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인 VS 제자들 [요 4:27-42]
 – 2022년 01월 13일
– 2022년 01월 13일 –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늘 피해 다니던 동네 사람들에게 담대히 외친다. “와서 보라!”…. 반면에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요단강 지역에서 그토록 열심으로 사역하였던 열정을 사마리아 지역에서는 표출하지 않는다. 침묵한다. 그 사이 사마리아 최초의 복음 전도자는 “그 여인”이 된다. 그 여인과 제자들의 묘한 대비가 울림을 주는 본문이다.

와서 보라!(28-30절) –
그 선지자(타헤브_19절) 그 선지자란 ‘모세와 같은 선지자 라는 의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며 신 18:15-18에서 약속한 대로 “그 선지자(타헤브)”로 받아 들인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고 예배 장소와 대상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_새번역_29절)” 확신은 들지 않지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고 증언한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스스럼 없이 들추며 예수님을 증언한다.

*예수님을 만나면 나의 감추고 싶은 삶을 고백하더라도 예수님을 드러내고 싶게 된다. 나의 부끄러운 삶이 오히려 복음의 능력의 근거가 된다. 복음이 가져온 삶의 변화는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고 사람들과 공동체에서 스스로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담대하게 복음의 능력을 설명하는 재료가 된다.

*사마리아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이는 남편이 아님을 정확하게 알고 계신 주님을 도무지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주님과의 대화가 놀랍고 충격이었지만,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동네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외쳤다. “와서 보라!”

*”와서 보라”는 1:19-51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들이 소개 되는데, 이 때 증언하는 방식을 예수님께서 맨 처음 보여 주셨다. 바로 “와서 보라”였다. 주님은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와서 보라”하셨고 그들은 제자가 되었다. 빌립에게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제자가 된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 주님을 소개하면서 다시 “와 보라”고 권했다.

*사마리아 여인이 지금 그 표현을 사용한다. 이 여인이 사마리아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 열 두 제자들이 아니라 이 여인이 최초 전도자의 영광을 차지한다. 반면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사마리아 동네에 들어갔어도, 예수님과 대화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보았음에도 “와서 보라” 하지 않았다. 사마리아 땅에 대한 뿌리 깊은 오만과 편견에 제자들은 침묵하였다. 제자들의 사마리아에 대한 단단한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의도적으로 “추수의 사명”을 말씀하신 것일 수 있다. 제자들과의 대화 이후 이어지는 동네의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한다(39절).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알지 못했다. 자신이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으니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다. “와서 보라”는 엄밀하게 “인도”였다. 그렇게 주님 앞에 나온 주민들은 주님께 “전도”를 들었다. 자신은 설명할 수 없으니 일단 “와 보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4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이들에게 전하시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쩌면 “인도”일 수 있다. 내가 완벽하게 복음을 말한 들 그것은 인간의 이해에서 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와서 보라” 담대히 권면하고 주님 앞에 나오게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인도는 자격을 갖추고 훈련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증거 해야 할 복음이기에 내 안에 예수님에 대한 기쁨이 있다면, 적어도 “와서 보라” 외쳐야 할 때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누구에게든지 전해야 할 때(거두어야 할 때)(27, 31-38절)
긴 여정에 지쳐 있었음에도 제자들은 마응로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해왔다(27절). 그런데 우물가에서 준미은 어떤 여인과 대화하고 계셨다. 너무도 진지하여 감히 끼어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묻는 자가 없더라(27절)” “이상히 여겼다”는 번역을 다른 번역들에게는 “놀랐다”는 의미로 더 많이 번역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 상황에 대해 묻지 않았다.

*질문이 사라진 신앙은 모 아니면 도다. 자신의 판단이 먼저인 것이다. 제자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에 이미 마음이 상해 있었다. 이에 더해 주님께서 여인과 대화 하고 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 뿐이었을 것이다.

양식을 구해 온 제자들이 먹을 것을 권했다(31절).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은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다(32절). 제자들은 당황했다(33절). 주님은 자신의 양식은 자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34절). 이 말씀을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추수(거두어 들이는 것)임을 밝히신다.

그리고 이미 추수가 시작되었음도 덧붙이신다. ‘거두는 자’는 추수하는 자이다. 자기 삯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추수가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추수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것’으로 표현 하셨다. ‘영생에 이르는 열매(36절)=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4절)’이다.

