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수고하고 무거운 나의 멍에와 짐, 가벼운 주님의 멍에와 짐[마 11:20-30]
 – 2023년 02월 16일
– 2023년 02월 16일 –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 주님을 향한 이 세대의 부당한 반응은 어느 도시에서나 나타났다. 주님의 주 사역 무대였던 벳세다와 가버나움도 그랬다.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행한 기적과 권능을 과거 멸망하였던 두로, 시돈, 소돔 등이 경험했다면 충분히 돌이켰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세례 요한을 “그 선지자”로 자신을 “오실 그”로 분명하게 정체성을 들어내신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님의 권능을 가장 많이 경험했던 사역 거점 도시들은 교만하여 회개를 거부한다. 요한과 주님께서 선포한 “회개하라”는 메세지는 다분히 공동체적 차원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선포였던 것이다. 

 

 

 

1.큰 은혜, 큰 책임(20-24절)

세례 요한이 투옥된 이후 사역의 거점을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겨 갈릴리 주변 지역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다양한 기적과 권능을 베푸셨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거절과 무관심이었다.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의 분명한 증거와 함께 선포된 하나님 나라였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이 세대의 분위기”가 무반응 그 자체였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을 향해 강하게 책망하신다. 첫 번째 지역은 ”고라신과 벳세다“이다. 이 지역은 가버나움에 인접한(북쪽으로 5km) 도시였다.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이 이 지역 출신이다(요 1:44).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이 두 지역을 “두로와 시돈”에 비유 하셨다. 이 두 도시는 부요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한 이방 도시들이다. 주님께서는 고라신과 벳세다가 경험한 기적과 권능을 두로와 시돈이 경험했다면 진즉에 회개 했을 것이다. 이는 이방도시들보다도 갈릴리 주변 도시들이 더 완악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가버나움을 책망하시는데 이 도시는 주님의 사역의 중심지이기에 가장 많은 기적과 권능을 맛보았던 지역이다. 그런데 이 도시가 구약에서 가장 타락한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로 비유하셨다. 더 나아가 더 악하다는 오명을 얻는다. 역시 그 도시들이 주님의 권능을 맛보았으면 여전히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주님과 그의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는 것은 “교만”하다는 증거다. 주님은 실제로 “스스로 높인들 하늘까지 높아 지겠는가?” 라고 반문하셨다. 곧 그 교만이 그를 음부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심각한 이유는 그들이 받은 심판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면 옛 시대의 어떤자 보다(즉 세례 요힌) 더 큰 자가 되지만 거절하면 이에 따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가 클수록 책임도 큰 것이다. 주님의 선명한 계시와 치유현장의 한 복판에 있었던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어느 도시와 비교하여 비할 수 없이 크다.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메시아에 대한 증거들이다(5절). 이런 기적들을 갈릴리 주변에서 특히 많이 행하셨는데 당연히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많이 알았다고 짐작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주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상대적으로 많이 체험하고서도 주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깨달음은 없었다. 이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매우 분노하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주님의 주님되심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고라신과 벳세다, 그리고 가버나움을 향한 주님의 경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빛 되신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았다면 더 많은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심판의 날에 빛을 더 많이 받은 도시가 그렇지 못한 도시보다 더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고라신과 벳세다, 가버나움을 향한 경고가 오늘날 완성된 계시가 주어진 교회들에게 하시는 경고임을 외면하면 안되는 것이다. 주신 말씀을 더 많이 깨달을수록 더 많은 영적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들 도시들은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말씀과 이적들을 경험했음에도 메시아와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소돔과 고모라가 보지 못한 메시아를 대면하며 말씀을 듣는 특권을 누렸지만 이내 망각하고 말았다. 얼마나 무관심하든지 주님을 열렬히 환대하지도 극렬히 반대하지도 않았다. 이적과 기적에는 반응했으나 정작 말씀과 진리앞에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지는 않았다. 

 

*주님과 복음에 대하여 무관심하면 심판에 이른다.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고 까지 하셨다. 주님의 주님되심을 선포되는 말씀과 이적과 기적으로 보고도 아무일도 하지 않은 이 도시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지른 것이다. 

 

*보고 듣고 아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도덕법을 어기는 것 보다, 어떤 죄악된 행위에 대하여 유기하거나 방기하는 것도 죄이다. 살인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구조행위를 거부하거나 미적거리는 것도 죄인 것이다.

 

*크고 작은 교회가 곳곳에 서 있는 우리가 사는 도시가 주님의 복음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예민하게 살아내는 이들이 한나라도 더 세워질 때 은총에 합당한 책임에서 자유할 수 있겠다.  

