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쫓아내지 못하거나, 쫓아내지 않거나 [삿 1:22-36]
 – 2021년 11월 03일
– 2021년 11월 03일 –

지리적으로 보면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남부 지역의 정복 보고에 이어 북부 지역의 보고가 이어진다. 이들 지역의 전쟁 보고는 암울하다. 요셉 가문(므낫세, 에브라임)의 불완전한 정복에서부터(22-29절) 스불론, 아셀, 납달리 지파의 정복 실패가 이어진다(30-33절). 급기야 단 지파는 자신들이 분배 받은 땅을 정복하지 못하고 아모리 족속에게서 산지로 쫓겨 나갔다(34-36절).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실패 했을까?


1.요셉가문의 실패(22-29절)
요셉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벧엘을 치러 올라갈 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22절).” 그럼에도 가나안 북부 지역에서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처음에 승리한 벧엘(22-26절)조차도 전투 전 정탐에서 한 사람의 이기적인 배신으로 가능했고, 이마저도 묵숨을 연명한 그가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벧엘의 본래 이름인 루스로 명명한다. 잠재된 위협이 사라지지 못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아브라함은 벧엘에서 처음으로 단을 쌓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3:3-4). 야곱은 이곳에서 꿈을 꾸며 여호와의 계시를 받았다(창 28:10-19, 31:13). 가나안 정복 때에는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점령한 후 벧엘을 정복하였다(수 12:16). 이처럼 역사적인 성읍 벧엘을 점령할 때 요셉 가문의 모습이 의외다.

벧엘 정복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라고 했는데, 정탐을 먼저 실시한다. 마치 여리고성 정복처럼 작전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 한 것 같지만, 내용은 전혀 딴판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모습이 역력하다.

*전략을 세우고 실행을 해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요셉가문의 전략과 실행에는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나도 요셉가문과 다를 바 없다.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걸음에 하나님을 의지함이 없는 것이다.

“정찰병들이 그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붙들고 말하였다. “성읍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새번역_24절)
성읍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디인지 알려 주면 “선대하리라(자비를 행하겠다 / )”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명령을 노골적으로 행한다. 신 7:2을 통해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고 그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라고 명령하셨음에도 요셉 가문은 벧엘 사람과 약속을 맺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가나안 전쟁의 큰 전투들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했다. 이후 분배 받은 땅에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망각하며 전쟁을 치뤄 나간 것이다. **하나님은 늘 함께 계셨지만, 그들은 하나님 없이 전투를 치루고 있었다.

*요셉 가문의 실패는 “불순종의 실패”였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온전하게 지켜 나가기 위해 힘을 쏟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실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전한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깨닫는다.


2.쫓아내지 않았다 vs 쫓아내지 못했다
여호수아 23:13에는 사사시대가 이미 시작된 이스라엘에게 모든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래서 그들이 “올무와 덫이 되고 채찍이 되며, 눈에 가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삿 2:3에서 동일한 말씀이 반복 되고 본문 29, 30, 32절에서 게셀, 기드론, 나할롤에서 에브라임과 스불론 아셀 지파 가운데 거주하였다고 기록한다. 그곳에서 가나안의 우상 문화가 이스라엘에 스며들었다.

“쫓아내지 못하였다(27, 29, 30, 31, 32, 33절)”와 “쫓아내지 않았다(28절)”라는 표현 선명하게 부각된다. 요셉 가문을 비롯하여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가 온전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다. 이로 인한 이들의 실패를 “쫓아내지 못하였다”로 표현한다.

27절과 29절을 보면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힘이 부족하여 그럴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이어지는 28절과 30절은 이스라엘이 강성 하여져서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들에게 “노역”을 시키기 위해 “쫓아내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들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이유를 28, 30, 33, 35절에서는 “노역”을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유와 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이득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맞바꾸었다. 즉 자신들의 편리함과 이득을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너무도 쉽게 저버리고 만 것이다.

