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의 요청에는 묵묵부답이셨으나 명절 중간에 은밀하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10절). 유대인들(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찾아 죽이려 했고 무리들은 그런 유대인들이 무서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12-13절).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이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듣게 된다. 사람들은 ‘놀랍게 여겼고’,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반박하신다.
1.예나 지금이나 차별이란…(14-15절)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주님에게 유대인들(종교 지도자들)이 “놀랍게 여겼다(15절).” ‘놀랍게(다우마조)’는 ‘무릎을 치며 공감하다, 감탄하며 인정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주님의 가르침이 깜짝 놀랄 정도로의 수준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놀란 직접적인 이유를 요한은 이렇게 밝혔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새번역)”
주님의 외모를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다. 정식 랍비 교육을 받은 적인 없는 갈릴리 촌뜨기인데?, 그런데 어떻게 성경에 해박하고 탁월하게 해석할까? 라는 반응이다. 지역과 학벌이 별 볼일 없는데 기이하다는 반응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세상이나 교회나 별반 차이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차별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안타깝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열매는 “겉모습”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천박한 세상 논리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려는 마음에 인내를 가져야 한다. 세상 지식이 주는 선입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이 깨우쳐 주는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리라!” 겉모습이 아니라 속 사람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껍데기보다 알맹이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2.논쟁(16-24절)
유대인들은 주님을 죽이려고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주님께서도 이 문제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셨다. 한 마디로 안식일의 의미를 따라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은 오히려 유대인들임을 지적하셨다. 그토록 존중하는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면서,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건강하게) 해 준 일을 가지고 어찌하여 분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22-23절).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겉모양으로 심판하지 말고, 공정한 심판을 내려라(새번역_24절)”
결국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려는 명분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듯 보이는 주님의 가르침에 열광하는 백성들의 모습에 주님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부끄러운 속마음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주님을 죽이려는 합당한 명분으로 내세운 “안식일”을 포함한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도리어 유대인들 임을 드러내셨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율법을 따라 산다고 착각하였다. 하지만 율법은 소유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순종 하라고 주신 것이다. 엄밀하게 유대인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는 마음이 없었기에 율법의 원저자이신 주님의 가르침을 거절한 것이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을 “갈릴리 출신,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촌뜨기”로 차별하고, 자신들의 율법해석을 신랄하게 가르침과 기적으로 뒤엎는 것에 분노하여 죽이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보다 자기의 영광에 심취하기에 율법의 참 의미는 상관 없었고 율법의 참 의미를 가르치시는 주님의 가르침은 그저 자신들의 종교적인 권위에 대한 도발일 뿐이었다. 율법이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인격과 성품에 기반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한 그들은 하나님이신 주님의 가르침에서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율법의 참 의미(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몸 전체를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분개하느냐?(새번역_23절)” 주님은 안식일에도 할례가 행하여 지지 않느냐고 반문하신다. 그러니 안식일에 주님께서 행한 사람을 온전히 회복하게 한 일은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주님의 주장은 논리상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종교 지도자들)에게 율법은 자신들의 종교 권력 유지 수단일 뿐 이었다. 이미 “확증편향”된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겉 모습”에 따른 “차별”이었다. 주님은 갈릴리 출신의 평범한 목수였다. 15절은 “배우지 않고 글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기록한다. “배움도 없고 글도 모르는 것 처럼 보이는 지역 출신의 겉 모습은 자신들의 율법 해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리여도 상관 없다. 자신들의 지침이 진리가 되어 버린 지 오래 였기에 시골 촌뜨기의 도발에 쫀심이 상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새번역_17절)”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강요하는 이들일 뿐이다.
나는?
-주님은 당시 정식 랍비 교육을 받지 않았다. 배움과 글은 랍비 교육과 율법을 읽을 수 있는 히브리어 능력을 의미하는데, 갈릴리 출신이 이런 교육을 받을 리 만무 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번듯한 선생님도, 정규 교육도 받지 않은 주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겉 모습만 보았다. 하지만 주님의 겉 모습은 실제 모습이 아니었다.