또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다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은 “거두는 것(추수)”이다(38절). 예수께서 뿌린 것을 제자들이 수확하도록 파송 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자신들이 노력하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되리라는 점이다. 심는 자가 반드시 거두리라는 보장이 없고 때때로 뿌리지 않았어도 거두게 되는 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그러므로 전도에 있어 전적인 자기 공로는 없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복음의 씨앗을 파종함이 먼저 있었고 무수한 계기들을 통해 길러져서 나를 통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전도에 있어 나의 지분은 별로 없다.

*무엇보다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과 제자들의 침묵이 묘하게 비교된다. 제자들은 사마리아 지역이어서 침묵했지만(아예 말을 섞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껏 침묵하던 삶에서 증언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제자들은 전하고 싶은 대상(유대인들)에만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42절)” 되심을 온 세상에 알리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에는 그 대상에 구별이 없다. 모든 이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장에서 자신이 먼저 “와서 보라”고 하셨듯 사마리아에도 “와서 보라”라고 먼저 전해야 할 이는 제자들이었음에도 그들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영광을 내주고 말았다. 인간적인 전통과 관습, 오랜 사상의 벽을 넘는 것을 너무도 주저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실 때, 유대인으로서 굳은 마음을 내려 놓아야 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되도록이면 사마리아 땅에 들어갔지만 사마리아 사람들과 만나기를 꺼려 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든지, 어떤 지역에서든지 선입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에게든지, 어떤 곳이든지 구별없이 복음은 전해야 한다. “와서 보라!”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39-42절)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인이 자기가 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 맞히셨다고 증언한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었다(39절). 그들은 예수님께 “함께 머물기를” 요청했다(40절). 예수님이 여인이 증언한 “타헤브(그 선지자)”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틀을 그 마을에 더 계셨다. 이틀 만에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은 놀라운 고백을 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의 말 때문만은 아니오. 우리가 그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오(새번역_42절).” 라고 고백한다.

여인의 말(증언)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을 듣고 믿었다. 무엇을 믿었냐면, “…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인 줄 앎이라(42절 하)” 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참 구주(구원자_ 소텔_saviour)라고 고백했다.

*믿음이란 자기 신념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고 그분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 중요하다. 사마리아 종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인습과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서 나가게 할 것이다.


나는?
-더온누리공동체가 “와서 보라”, “예수의 말씀으로”의 증언과 변화의 간증이 넘치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 감동과 감격 때문에 내가 충분히 설명해 줄 수는 없어도 “예수의 말씀”이 넘치는 공동체를 담대히 소개하고 인도할 수 있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제자들이 일어나면 좋겠다. 그렇게 인도되어진 영혼들에게 “예수의 말씀”이 풍성하게 가르쳐 지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자기의 말, 자기의 주장, 자기 신념, 자기 전통, 자기 학문이 넘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이 역사하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고백”이 이어지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자기 감정, 자기 지식, 자기 편견, 자기 오만에 사로잡혀 사마리아 지역은 저주 받아 부정한 지역이므로 접촉조차 꺼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기꺼이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셔서 주저함 없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야기하시는 모습을 본 받았으면 좋겠다.

-복음은 누구에게든지, 어떤 지역이든지 구별 없이 전해 져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주님,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알고 계시는 주님을 “와서 보라”고 담대히 증언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으로 믿음을 굳게 하겠습니다. 나의 신념, 전통, 지식으로 믿음이라는 포장을 하지 않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오직 여호와만 송축하리로다 [시편 115:1-15]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다섯 번째 시편이다. 115~117편은 각 시편의 맨 마지막 구절에 “할렐루야”라는 명령형이 나온다. 열방이 섬기는 우상의 헛됨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동시에 여호와를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하나님 나라 통치가 이 땅에! [시편 114:1-8]

 이 시편은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111~118편)의 네 번째 시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그들과 함께하시고 나타나신 하나님을 회고하는 서술적인 찬양시이다. 찬양하라는 직접적인 권고의 말은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 [시편 112:1-10]

 111편과 쌍을 이루는 지혜 시편이다. 동시에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두 번째 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묘사하는데 이 사람이 지닌 신앙적 성품은 111편이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다윗이 바라본 메시아 [시편 110:1-7]

 본 시편은 150개의 시편 중에서 신약성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자기 변증에 1절이 사용되고(마 22:44; 막 12:36; 눅 20:43), 히브리서 5:6절은 4절을 인용한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