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보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다 [눅 21:20-28]
 – 2025년 04월 11일
– 2025년 04월 11일 –
눅 21:20-28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보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다
    
본문은 예수님의 종말론 강화(21:5~36)이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역사의 끝에 일어날 징조와 인자의 오심을 설명한다. 20~24절은 예수님의 승천과 예루살렘의 멸망 사이에 일어날 일을 다룬다. 예루살렘 도성과 거주민들에게 닥칠 비극을 서술한다. 25~28절은 역사의 끝에 일어날 징조를 구체화한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1세기의 백성에게 경험된 사건이라면, 인자의 오심은, 이 땅의 모든 사람이 경험하게 될 종말의 사건이다.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의 발단은 로마 황제 네로(주후 54~68)의 임명을 받은 유대 총독 플로루스(주후 64~66)의 학정이었다. 특히 그가 예루살렘 성전 금고에서 17달란트의 금화를 몰수하고 이에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유대의 독립전쟁(주후 66~73)이 촉발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대규모 로마 병력을 이끌고 진격하여 주후 67년 갈릴리 지방을 점령했고, 그의 아들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었다(마 24:2; 막 13:2; 눅 21:6). 예루살렘 멸망 직후 급진적인 열심당원들은 마사다 요새를 중심으로 항전을 벌였지만, 주후 73년 요새가 함락되고 전쟁은 종식된다.
    
    
    
1. 예루살렘의 멸망(20~24절)
본문은 19:43~44; 21:5~6과 연결되며 예루살렘 멸망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20절은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내용이다. 이 구절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예레미야 예언을 상기시킨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에워싸이고 황폐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였다(렘 25:8~11). 그리고 그 예언대로 BC 586년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왕하 25:1~12; 렘 52:12~16).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성의 파괴를 예언 했었다(19:41~44). 그리고 본문에서 다시 상세하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자세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멸망하고 성전은 파괴되어 유대인의 제사제도가 완전히 폐지된다. 21~22절은 예루살렘 멸망을 유대 백성 형벌의 날로 표현한다. 21절의 “그때”는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의 군대에 에워싸이고 멸망할 때를 뜻한다. “산으로 도망할 것이며”라는 구절은 성을 떠나서 안전한 산으로 피신하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그 도성은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안에 있는 자들은 성 밖으로 나가고 성 밖에 있는 자들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경계하신다.
    
예루살렘에 임할 비극은 하나님의 보복에 의한 징벌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방문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보복의 날들을 피할 수 없다. “기록된 모든 것(22절)”은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와 예언을 가리킨다. 선지자들은 오만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했으며, 예수님 역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거부한 예루살렘이 맞이할 비극적인 운명을 탄식하셨다. 23~24절은 예루살렘 멸망의 혹독함을 묘사한다. 이방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불순종에 대하여 반드시 보응하신다.
    
    
    
2. 온 땅에 나타날 징조와 인자의 오심(25~27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고 나서 곧이어 종말이 임박했음을 설명하신다. 재앙은 예루살렘과 유대에 국한되지 않고 우주적 범위로 확장된다(25~26절). 사람들은 땅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고통하고 두려워하고 혼절하며, 하늘에서는 우주적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25~26절). 역사의 끝에 사람들은 큰 능력과 영광과 함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를 볼 것이다(27절). 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등장하신다는 의미가 있다. 한편, 인자의 오심을 예고하는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제자들은 고개를 들어야 한다(28절).
    
“이런 일이 되기 시작하거든”의 “이런 일들”은 피조 세계 전체에 일어날 징조들(25~26절)과 인자의 오심(27절)을 가리킨다. 인자의 오심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과 구속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징조가 나타나면 공포에 질릴 것이지만(26절), 신자들은 머리를 들어야 한다. 머리를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절망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과 감격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인자에 대한 징조들이 임하기 시작할 때 두려움이나 당혹감이 아니라 기대하며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에 참여할 기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붕괴와 인자의 오심은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나는 다른 사건이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인자가 오기 전의 상황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지만, 인자가 오는 징조는 아니다. 초기 교회는 인자의 오심을 미래에 일어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개입으로 이해했다. AD 70년의 성전 파괴가 구속이 가까운 것을 알리는 희망의 계기가 될 수도 없다. 예루살렘이 포위될 때 도망하라는 명령이 문자적, 실제적 의미를 담고 있듯이 인자의 오심도 실제 현상이다.
 
