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0:19-40 점입가경_세금 논쟁과 부활 논쟁
본문은 같은 분파에 속한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도전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세금에 대한 질문을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는 죄로 예수님을 잡으려 한다(19~26절). 기득권 세력인 사두개인들은 성경과 이성에 부활 교리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주장을 무너뜨리려 한다(27~40절). 예수님은 두 장면에서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신다.
사두개인들은 20:27에 유일하게 등장한다. 사두개파는 제사장 직분을 가진 성직자들과 평신도 귀족들로 구성됐다. 사두개파는 제사장들과 연대하면서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확보하고 정치를 장악했다. 기득권을 위해 로마의 통치에 협조하고 로마의 보호 아래서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과 부를 쌓았다. 부활과 내세 또는 천사들과 귀신들의 존재를 미디 않았다(행 23:8). 기록된 전승(오경, 성문서, 선지서)과 구두 전승의 권위를 인정한 바리새인들과 달리 기록된 토라(오경)만 권위 있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사두개파는 기득권 세력이었으므로 부활과 내세 신앙에 근거하여 혁명을 시도하는 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급진적인 변화를 기대하며 추구한 바리새인들과 에세네파와 달리 현재의 질서에 만족하였다.
1. 세금에 대한 질문과 대답(19~26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가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고 예수님을 즉시 체포하려고 했다(19절). 하지만 백성의 눈이 무서워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기회를 엿보던 중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길 계획을 세운다(20절). 이를 위해 정탐꾼들을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보낸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에 대한 기득권과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들은 ‘의로 옷을 입힌 악’을 행하는데 민첩하고 영민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말의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면서 예수님은 곧게 말하고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고 오직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다고 평가한다(21절). “곧게(오르쏘스, 바로)”는 예수님의 단호한 태도를 의미하는 부사다. 예수님의 타협하지 않는 성품을 강조함으로써 세금 징수에 대해서도 로마의 정책에 맞서도록 유도한다. 그들은 야비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22절)” 이 질문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납세를 거부하면 백성을 선동하여 반란을 도모한 죄로 총독에 넘길 요량이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을 두려워했지만, 체제 전복을 시도한 죄에 대한 로마의 처벌은 백성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예수님이 그들의 악한 책략을 아셨다(23절).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게 하신 후에 누구에 대한 형상과 글귀가 새겨져 있는지 역질문 하신다(24절). 로마 황제의 형상과 그를 가리키는 칭호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그들은 카이사르의 형상과 글귀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들’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치라 라고 명령하신다(25절). “바치라(아포디도미)”로 번역된 단어는 빌린 것이나 받은 것을 갚거나 돌려주는 “돌려주다” 의미에 가깝다. 이는 세금이 통치자의 보호와 혜택에 대한 보답으로 갚아야 하는 의무임을 내포한다. 누구에게 돌려주느냐에 따라 충성의 대상이 드러난다. 충성과 우선권을 결정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이사와 하나님은 경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즉, 누구에게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문제이므로 예수님의 명령은 제1계명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주화의 주인은 황제이므로 이 주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황제에게 받은 것을 황제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형상(에이콘)”은 창세기 1:26에 근거하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가이사도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의미를 발견하지(깨닫지) 못하는 그들은 예수님의 말에서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한 채 놀라고 침묵해버린다(26절). 정탐꾼들은 특히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층이 장악하고 있는 성전에서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한다.
당시의 정치 지형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형성했고 성전은 로마제국의 보호 아래 있었으므로 사실상 그들은 가이사의 편에 서 있었다. 악한 포도원 농부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않았다. *우리에게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않고 영예와 감사를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2. 사두개인들과 예수님의 부활 논쟁(27~40절)
이번에는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왔다(27절). 사두개인들은 부활, 내세,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특히 부활을 성경에 근거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합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교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내세의 보상과 심판을 포함하는 부활 신앙은 반란과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투쟁할 수 있는 근거였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이었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도 부활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의 법을 근거로 부활이 있을 수 없음을 논증한다.
모세의 기록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해 상속자를 세워야 한다(28절). 어떤 가정에 일곱 명의 형제가 있었다. 첫째 아들이 자식 없이 죽었다(29절). 둘째와 셋째가 각각 그녀를 아내로 취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자식없이 죽었다(30절). 일곱 형제 모두 자식 없이 죽고 여자도 죽었다(31~32절). 부호라 때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33절). 사두개인들의 관점에서 몸의 부활은 현재의 생애와 연속되는 것이었다. 부활이 있고 내세가 있다면 일곱 명의 남편과 한 명의 아내의 경우처럼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사두개인들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논리를 인정하지 못한다.
