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은 대언자(변호하는 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빛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고 혹 죄를 범하여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대언해 주시는 예수님이 계심을 깨닫게 하려고 글을 기록했다고 말한다(1절). 그러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담담하게 소개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변호인이신 동시에 우리 죄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다(2절). 그의 계명을 지키는 유무가 그 안에 있는가로 판가름된다(3,4절). 누구든지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온전하게 되었다(5절).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사는 자이다(6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이미 들은 것이었다(7절). 그럼에도 사도 요한은 다시 한번 들려준다. 그래서 요한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8절)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이 새 계명은 하나님께도 참되고 여러분에게도 참됩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새번역_8절) 이미 비추고 있는 참 빛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형제를 미워하는 어둠에 있지 않는다(9절).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기에 그를 넘어뜨리는 올무가 없다(10절). 하지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려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11절).
1.구원받은 삶의 증거_사랑(1, 5, 10절)
요한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들려준 분명한 목적을 듣고 받아들인 이들이 다시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기억하라는 의미이다. 주님의 변호는 말뿐이 아닌 행동 그 자체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다.
구원받은 하늘 백성에게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죄를 마음대로 지으며 살면서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을 때 해결책이 있다는 것이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새번역_1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분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그 주님만 의지하면 된다.그런데 이렇게 구원받은 백성은 이전과 달리 분명하게 변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새번역_5절). 자기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그 사람 앞에는 올무가 없습니다(새번역_10절)”
바로 사랑이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확인하여 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은 마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증거가 되는 것이고, 이웃 사랑은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것처럼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문제는 이토록 이미 주어진 계명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지키지 않는 것에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다. 나는 잘 지키는데 너는 잘 지키지 않는다다고 착각하고 정죄한는 것이다.
2.착각(9, 11절)
당시 교회는 분열의 위기 속에 있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서로 마음이 나뉘고 등을 돌렸다. 심각한 분열이 거짓 교사들의 세치 혀에서부터 강력한 돌풍되어 교회들을 강타했다.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은 하늘 백성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나라와 세상, 빛과 어둠을 대조하며 배경으로 설정한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영역과 통치를 거부하는 어둠의 영역으로 구별된다.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은 “사귐(교제)”이 있고 그의 다스림을 “빛” 가운데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여기는 이들 중에 실제로는 어둠에 갇혀 있는 경우가 있음을 일깨운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속에 있습니다(새번역_9절)”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새번역_11절)”
어떻게 이런 착각을 할 수 있을까?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원래 가르침을 받은 것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의지만으로 안 된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도 한계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단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변호하여 주시기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여 주셨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몸소 끝까지 순종하여 주신 증거(본)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
*더 나아가 이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도 알려 주셨는데, “빛 가운데 거하여 하나님과 사귐”, “사귐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 “말씀을 지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타남”과 같은 가르침이었다. 요한은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자신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들을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이렇다 라고 가르치는 이들은 거짓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의 이해 가운데 하나님 구속역사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이해했다. 그래서 지금 이해하는 데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재해석하고 가르쳤다. 원본은 같은데 완전히 다른 가르침이 나와버렸다.
*처음에는 미세한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해진다. 그 선명한 분별기준이 바로 “삶”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구원받은 삶의 가치를 오늘을 살아내며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늘 백성의 삶은 주님께서 말과 행동으로 분명하게 보여 주셨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은 점점 분열시키고, 정죄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로 올려 놓는다. 물론 이렇게 행하는 자신은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고 있어!”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요한 사도는 구원받은 하나님나라 백성은 그 삶에서 이 새상과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 분명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랑을 남김없이 내어 주셨기에 하늘 백성들도 사랑을 아낌없이 행하는 것이다.
*하늘 백성은 사랑하며 산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을 흉내내며 나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흉내내어 보려하는 삶을 산다.
*이 세상을 위한 최고의 사랑은 단연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을 앞두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리라는 고백을 감히 읊조리고 싶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간절히 부탁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사는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내가 죄에서 자유케된 자유인이 되었으니 죄에서 해방된 자유인으로 살아야지.. 그 삶은 죄의 권세 아래 있었을 때 자행했던 미움, 시기, 질투, 분열, 정죄, 소란, 이기적 욕심등을 쫓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나에게 베푸신 사랑을 쫓아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쫓아 살아가야지…
*하난임나라 공동체로 모인 우리 교회가 이렇게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으니, 그저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사랑하며 살아내야지!
*주님, 사랑하며 살기에도 턱없이 주복한 시간임을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삶으로 표현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지식이 있다고 행하고 있는 것처럼 착가하지 않겠습니다.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을 더 조심하며 순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