예루살렘 성은 고지대에 있는 매우 견고한 요새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군의 투항 권유를 무시하고 결사 항전했다. 이에 로마군이 선택한 작전은 “포위와 고사”였다. 물줄기를 끊고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예루살렘 주변 사방 18km 내의 모든 나무를 완전히 베어내 주변을 사막화시켜 버린다. 베어낸 나무로 칸들을 엮어 흙과 돌을 채워 토성을 쌓았다. 이렇게 되자 성안에서는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하면서 굶주림이 극에 달하여 부모가 자식을 삶아 먹는 일까지 벌어진다. 극렬한 저항에 화가 난 로마군은 다른 전쟁과 달리 어린아이와 노약자도 가리지 않고 죽여 버린다. 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까지 죽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땅에 메어쳐 끔찍하게 죽인다.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이 전쟁으로 인해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9만 7천 명이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유월절 절기에 맞춰 세계 각지에서 모여들었던 유대인들이 로마군의 진군으로 인해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던 예루살렘 성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성내에서 나가라”는 주님이 경고하는 말씀이 안중에도 없었다. “그날에는, 아이 밴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화가 있다. 땅에는 큰 재난이 닥치겠고, 이 백성에게는 무서운 진노가 내릴 것이다. (새번역_23절) 기록된 말씀대로 이루어질 징벌의 날에는 ‘큰 재난과 무서운 진노”가 주저 없이 내릴 것이다. 생각하기도 몸서리쳐지는 그 무서운 재난과 진노가 그대로 드러날 날이 다가온다.
    
당시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도 사전에 여러 징조가 나타났었다. 역사적인 기록이기도 하고 야사처럼 전해 내려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7가지로 정리되어 있다. 이 징조들은 예루살렘 멸망 약 4년 전부터 나타났고, 주로 하늘에서 보이는 특이한 변화, 성전 내 사건, 선지자(?)의 외침 등이었다.
1) 예루살렘 성 위에 칼 모양의 별이 나타났고, 2) 혜성이 1년 동안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3) 주후 66년 4월 25일 밤 10시쯤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 성전에 모여 있을 때 약 30분 동안 아주 커다란 빛이 나타나 제단과 성전을 대낮처럼 밝혔다. 4) 그 무교절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끌어다 놓은 암소가 성전 한가운데서 새끼를 낳았다. 5) 성전 안뜰의 동문은 청동으로 제작된 아주 무거운 문이었고 저녁에는 닫혀 있었는데, 이 문이 한밤중에 6시간 동안 열린 상태로 있었다. 장정 20명이 힘을 합쳐야 겨우 닫을 수 있는 문이었고 쇠 빗장과 세로 빗장이 단단한 암반 지반에 깊숙이 박혀 있었지만, 문이 열린 것이다. 6) 주후 66년 6월 8일 동트기 직전 예루살렘 전 지역에 전차와 무장한 군대가 구름을 뚫고 나타나 성을 포위하였다. 이 환상이 벌어지기 전날 밤 제사장들이 성전 안뜰에서 진동과 굉음이 들린 후 여러 가지 목소리가 뒤섞여서 “우리가 이곳을 떠나자”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7) 전쟁 발발 4년 전부터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는 자가 예루살렘에 등장하여 곳곳을 누비며 “동쪽과 서쪽에서 한 음성이 들려오고 사방에서 한 음성이 들려오니,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말씀이며, 신랑과 신부에 대한 말씀이며, 온 백성에 대한 말씀이로다”라며 밤낮으로 소리쳤다. 지도층들이 그의 외침에 분노하여 체포하여 심한 매질을 할 때도, 로마 총독에게 끌려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매질을 당해도 “화 있을지어다, 예루살렘아!”라고 외칠 뿐이었다. 미친 것으로 간주하여 내보내도 4년 동안 줄곧 이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 로마군에 의해 포위되어 공성전이 시작되었을 때 성벽을 돌아다니면서 “예루살렘과 그 백성과 그 성전에 화 있으리라!”라고 외치다가 마지막으로 “또한 내게도 화 있으리라” 말하는 순간, 마침 로마군의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이 그에게 명중했고 그 자리에서 그는 즉사했다.
    
주님의 말씀대로 멸망 직전에 충실하게 징조 들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백성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도 마찬가지이다. 말씀하신 대로 미리 “징조”들을 보여주신다. 그것을 보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어떻게 기다릴까?
    
    
    
3. 일어나 머리를 들라! (28절)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일어서서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구원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새번역_28절) 주님은 주님이 재림하는 징조들을 자연계 질서의 엄청난 혼란들이 징조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사는 동안 보여주시는 이전에 없었던 이상 현상들을 바라보며 각성하는 동기를 삼아야 할 이유다. 그래서 주님은 직접적으로 당부하신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일어서서 머리를 들어라!” 하늘의 징조들, 땅의 무섭고 성난 소리에 무서워서 떨고 기절하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기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도리어 “일어나 머리를 들고” 산으로(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 피하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집중된 성안에 있으면 그 가치들에 함몰되고 시선을 빼앗겨 징조들을 분별할 수 없다.
    
