿔치기를 일삼았다. 그들에게 제사는 구색만 맞추어 해치워야 할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죄악에 대하여 분명하게 경고하신다(1절). 하나님을 무작정 사랑만 하시는 분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내게도 경고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조용히 귀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이다.
-에서와 야곱 중에 야곱을 사랑하셨다. 우다의 성전 재건과 동시에 경쟁 국가인 에돔이 황폐한 곳을 다시 쌓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 에돔의 재건을 용납하지 않으셨다(2~5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살면 안 된다. 나를 죄악 가운데서 건지심은 물론이지만, 고난의 때에 나를 보호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여기의 삶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부정하게 번 돈으로 헌금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것(6~8절)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다. 형식적인 제사보다 진실한 삶을 드려야 하고(삼상 15:22, 롬 12:2)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한다. 혹시 나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는 삶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은 거짓된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7~10절). 그들의 기도도 듣지 않으신다. 그들에게 성전 문을 닫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일상에서 하나니 나라 백성다운 진실과 정성을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 제사장의 형식화된 종교의식을 고발하신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제단에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쳤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언제 그랬느냐?며 대든다. 참담하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자기 이익 실현의 도구로 삼으니 이스라엘 멸망 전의 상태로 다시 그 의식과 삶이 돌아가버렸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진실”, “진심”, “전력”과 같은 온전함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 구원의 시작을 열고, 이웃에 대하여 진심으로 대할 때 그 관계가 평안해진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제사장처럼 세움받은 하나님 백성이 더욱 “진실하고 진심으로” 섬길 때 교회와 나라에 하늘의 뜻이 이 땅에 가운데 임한다. 진심과 전력으로 하나님을 구할 때 그 삶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의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의 교회가 하나님께 진실하고,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섬기는 것을 지체하지 않고 회복할 때다.
*우리를 사랑하신다(2절)는 하나님을 믿으면 좋겠다. 하나님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그저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하수상한 세상에 찌들다 보니 순수하고 순전한 사랑조차 찌든 내 마음처럼 받아들인다. 사랑을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하나님 사랑을 느끼고 누리는 삶이기를…
*한편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닮아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은 결국 예배의 형식화로 이어진다. 나는 진심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명히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나의 삶에서 그분이 책망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겸허히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진실한 제사를 원하신다. 진실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주님, 말라기 시대의 위선적인 삶이 충격적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끝내기도 전에 이미 사사시대에 들어선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습이 가관입니다.
*주님, 우리 공동체의 삶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