그랬더니 도리어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도리어 쫓겨나서 산지로 밀리게 되었다(34절). 아모리 족속은 작심하여 단 지파를 산지에 고립시켜 버렸다. 이후 요셉의 가문이 강성하여 져서 “마침내 노역”하며 가나안 땅에 여전히 거하였다.

*문제는 단 지파는 힘이 약하여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 산지에서 위기의 삶을 살았지만, 문제는 요셉의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이 힘이 강하여 졌을 때는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게 노역을 시키며 쫓아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복 전쟁 직후 삶의 터전을 세우고 재건하는 일에는 막대한 경제력이 필요했을 터이다. 쫓겨내지 않고 남겨둔 이들에 대한 목적은 분명했다. “노역”은 종전후 재건 사업의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해 주었기에 각 지파들은 정복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이 유혹을 쉽게 떨쳐 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기 보다, 눈에 보이는 가나안 족속들을 활용하는 편을 선택한 것이다.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내를 포기하였다.

*나의 삶에도 이와같은 유혹이 왜 없겠나! 좀 더 쉬운 길을 가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에 눈 감고 싶은 유혹은 수시로 일어난다. 세상 이치로 판단하면 고민될 것도 없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고민해야 한다.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뜻에 부응하며 살아내야 한다. 그 길이 탄탄하게 서는 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좀더 쉬운 길을 선택했다. 가나안 족속들의 노동력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정착 초기 모든 것이 낯선 가나안의 기후와 풍토, 환경 등에 적응하기 위해 가나안 족속들의 노동력은 당연히 필요로 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고달프더라도 지켜야 했던 “하나님의 명령”까지 현실적인 이유로 외면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가치와 비중이 삶에서 약화되자 하나님을 떠나는 경계선은 쉽게 넘어갔다. 각 지파들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는 행태가 급속히 퍼져 버린다. 그리고 결국 어처구니 없게도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분배 받은 해안지대의 땅을 빼앗긴 채 산지로 밀려나 버렸다.

*이 기막힌 단 지파의 이야기가 사사기 실상을 보여주는 17-18장의 제사장직 매매 사건의 핵심 배경이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처음 어기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한 번 어기기 시작한 명령은 이제 그 권위를 잃고 “자기 소견대로” 살가가는 난국에 빠지게 된다.


나는?
-현실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는 것은 그 때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현실에 갇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쫓아내지 못하는 부족한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감당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쫓아내지 않는 현실적인 유혹 앞에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아무리 급하게 여겨지고, 현실적으로 필요하게 여겨지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면서 까지 당장의 필요에 급급하다 보면 결국 그것에 믿음은 무너진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현실타파의 기대와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내 전략과 실행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맹신해서도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나의 힘과 능력에 함몰되면 그것으로 역시 망한다. 당장 달콤한 성취의 짜릿함이 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는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니 경각해야 한다.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너무 염려하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잠시 태풍을 만난 것이고, 홍수를 만난 것이다. 숨을 고르며 안전하게 피신하여 이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된다. 지금 여기 이곳은 본향을 향해 걷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의 유혹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노역”을 했었음을 망각하는 비윤리적인 처사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배치하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전후복구에 필요한 노동력, 일상에서 자신들의 노동력을 대치해 줄 수 있는 달콤한 유혹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어야 했고, 하나님께서 이미 명령하신 가나안 족속과 어떤 약속이나 관계를 맺지 말라는 명령을 철저히 지켰어야 했다.

-자신들의 힘과 전략으로 쟁취한 승리의 독이 영적 지각을 마비 시켜 버렸다. 하나님을 소외하고 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승리, 형통은 복이 아니라 저주다.


*주님, 쫓아내지 못하는 나약하고 부족한 영역에 주님의 능력을 불어 넣어 주십시오.
*주님, 쫓아내지 않고 있는 인간적인 계산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떨쳐낼 결단을 주십시오.
*주님, 내 능력으로 승리를 얻은 것이 없음을 늘 깨닫게 해주셔서 망국의 길을 걷지 않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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