세상은 분별할 수 없어 무수한 징조들을 보여도 깨닫지 못하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따라 깨달아 “머리를 들어” 주님 오심을 바라볼 수 있다. 세상은 무서워 기절하지만, 성도는 기쁨의 고개를 들고 구원의 은혜를 바라볼 것이다.
    
    
    
나는?
-묵상을 하다 갑자기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분명히 경고하셨고, 징조들을 알려 주셔서 피할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징조들을 바라보는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반응이다. 하나같이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는 대로 좋은 징조로만 받아들였다. 경고로 깨닫고 대비하는 인생은 극히 소수였다.
    
-주님의 재림이 이와 같은 것임을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데자뷔”하게 하신다. 징조들이 알려졌어도 민감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그저 “성안(세상 가치)”에 함몰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볍게 여긴다.
    
-자연계 질서의 혼란들이 가중되면 될수록 재림을 인식할 수 있다. 그날은 도적처럼 임할 것이지만, 적어도 가까이 옴을 알 수 있도록 징조들을 알려 주셨다. 그날에 세상은 무서워 기절할 것이지만, 성도는 영광을 얻는다. “일어나 머리를 들어” 다시 임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특히 “~을 보거든.”, “~을 보리라”와 같이 “보는 것”을 강조한다. “보거든~줄을 알라(20절)”로 시작하여 “그때에~보리라(27절)”로 이어진다. 영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는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가?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인 것을 보면, 멸망이 가까운 줄 알아야 했듯, 자연계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보거든…. 다시 오시는 주님을 볼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자연계의 질서가 흔들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면 곧 다시 오실 주님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살이에 지쳐 두려움, 염려, 근심, 걱정에 기절해야 할 때가 아니라 일어나 머리를 들어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한다.
    
    
*보고 알았다면 “도망하라”는 당부도 잊어서는 안 된다. 도망가지 않으면 “멸망” 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도망하지 않았다. 파괴와 멸망의 처참한 상황에서 도망하라고 피할 길을 미리 알려 주셨으나 이를 듣지 않아 멸망을 자초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도 미련 없이 도망한 롯과 딸은 살았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죽었다.
    
*예루살렘 성에서 도망하라는 것은 단지 문자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도망하면 산다는 문자적인 의미뿐 아니라 이 멸망은 하나님의 “징벌”과 “진노”이므로 무엇보다 회개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망하라”는 말은 “회개하라”는 말과 연결되는 당부인 것이다.
    
*내가 살아왔던 세속적 삶과 가치에서 도망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함축되어 있어 세상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성(세상)에서 구별되라는 의미다. 그곳에서 내가 살아왔던 세상 가치를 따른 모든 삶을 버리고 도망하라는 것이다. 떠나라는 것이다. 그래야 산다.
    
*멸망하는 그 “성안에” 계속 안주하고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징벌과 진노”의 대상이 되어 죽는다. 그러니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과 같다. 주님께서 도망하라 하셨으니, 그것이 진노와 징벌의 때 살아날 길이다. 명령에 순종하고 진노 받은 성에서 도망하는 것이 곧 살길이었다. 구원의 길이었다.
    
    
*그런데 “도망가야 할 때”가 예루살렘 멸망의 때였다면, “일어나 머리를 들어야 할 때”는 재림의 때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완성하시는 그 순간은 “도망”하면 안된다. 오히려 “머리를 들고 일어나 맞이해야 한다.” 그때에 인자가…. 오는 것을 볼 때이니 “일어나 머리를 들고” 바라보아야 한다. 죄악의 도성에서 도망하라는 것도 주님의 명령이었고, 다시 오실 그 영광의 순간을 일어나 머리를 들고 맞이하라는 것도 주님의 명령이다.
    
*나 오늘 도망가야 할 성에서는 속히 도망하고, 일어나 머리를 들어 주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보아야 할 곳에서는 머물러 서서 주님을 바라보는 삶이어야 하겠다. 도망해야 할 곳과 때를 잘 분별하여 도망하고, 일어나 머리를 들어 바라보아야 할 때와 장소를 분별하여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려야지…. 이런 일이 되기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구원의 완성이 가까웠다!
    
    
    
*주님,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여 주신 말씀이 다시 오실 주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기에 저의 삶도 다시 오실 주님을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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