 

 

 

2.그럴수록 더 구원의 초청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25-30절) 

그런데 모든 마을과 도시들이 하나같이 주님의 말씀과 이적을 보고 반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이들에게는 숨기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셨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다.” 이는 주님께서 권능을 행하시고 가르치시며 선포하신 천국복음에 함당하게 반응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본 단락은 어떤 이들이 더욱 복음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깨달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있도록 해 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아는 이들은 “계시를 받는 자(27절)” 외에는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자가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계시는 받는 자는 누구일까? 어린아이과 같이 들려주고 보여준대로 믿고 반응하는 자이다. 주님께서 계시하여 주신대로 보고 듣고 배운대로 알고 만난 하나님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전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 임하는 것은 겸손의 의미도 있겠지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존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 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허락하심과 계시하여 주심을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특징의 반응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도시와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적어도 이와같이 받아들이는 소수의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그 뜻대로 보내심을 받고 천국 복음 곧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증거하고 보여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증거하여 주신 하나님을 믇고 받아들이는 이가 곧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불러 주님께 나아오면 쉬게 하리라” 약속해 주신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신다. 그럼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도 하신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짐은 죄와 인생의 짐이지만, 많은 이들이 율법주의의 무거운 짐으로 오해한다. 이어지는 안식일 규정의 말씀과 연결하여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곧 우리로 쉼, 곧 안식하게 하시는 것이기에 율법의 안식을 지키는 것이 참 안식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고) 배우라고 하신다. 당시 멍에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멍에를 메는 것처럼 소 한마리가 홀로 메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가 함께 메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임의 멍에는 주님이 함께 메어 주시는 멍에이고 주님을 따라 가며 배우는 멍에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 힘으로 내 마음대로 가지 않고 따라가면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면 마음이 쉼을 얻는 다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은 우리를 살리려는 말씀이고 온전케하여 즐겁게 따라가도록 하는 법인데, 홀로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해 지고 가주시는 것 이기에 쉼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믿음의 여정이 오늘날 고라신과 벳세다, 가버나움과 같이 되지 않기를 결심한다. 주님의 선포되고가르쳐 주신 말씀과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무수한 주님의 역사에 반응하고 순종하며 좁은 길을 걸어가련다. 

 

-더온누리교회에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증거들이 너무도 많아서 오늘 말씀이 특히나 경고가 된다. 더욱 반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걸어나가야 하겠다. 믿음과 마음가짐은 어린아이처럼, 행함과 삶에는 성숙한 어른처럼 행하는 교회를 추구해야지….

 

-보고 듣고 아는 대로 반응하는 순종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결국 본 것이 많을 수록, 들을 것이 많을 수록, 경험한 것이 많을 수록 더 큰 책임을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져야 하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주님과 함께 메고 가는 “주님의 멍에”이기에 내가 가벼운 것이다. 내가 끌고 가는 나의 멍에를 주님께서 메주신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메고 가시는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자고 초청하신다. 그래야 쉼을 얻는다. 

 

*주님의 멍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멍에이다. 그러니 주님이 초청하셔서 함께 메었을 때 주님이 더욱 힘써 메어주시기에 나의 죄의 짐이 가벼운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삶을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책임져 주신 하나님 아버지처럼 일상의 고단함의 멍에도 주님이 함께 메 주시기에 평안과 쉼을 누리며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말씀과 이를 증거하는 이적과 기적을 무수히 보고서도 반응하지 않는 대부분의 도시와 사람들 속에서 그나마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반응하여 받아들고 주님께 나아오는 이들에게 주님은 구원과 쉼, 평안을 약속하셨다. 이 약속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오늘 하루의 삶에서 누리는 은혜가 가득할 것을 기대한다. 

 

 

*단기팀의 오늘 여정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짊어지고 계신 그린 벧엘의 멍에를 오늘 하루만 함께 져줄 수 있겠니 라고 요청하신다. 이 멍에를 함께 짊어지며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누리며 영혼의 쉼을 누려 보라고 초청하셨다. 은혜로운 하루, 몸은 피곤하여도 영혼은  평안과 쉼의 하루가 될 것을 믿는다.

 

*이와 같은 하루가 되기 위해서 더욱 주님의 말씀과주님의 마음 안에 거하도록, 이미 비춰 주신 은혜의 빛에 반응하고 순종하여야 하겠다. 피곤한 몸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를 피곤케 하도록 장악하는 것에 담대하게 대적해야 하겠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허락하셨기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순종해 보아야지…

 

 

 

 

*주님, 고라신과 벳세다, 가버나움처럼 은혜만 받는 이기적인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반응하고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쉼과 평안의 초청이 너무 감사합니다. 주님의 멍에와 짐을 함께 메며 이 평안과 쉼을 누리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오직 여호와만 송축하리로다 [시편 115:1-15]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다섯 번째 시편이다. 115~117편은 각 시편의 맨 마지막 구절에 “할렐루야”라는 명령형이 나온다. 열방이 섬기는 우상의 헛됨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동시에 여호와를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하나님 나라 통치가 이 땅에! [시편 114:1-8]

 이 시편은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111~118편)의 네 번째 시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그들과 함께하시고 나타나신 하나님을 회고하는 서술적인 찬양시이다. 찬양하라는 직접적인 권고의 말은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 [시편 112:1-10]

 111편과 쌍을 이루는 지혜 시편이다. 동시에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두 번째 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묘사하는데 이 사람이 지닌 신앙적 성품은 111편이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다윗이 바라본 메시아 [시편 110:1-7]

 본 시편은 150개의 시편 중에서 신약성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자기 변증에 1절이 사용되고(마 22:44; 막 12:36; 눅 20:43), 히브리서 5:6절은 4절을 인용한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