34~38절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직역하면 이 시대의 아들들)은 장가가고 시집가지만 저 시대와 부활하는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지 않는다(34~35절). 35절의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수동태 분사로, 하나님에 의해 새 시대에 살고 부활하도록 인정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즉, 부활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새로운 시대에 부활체로 사는 것도 선물이다. 새로운 시대에 부활한 몸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시 죽을 수 없다(36절). 그들은 천사들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천사처럼 된다는 것은 존재의 방식이 변한다는 말이다. ‘이 시대’와 ‘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각 시대의 환경에 맞는 몸의 형태와 생활 방식을 갖게 된다. 이 시대의 인간은 현재 지상 환경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새로운 세상은 지금과 전혀 다른 환경으로 변할 것이므로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도 지금과 다른 존재 형태를 갖게 된다. 천사가 시공간을 자유롭게 오고가는 것처럼 부활한 인간도 그렇게 변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상의 인간이 새로운 세계의 존재 형태와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지 천사들처럼 된다고만 예고하신 것이다. 또한 죽은 신자들은 부활의 자녀, 즉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사두개인들이 모세의 권위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하자(28절) 예수님도 부활의 근거로 모세의 글을 사용하신다. 부활 사상은 출애굽기 3:6의 가시나무 떨기와 관련된 사건에서 말한 것이다(37절). 모세는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렀다. 즉,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다(38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이미 죽은 상태였는데도 하나님은 이들과 현재적으로 함께 있다고 하셨다. 이 시대에서는 죽고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 지금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육체가 썩어 뼈로 남아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살아 있는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들은 현재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한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어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바르게 말씀하셨다고 평가한다(39절). 이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주장을 지지한다. 반면 사두개인들은 이 시대가 새로운 시대에 하나님과 영원히 살아 있는 특권을 누린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는 시대에 부활체로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 시대의 기득권을 안전의 토대로 삼지 말아야 한다.
나는?
-비유를 통해 자신들의 악의(19:47)가 탄로 난 종교지도자들은 회개하기보다 예수님을 잡으려 했다. 백성들 때문에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정탐들을 보내어 고소할 빌미를 찾았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25절)을 듣고 놀랐으면서도 예수님을 향한 태도는 바꾸지 않았다. 정탐들의 질문은 치밀하고 간교했다. 배움을 위한 물음도 아니었고 말씀을 수용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데는 집요했다.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애써 악을 쌓았다. 스스로를 완악하게 만들어갔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바르게 가르치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며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분이라고 한껏 추켜세운다.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척하며 자신들의 질문에 반드시 대답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다.
-그러면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지 대답하도록 요구한다. 예수님이 이 질문에 긍정하면 유대인들에게 반발을 사고, 부정하면 로마 당국에 반역자로 몰린다는 것을 노린 것이다. 간교하기 그지없다. 의인인 체하고 가식적인 말로 환심을 사며 다가왔지만, 그들의 말이 아닌 의도를 보셨던 것이다. 그들의 말처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셨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정작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구분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의 주인되신 하나님 되심조차 선선히 외면하는 참으로 위선적이고, 간교한 종교지도자들이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지혜롭게 대답하심으로써 그들을 침묵시키신다. 세속 정부를 세워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그 권세를 인정하며 의무에 충실하라고 하심으로써 로마 권세에 대한 무분별한 저항을 경계하심과 동시에(롬 13:1~7), 참된 역사와 권세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그분께 대한 충성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밝히심으로써, 유대인들 역시 반발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이는 도리어 하나님보다 세상 권력을 우선시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본심을 건드리시면서, 정의와 공의를 따르고, 불의와 불법에 맞서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그분의 통치를 구현하라고 촉구하신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적실하게 종교지도자들을 지적하셨다.
-이번에 예수님을 시험하러 등장한 지도자들은 종교권력을 장악한 사두개인들이다. 그들은 부활 문제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한다. 그들이 믿지 않는 부활과 관련된 곤란한 질문으로 예수님의 입을 다물게 하여 자신들의 탁월성을 과시하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신들의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 현세주의자이며 남부럽지 않은 호사와 기득권을 누리던 그들에게 부활과 내세의 교훈은 불편하고 불쾌했을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에 명시된 수혼법(신 25:5~6)이 부활사상과 양립할 수 없기에 부활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이해와 경험에만 갇혀 있고 자신의 이해와 욕심에만 매달려 있었기에 그들은 온전한 진리의 세계로, 영광스러운 부활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에 예수님도 모세의 글(출 3:6)을 인용하여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지금 살아있지 않고 또 영원히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하나님 나라의 약속과 임재의 언약도 지킬 수 없게 된다. 주님과 맺은 언약과 주님이 주신 생명(영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변함없이 지켜지고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 이후의 세상이 이 세상과 다르고 부활의 자녀는 이 세상의 자녀와 존재와 삶의 방식에서 전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하신다. 부활 이후 세상에 죽음도 없으니 결혼도 없고 출산도 없다. 이 세상만이 전부인 듯 자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던 어리석은 부자(12:16; 16:19)처럼 살기 원하는 자들에게 부활은 환영받을 소식이 아니다. 그래서 율법 교사였던 서기관이 서슴없이 옳다고 인정할 정도로, 반박할 수 없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사두개인들은 수용하기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비겁하기 짝이 없다.
*주님, 주님을 죽이기 위한 완악하고 집요하며 위선적이고 간교한 종교지도자들의 비겁함이 오늘, 우리에게 있지 않는지 돌아봅니다. 말씀이 깨우쳐 주실 때 고집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말씀대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부활을 말씀해주시며 이 세상과 다른 부활 이후의 세상을 들려주셨습니다. 부활의 삶을 소망하며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소망하며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