-주님은 랍비들과 다른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무릎을 치게 했다. 감탄하며 가르침을 인정하게 하셨다. 유대인들과 차원이 달랐다(마 7:29). 왜 그랬을까? 요한은 16절을 통해 이렇게 밝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새번역)”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특별하게 그 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을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했지만, 자신들도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셨다. 외적인 형식인 할례를 안식일에 행하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회복된 질병을 고치는 것이 왜 귀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성령께서 말씀을 깨우치게 도와 주심으로 말씀이 필요한 이들에게 옛 것과 새 것(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아버지의 뜻을 따라” 능숙하게, 더 나아가 주님처럼 “무릎을 치며 감탄하도록”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살아나는 삶들을 보고 싶다. 주님, 제게 이 은혜를 주십시오….
*주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전하셨다. 유대인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전하지 않으셨다. 내가 새기고 또 새겨야 할 말씀이다.
*차별은 언제나 존재한다. 내가 차별 하든지, 또는 차별을 당하든지… 이것이 인생이라 할 정도로 차별은 일상화 되어 있다. 특히 요즘은 더욱 이런 “차별”이라는 말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주의해서 ‘차별’하지 않고 ‘차별’당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런 차별은 이미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함께 공존하여 왔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하게 공존하는 차별의 분위기 속에서 세상과 사람이 당연히 행하는 차별의 물결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이들이어야 한다. 이것의 출발은 내가 알고 있는 말씀보다 하나님께서 드려주시고 깨닫게 하는 말씀을 차별하면 안 되는 것 부터 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지식이 성령의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마치 유대인들이 주님의 안식일 행보를 바라보며 반응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익숙한 전통 속의 지식보다 지금 나를 깨우치는 말씀 앞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산다!
*겉 모양이 아니라 공정하게…
*주님, 나의 지식이 무릎을 치며 감탄하는 성령의 깨우침 앞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겉 모습을 보고 차별하는 저급한 삶이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껍데기 보다 속을 더 바라보는 안목을 주십시오.
*주님,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말씀으로 살아가겠습니다.
1.예나 지금이나 차별이란…(14-15절)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주님에게 유대인들(종교 지도자들)이 “놀랍게 여겼다(15절).” ‘놀랍게(다우마조)’는 ‘무릎을 치며 공감하다, 감탄하며 인정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주님의 가르침이 깜짝 놀랄 정도로의 수준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놀란 직접적인 이유를 요한은 이렇게 밝혔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새번역)”
주님의 외모를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다. 정식 랍비 교육을 받은 적인 없는 갈릴리 촌뜨기인데?, 그런데 어떻게 성경에 해박하고 탁월하게 해석할까? 라는 반응이다. 지역과 학벌이 별 볼일 없는데 기이하다는 반응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세상이나 교회나 별반 차이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차별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안타깝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열매는 “겉모습”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천박한 세상 논리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려는 마음에 인내를 가져야 한다. 세상 지식이 주는 선입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이 깨우쳐 주는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리라!” 겉모습이 아니라 속 사람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껍데기보다 알맹이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2.논쟁(16-24절)
유대인들은 주님을 죽이려고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주님께서도 이 문제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셨다. 한 마디로 안식일의 의미를 따라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은 오히려 유대인들임을 지적하셨다. 그토록 존중하는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면서,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건강하게) 해 준 일을 가지고 어찌하여 분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22-23절).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겉모양으로 심판하지 말고, 공정한 심판을 내려라(새번역_24절)”
