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악인을 심판하여 주십시오! [시편 109:1-15]
 – 2024년 12월 20일
– 2024년 12월 20일 –
 
본 시편은 저주시로 분류된다. 악인에 대한 강력한 저주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저주시는 시편에 나타나는 장르 중 하나이다. 시편의 저주시에 대하여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 시편의 저주시는 “악인에 대한 저주”가 핵심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대한 간구”가 핵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에 악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 그렇기에 악한 자의 악을 드러내고 심판하시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저주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기대” 및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의 실현”이라는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 
 
 
 
1. 하나님을 부름(1절)
109편은 하나님을 부르면서 시작한다. “내 찬양의 하나님이여”라는 표현은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시기에 시인이 지금부터 고하는 간구를 들어주시기를 간청하는 의미가 있다. “잠잠하지 마옵소서”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간구를 꼭 들어달라는 간절함을 호소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각양각색의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인정하면 그만큼 간절하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나의 부르짖음은 어떠할까?
 
 
 
2. 악인들의 행동에 대한 묘사(2~5절)
시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후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악인을 고발한다. 그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 악인들이 언어의 죄를 범했음을 지적한다(2~3절). 악인들이 거짓말로 시인에게 말했다고 표현하고, 그들이 미워하는 말도 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들의 거짓과 미워하는 말로 공격하는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음도 밝힌다. 즉, 악인들은 시인을 아무런 이유 없이 억압하고 괴롭혔다. 
 
둘째, 악인들이 시인의 사랑을 대적함으로 갚았음을 고발한다(4~5절). 그들은 시인의 사랑을 대적함으로 갚았고, 악인들이 시인의 선과 사랑을 악함과 미워함으로 갚았다고 표현한다. “대적하다(사탄)”로 번역된 동사는 법정 용어로 해석할 수 있기에 시인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호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시인이 대적자에 의하여 어떤 억울한 고발을 당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3. 악을 심판해 달라고 요청함(6~15절)
6절을 직역하면 “그를 대적할 악인을 지명해 줬고 대적자가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이다. 악인과 대적자는 동일인이다. 시인은 자신을 억압했던 악인에 대하여 그 악인과 같이 무자비하고 철저한 사람을 고발하는 자로 세워달라는 호소이다. 즉, 시인을 억압한 악인의 죄를 철저하게 찾아내달라는 간구로 이해하면 된다. 
 
7절은 악인데 대한 심판결과가 “그 악인이 악한 자라는 것을 밝히는” 결과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는 악인이 하는 기도라도 결국 죄임을 드러나게 해달라는 간구다. 8절부터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재판 결과에 따라 그들에게 내려져야 하는 저주를 다양하게 서술한다. 이 저주들은 단순한 심정적 보복을 표현하는 내용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의로움에 기초한 언약적 저주의 표현이다. 이를 해석하기 위해 신명기 28장에서 밝히는 것처럼 언약의 율법에 순종했을 때 얻게 될 복과 불순종했을 때 직면하게 될 다양한 저주들이 8~15절을 통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것을 다른 자들에게 빼앗기게 되는 경우들, 먹을 것이 없게 되는 내용들이 신명기 언약의 저주에 기초하고 있음을 기억해야만 본 시편의 저주가 단순한 복수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한 요청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한다. 
 
8절은 악인의 안생이 짧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9~10절은 악인들과 그의 자손들에 대한 저주를 언급한다. 9절에서 자녀가 고아가 되고 아내가 과부가 된다는 것은 악인의 인생이 짧게 끝난다는 의미다. 10절은 그 자손들의 삶이 안정감 없이 흔들리게 되고 악인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집이 황폐해져서 자녀들이 먹을 것을 구걸하게 됨을 표현한다. 11절은 고리대금하는 업자들이 악인의 소유를 빼앗아가게 해달라고 간구하는데, 이는 ‘그의 수고한 것을 다른 자가 탈취한다’로 요약된 신명기 28:30~34의 내용이다. 
 
12절은 악인에게 “인자”를 베풀 자가 없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특히 유리하고 구걸하고 있는 악인의 자손에게도 은혜 베풀 자가 없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어지는 13절은 그의 자손들이 고생하는 정도를 넘어 궁극적으로 그의 자손들이 끊어지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의 이름이 후대에는 지워지게 될 것이다. 
 
14~15절은 9~13절이 악인의 후손에 대한 내용으로 기도한 반면, 악인의 조상들에 대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14절은 여호와께 악인의 조상들의 죄악이 기억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15절은 그 죄악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땅에서 끊어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렇다면 이런 악인들이 저주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언급된 2~5절은 악인이 거짓으로 시인을 억압했고 선을 악으로 갚았다는 내용이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근거와 이유는 16~20절에 자세하게 나타난다. 
 
