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갈렙, 옷니엘 vs 유다, 베냐민 지파 [삿 1:11-21]
 – 2021년 11월 02일
– 2021년 11월 02일 –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따라 산지로 올라간 유다 지파가 선봉에 서서 여호수아 사후 남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함께 싸워 쫓아낸 가나안 지역 거점들을 중심으로 더욱 맹렬하게 약속의 땅을 공고하게 다져야 했다. 또, 아직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지역을 정복하여 기업의 땅을 넓혀야 했다. 이 과정에서 본문은 갈렙과 옷니엘의 탁월한 활약상을 조명한다.

특히 85세의 갈렙에게 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헤브론의 아낙 자손(거인족,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_10절)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이후 그의 사위가 된 옷니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워 드빌 땅(기럇 세벨)을 차지했다. 문제는 산지만 점령했다는 것에 있다.골짜기(평원 지대)는 ‘철병거’가 있어 차지 하지 못했다. 이는 철병거가 올라오지 못하는 산지만 점령했다는 의미다. 정복 전쟁에 있어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겠지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2절)”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그 약속을 믿고 싸운 이들”이 받는 복이었다. 이는 끝까지 순종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본문은 “함께 계신(19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 불안한 공존을 시작해야 했다.

참고로 유다지파가 분배 받은 땅은 이스라엘의 최남단 지역이었다(수 15:1). 이 지역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주로 머물렀던 지역들인데 예루살렘의 남쪽, 헤브론, 브엘세바 등이 포함된 지역이었다. (*짐작컨데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까지 이어지는 정통성을 지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지역의 특징은 “척박함” 그 자체였다. 최남단 브엘세바의 경우, 연 강수량은 불과 120~250mm였다. 장차 다윗 왕이 나올 지파인데 그들이 거하는 땅은 이토록 척박하기만 했다. 왜 일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왕이 나올 지파이기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환경(높은 산지와 광야의 땅)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어서 전적으로 그의 도우심을 바랄 수 밖에 없는 곳, 인간의 능력의 한계가 분명한 지역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땅에서 “장차 이스라엘에서 오직 하나님만 전심으로 의지한 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의 신앙이 가열차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는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고,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았다! 힘든 싸움은 애초에 회피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운 것도, 강한 부족들을 회피한 것도 이들에게 동시에 존재했다. 이들이 강한 부족들을 회피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떄문이다. 철병거 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철병거가 더 크게 보였다는 점이다. 40년전 가데스바네아의 정탐꾼 사건에서 자신들의 부모세대가 직면했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창 정복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사사시대를 뒤덮는 불안한 요소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1. 승전의 연속, 그러나(11-15절)
유다 지파의 계속 되는 승전보의 소식 와중에 하나님의 시선이 갈렙 집안으로 모아진다. 본문 11-15절은 여호수아 15:13-19절과 거의 일치한다. 지파별로 각개전투 식으로 진행되는 정복 전쟁의 와중에 가장 난관관에 직면하게 된 아낙 자손들(거인족들)이 살고 있었던 헤브론과 그 일대, 특히 “드빌(신탁, 성소)”, 본래 이름은 “기럇 세벨( 키르야트세페르_책의 성읍)”을 점령하는 이야기이다.

갈렙은 아낙 자손들에게 의미 있고 중요한 성읍이었던 ‘드빌’를 점령하기 위해 자신의 딸 ‘악사’를 내걸고 전투 사기를 끌어 올린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 하고자 하는 갈렙의 마음은 절박하고 확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점은 2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이 땅을 그의(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 주었다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 14장에서 아무도 올라가려 하지 않는 “아낙 자손”이 거하던 헤브론 지역인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라고 고백하였던 온전한 믿음에 균열이 간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확신에 차서 시작한 일이 때로 난관에 부딕칠 때가 있다. 헤브론 지역을 점령해 가며 승승 장구하던 갈렙에게 “드빌”의 강력하고 견고한 성읍”은 난관 중의 난관이었다. 아낙 자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삶의 중심지였던 헤브론을 어처구니 없게 잃었고, 자신들이 자랑하던 용사들이던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가 죽은 마당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성읍이었다. 저항을 강력했을 것이고 갈렙은 이들의 완강한 항전에 고전 했을 것이다.

*난관에 직면할 때 “여호와께 여쭈어(1절)”야 했지만, 갈렙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자신의 딸을 걸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걸고 나아갔어야 했다!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행동을 탓하지 않으신다. 그렇게라도 약속의 땅을 차지하려는 마음에 긍휼을 베푸신다. 그리고 훗날 이스라엘의 첫번째 사사가 될 옷니엘을 등장 시키신다.

*옷니엘은 어느 날 갑자기 사사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신뢰하므로 가장 강력한 거인 족속들의 최후 항전지를 향해 거침없이 돌격하여 그 땅을 쟁취한 믿음의 용사였다. 그가 사촌 악사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기 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나아갔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를 의지하려는 믿음의 용맹함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낙 자손들의 사지에 몰린 최후 항전을 온 몸으로 맞서는 기개가 어찌 가능했을까!