결국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려는 명분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듯 보이는 주님의 가르침에 열광하는 백성들의 모습에 주님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부끄러운 속마음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주님을 죽이려는 합당한 명분으로 내세운 “안식일”을 포함한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도리어 유대인들 임을 드러내셨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율법을 따라 산다고 착각하였다. 하지만 율법은 소유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순종 하라고 주신 것이다. 엄밀하게 유대인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는 마음이 없었기에 율법의 원저자이신 주님의 가르침을 거절한 것이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을 “갈릴리 출신,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촌뜨기”로 차별하고, 자신들의 율법해석을 신랄하게 가르침과 기적으로 뒤엎는 것에 분노하여 죽이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보다 자기의 영광에 심취하기에 율법의 참 의미는 상관 없었고 율법의 참 의미를 가르치시는 주님의 가르침은 그저 자신들의 종교적인 권위에 대한 도발일 뿐이었다. 율법이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인격과 성품에 기반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한 그들은 하나님이신 주님의 가르침에서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율법의 참 의미(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몸 전체를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분개하느냐?(새번역_23절)” 주님은 안식일에도 할례가 행하여 지지 않느냐고 반문하신다. 그러니 안식일에 주님께서 행한 사람을 온전히 회복하게 한 일은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주님의 주장은 논리상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종교 지도자들)에게 율법은 자신들의 종교 권력 유지 수단일 뿐 이었다. 이미 “확증편향”된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겉 모습”에 따른 “차별”이었다. 주님은 갈릴리 출신의 평범한 목수였다. 15절은 “배우지 않고 글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기록한다. “배움도 없고 글도 모르는 것 처럼 보이는 지역 출신의 겉 모습은 자신들의 율법 해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리여도 상관 없다. 자신들의 지침이 진리가 되어 버린 지 오래 였기에 시골 촌뜨기의 도발에 쫀심이 상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새번역_17절)”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강요하는 이들일 뿐이다.
나는?
-주님은 당시 정식 랍비 교육을 받지 않았다. 배움과 글은 랍비 교육과 율법을 읽을 수 있는 히브리어 능력을 의미하는데, 갈릴리 출신이 이런 교육을 받을 리 만무 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번듯한 선생님도, 정규 교육도 받지 않은 주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겉 모습만 보았다. 하지만 주님의 겉 모습은 실제 모습이 아니었다.
-주님은 랍비들과 다른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무릎을 치게 했다. 감탄하며 가르침을 인정하게 하셨다. 유대인들과 차원이 달랐다(마 7:29). 왜 그랬을까? 요한은 16절을 통해 이렇게 밝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새번역)”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특별하게 그 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을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했지만, 자신들도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셨다. 외적인 형식인 할례를 안식일에 행하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회복된 질병을 고치는 것이 왜 귀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성령께서 말씀을 깨우치게 도와 주심으로 말씀이 필요한 이들에게 옛 것과 새 것(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아버지의 뜻을 따라” 능숙하게, 더 나아가 주님처럼 “무릎을 치며 감탄하도록”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살아나는 삶들을 보고 싶다. 주님, 제게 이 은혜를 주십시오….
*주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전하셨다. 유대인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전하지 않으셨다. 내가 새기고 또 새겨야 할 말씀이다.
*차별은 언제나 존재한다. 내가 차별 하든지, 또는 차별을 당하든지… 이것이 인생이라 할 정도로 차별은 일상화 되어 있다. 특히 요즘은 더욱 이런 “차별”이라는 말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주의해서 ‘차별’하지 않고 ‘차별’당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런 차별은 이미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함께 공존하여 왔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하게 공존하는 차별의 분위기 속에서 세상과 사람이 당연히 행하는 차별의 물결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이들이어야 한다. 이것의 출발은 내가 알고 있는 말씀보다 하나님께서 드려주시고 깨닫게 하는 말씀을 차별하면 안 되는 것 부터 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지식이 성령의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마치 유대인들이 주님의 안식일 행보를 바라보며 반응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익숙한 전통 속의 지식보다 지금 나를 깨우치는 말씀 앞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산다!
*겉 모양이 아니라 공정하게…
*주님, 나의 지식이 무릎을 치며 감탄하는 성령의 깨우침 앞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겉 모습을 보고 차별하는 저급한 삶이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껍데기 보다 속을 더 바라보는 안목을 주십시오.
*주님,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말씀으로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