 
 
나는?
-시인은 자신의 사랑을 미움으로 돌려받았다. 진실한 우정은 거짓과 속임수로 돌아왔다. 사랑한 지체가 자신을 대적하고 공격하여 부당한 고소를 했다. 선을 악으로 갚은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이렇게 미움 당하는 이유를 몰라 더욱 안타까웠다. 그러므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깨우는 일뿐이었다. 하나님이 입을 여시면 그들의 거짓되고 기만적이고 미움 가득한 입이 다물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시인은 악인과 자신의 처지가 바뀌기를 기도한다. 대적이 악인에게 당하고, 사탄의 저주가 있고, 재판 때에 그의 음모가 드러나고 그의 위선적인 기도가 하나님께 적발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시인의 바람대로 지금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으로 행세하며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이들이라도 결국엔 하나님 앞에서 다 이실직고할 때가 올 것이다. 
 
-악인이 누리는 부당한 번영과 복지와 행복, 즉 샬롬과 헤세드를 하나님께서 거둬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장수하지 못하게 하시고 직분을 빼앗아달라고 한다. 그 가정이 누리는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기를 원했으며, 그가 부정하게 쌓은 재물도 부정한 자에게 빼앗기기를 바랐다. 그 대적이나 자녀들은 어떤 이웃에게도 인애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토로한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묵인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가 가혹하게만 들린다면, 우리는 세상의 고통과 탄식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지 모른다. 
 
*다윗은 강력한 저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 원수에 대한 저주가 가득차 있다(6~10절). 이런 기도 솔직히 공감도 되지만, 어색하기도 하다. 이런 기도가 과연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 타당할까 라는 생각도 스친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도 생각이 된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정직한 기도인가! 기도조차 형식이 되어버린 신앙세태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만큼 이렇게 정직하게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다윗의 모습은 분명 나에게도 도전이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솔직한 기도의 내용을 보니 자신 안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토로한다는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이런 기도가 가장 기도다운 기도가 아닐까 라는 마음이 든다. 
 
*둘째,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저주의 기도는 골방에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 원수와 악인에 대한 험담을 공동체 안에서 소통하면 금물이다. 즉, 직접 저주하지 말라는 거다. 시편의 수많은 저주시가 이런 측면에서 분명한 예를 보여준다. 원수에 대한 저주의 토로는 오직 주님께만 토해내야 할 것이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도 된다.
 
*셋째, 참으로 감탄이 나오는 부분인데, 저주시인데, 찬양으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어두운 저주하는 말이 가득차 있지만, 마치 찬양의 밝은 빛 아래 어둠을 노출시키는 이미지다. 이것은 원수를 향해 직접 심판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선선히 내려놓는 신뢰의 표현이기도 하다. 즉, 내가 직접 원수를 향해 심판의 행동을 한 후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면,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한 합리화일 뿐이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그마저도 올려드리는 기도여야 한다는 의미다. 원수는 늘 직접 행동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원수의 머리에 직접 불을 올려놓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도록 내어 놓는다. 
 
*또한 내가 누군가에게 저주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반대로 누군가도 나에 대하여 저주의 기도를 토로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저주의 기도를 드릴 때는 늘 자신의 모습을 함께 투영해야 할 것이다. 저주의 토로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도록 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삶에 대한 겸손함을 잃으면 누군가가 나를 향해 저주의 기도를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목회는 늘 오해받음의 연속인 듯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강변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 억울함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아무리 골방일지라도 저주의 기도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지난 걸음동안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내가 결코 가장 나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었다. 나도 그럴 수 있으니, 할 말이 없더라…. 나도 죄의 덫에 얼마든지 걸려들 수 있으니 어쩌겠는가… 이런 은혜가 고통은 감수하게 되고 원수 삼는 일은 점차 퇴색되어 가게 해주시더라…
 
*하지만 가끔 정말 속상하게 하는 사람, 그 사람이 가까이 있다면 깊은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나의 골방에서 하나님께 시린 마음 토할 뿐이다. 나는 언제나 끝까지 사랑하여 주신 주님의 마음과 삶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라나….
 
 
 
 
*주님, 악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호소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먼저, 간절하게 부르짖겠습니다. 
*주님, 저주의 기도가 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음을 인정합니다. 늘 겸손함으로 삶을 걷겠습니다. 
*주님, 원수나 저나 도진개진입니다. 쌤쌤인듯 하고요, 그 나물에 그 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제 마음이 이런 상황에 시달리지 않기를 구합니다. 이제 머리숱이 얼마 남지 않은거 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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