*그렇다면 갈렙의 드빌(기럇 세벨) 정복기는 훗날 사사로 세움 받는 옷니엘을 등장시키는 무대가 맞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완성 되지 않는다. 구원받고 바로 찍어내는 제품처럼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시간들을 거치면서 믿음의 도전과 실패, 포기하지 않는 응전들이 겹겹히 쌓여 서서히 빚어지는 것이다. 옷니엘은 무수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참전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을 깨우치고, 두려움을 넘어선 믿음의 용기와 도전을 배워낸 사람인 것이다.

*나의 믿음의 여정도 마찬가지겠다. 과정 없는 결과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다져지고 다져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단련된 믿음의 기개는 철병거가 두렵지 않다. 예루살렘 성의 견고함에 짖눌리지 않는다!


2.갈렙, 옷니엘(악사), 겐 족속…
이들은 모두 정통 이스라엘 유다 지파의 후손들이 아니다. 갈렙과 옷니엘(악사)는 에서의 후손인 그나스 출신이었고, 겐 족속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미디안 족속 가운데 거하였던 사람들이었다. 민 10:29-32에서 모세가 이드로의 방문 이후 함께 미디안으로 돌아가지 말고 함께 해 줄 것을 요청하여 잔류 하였다.

유다 지파 순혈 후손들이 유대 평지(골짜기)에서 헤메는 동안, 이방인이었던 이들은 아낙 자손들을 직면하여 용감하게 그들의 땅을 정복해 나갔다. 갈렙의 가족들이 아낙 자손들을 물리쳐 주므로서 유다자손들이 시므온의 후손들과 함께 호르마,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들을 점령해 나갔다.

*혈통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하여 주심을 믿는 어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백성된 구너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에게 약속된 땅을 주저없이 쟁취하였다. 하나님은 순혈혈통의 이스라엘 민족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오직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어떤 이방인들이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 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는 이미 가나안 정복에서부터 실현되고 있었다.


3.철병거, 예루살렘 성(19-21절)
유다 지파는 산지는 점령하고 평지(골짜기_산과 산 사이)는 점열하지 못한다. “철병거” 때문이었다(19절). 또 베냐민 지파도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은 쫓아내지 못했다(21절). 견고한 요새 지형 때문이었다.

갈렙은 아낙 자손(거인족속)의 거센 도전에도 당당히 승리를 쟁취해 나간 반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신통치 못하다. 특히 유다 지파는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지만” 산지는 정복했으나 골짜기(평원)은 정복하지 못했다. 베냐민 지파는 자신들에게 할당 받은 땅 가운데 가장 천혜의 요새로 난공불락의 예루살렘 성을 차지 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철병거가 있으므로(19절)” 라고 정확하게 기록한다. 철병거가 쉽게 기동하지 못하는 산지 지역은 점령했지만, 철병거가 위력을 발휘하는 평원 지역은 차지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철병거”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 넘지 못했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수밖에 없게 만든 불순종의 기운이 약하게 돋아나고 있다. 유다 지파의 산지에서의 승리가 불안 불안한 이유다.

또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 지역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 내지 못해 불안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사기의 저작 시기를 가늠하게 하는 표현인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21절)”를 통해 베냐민 지파의 불안정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땅을 너의 손에 넘겨 주었다(2절)”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데, 베냐민은 담대하게 예루살렘 성을 공략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하여 주심보다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이 더 크게 보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더 지리 조건, 환경이 커 보였다!

*이런 이야기가 어찌 유다나 베냐민 지파에게만 국한 되겠는가?나와 우리의 문제일 수 있다. 철병거를 크게 보는 새침한 마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겠다.


나는?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는 철병거와 견고한 장벽이 문제가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행동하지 못하는 새가슴 믿음이 문제다!

-이스라엘의 출발은 순혈주의가 아니었다. 이방인에 대하여 폐쇄된 민족이 아니었다. 갈렙의 활약, 옷니엘의 등장은 폐쇄된 순혈주의 집단에서는 결코 가능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어떠할까? 언제든지 믿음의 용사가 우뚝 설 수 있는 공동체이기를 바란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여전히 갈렙은 자신의 자리에서 용맹함을 떨치고 있었고, 갈렙의 뒤를 이을 옷니엘이 나타났다. 우리 공동체는 뒤를 이를 다음세대가 충분한가?

-언제든지 새롭게 공동체로 들어온 이들이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는 품이 넉넉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기회가 주어지는 개방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내가 아니면 안돼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공동체이었으면 좋겠다. 이런 어울림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건강하게, 역동적으로 만든다.

-불완전한 승리가 이어진다. 완전히 점령해야 할 땅이어야 했지만, 불안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쫓아내지 못한 이들과 불편한 동거기 시작 되었다. 온전한 믿음의 영역이어야 할 그 땅에 석연찮은 불순종으로부터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사사시대는 가나안 땅 정복이 활발하게 진행 되는 그때부터 이미 그 불안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갈렙과 옷니엘의 완전한 승리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온전히 쫓아내지 못한 승리가 비교된다.


*주님, 승리했지만 불편함이 가시지 않는 믿음의 여정이 되지 않겠습니다. 온전하게 순종하고 믿며 믿고 의지하겠습니다.
*주님, 공동체가 주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어울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순혈혈통보다 더 순혈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갈렙과 옷니엘이 믿음의 거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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