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전한 사랑, 여전한 동행… 그러나 [삿 2:11-23]
 – 2021년 11월 05일
– 2021년 11월 05일 –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섬기지 않고 가나안의 우상(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인해 심판을 자초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서도 사사들을 보내 긍휼을 베푸신다. “사실 얼마든지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버리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기 백성들의 배신에 진노 하시지만,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사사들을 보내 주심으로 확인시켜 주신다. 왜 이렇게 하실까?


1.여전히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며 배신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다(14절). 어디를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여호와의 손’이 재앙을 내리셨다(15절). 하나님의 경고하셨던 대로(출 23:33, 신 7:16, 민 33:55) 흘러갔고 그 괴로움이 매우 컸다. “보김(통곡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신음소리는(네아카_슬피 울부짖으므로) 깊어만 졌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경고하신 하나님이시다. 애굽에서의 종 되었던 생활, 광야의 결핍의 생활에서 오롯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탈출하고 누린 백성들이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빠져들어 하나님을 외면하게 될 것을 우려하셨다. 이에 가나안에서의 복된 삶도 약속하신 하나님은 재앙도 경고하셨던 것이다. 순전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복과 재앙”의 하나님은 풍요로운 가나안의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들에게서(불과 가나안 정착 2세대만에) 잊혀지고 말았다. 광야의 결핍된 환경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의 은혜는 가나안의 풍족함으로 인해 잊혀졌다. 두려운 것은 우리의 환경도 과거 모든 것이 결핍했던 시대에서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로 변했다는 점이다.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세대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하였던 간절함이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서 사라졌다. 굳이 믿고 따르지 않고 오히려 더 넘치는 풍요를 쫓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구원의 하나님이 절실한 세대는 지나갔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 하나님은 잊혀져 버렸다. 풍요로움을 맛보니 하나님보다 풍요를 더 간절히 쫓는다. 이 시대가 결핍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누리며 은혜를 누리고 붙잡은 세대와 완전히 다른 세대가 된 것이다. 며칠 전 할로윈데이에 거리에 넘쳐나던 할로윈 복장을 한 젊은이들을 보면서 “아… 완전히 다른 세대로구나…”를 통감하며 이 말씀앞에 깊은 두려움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알고 계셔서 ‘사사’들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가나안의 풍요에 빠져든 이스라엘을 포기 하지 않으시고 돌이키기 위해 쫓아내지 않은 대적들의 손에 넘겨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지만, 그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고통을 외면 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희망을 걸고 싶다.

*가나안의 풍요를 택하고 하나님을 저버린 자기 백성의 배신에 대하여 심판 하시지만, “사사들”을 세우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고 싶다.


2.여전히 함께 하기를 바라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11절).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이었다(13절).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배신하고 섬기던 우상들에게 배신(버림) 당하게 하신다. 우상들을 섬기던 가나안 족속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배신하면서 쫓아갔던 우상들은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들이 추구했던 풍요를 노략 당하게 하고, 그들이 쫓아내지 않았던 족속들에게 되려 복수(?)를 당한다(14절). 이 재앙은 피할 길이 없었다.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피해 숨어도 노략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제 필요 없다며 우상들에게 달려 갔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우상들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여 괴로움이 심해지고 나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진노와 재앙을 겪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배반하는 자기 백성을 내치지 않고 “여전히 함께” 하시면서 고통소리에 응답하신 것이다.

*사사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이다. 여전히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사들을 통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세대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18절).”


3.그러나… 그러므로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돌아서서, 그들의 조상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고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악한 행위와 완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새번역_19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셨고(20절), 그러므로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을 것(21절)이라고 선언하신다. 문장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저주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마음이셨다. 주위에 남아 있는 이방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 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으신 마음이셨다. 하나님과 이방 우상들의 확연한 차이를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셨다.

*백성들이 자기 조상들이 애굽과 광야를 지나며 경험하고 알았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공급 받았던 일용할 은혜의 가치를 깨닫기를 원하셨다. 아무리 비옥한 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경작하며 풍요로움을 일굴 수 있다고 착각했을 지라도 광야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여전히 필요하고 그 은혜안에 실제로 거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가나안의 풍요가 언제든지 “노략”당하게 될 것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깨닫고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22절)” 시험하여 보시겠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일상의 “근심 거리들”, “고통 거리들”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서 자기 힘에 대한 과신과 과욕의 탐욕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남겨 두신” 것임을 깨닫는다. 이 근심, 그 고통이 없다면 그나마 주님께 부르짖는 것도 망각하고 “완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될 것을 더 잘 아시기에 근심과 고통과 결핍을 남겨 두셨다.

*결핍이, 고통이, 근심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 백성의 배신은 쫓아내라는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음으로” 시작 되었다. 남겨진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라 가면서 격화 되었다.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다른 신들이 왜 이토록 매력적이었을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도록 빠져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알과 아스다롯이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섬긴 우상 이었다는 것에서 짐작할만한 것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한 가나안 땅은 농경지대 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유목하며 양을 치던 척박한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2세대가 경험한 광야가 아니었다. 광야에서는 매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하늘의 양식’이 아니고서는 살아낼 수 없는 땅이었다.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물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광야의 땅을 40년간 보내면서 옷깃, 신발도 해지지않았던 기적을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달랐다. 자기 손으로 땅을 일구며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땅으로 여겨졌다. 그야말로 광야의 결핍과 절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환경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물줄기는 이어졌고, 뿌리는 씨는 풍성한 수확으로 이어졌다. 이런 풍요가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신들에게서 온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상은 웅장하여 그렇게 여겨질 법 했다.

-그런 웅장한 우상들이 준다는 풍요와 다산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세상 신들이 약속한 “풍요로움”은 “넘치고 넘쳐 축재할 수 있는 풍요였다. 더 많이 소유하기 원하는 “탐욕”의 마음은 “일용할 양식”의 풍성함에 만족하고 감사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미더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매일 아침 내려주신 만나는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 였지만, 가나안에서는 자신들의 손으로 그보다 더 많은 소출을 수확하여 “저장(축재)”하며 살수 있었다. 창고가 부족하면 또 짓고 저장하는 “넘치는 풍요”의 유혹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기막힌 매력에(넘치고 넘치는) 이스라엘은 광야의 하나님을 버렸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외면했다. 날마다 필요한 것 만큼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는 초라했던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하나님의 공동체가) 골고루 나누어 갖는 풍요임을 간과한 것이다. 가나안의 풍요는 힘 있는자,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몰려서 주체하지 못하게 하는 풍요라면, 하나님의 풍요는 모든 백성이 골고루 채워지는 만큼의 풍요였다.

-나무로 깍아 금으로 입힌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는 썩어 내다 버려도 나의 손에서 넘쳐나는 풍요였다. 이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풍요로움이 가나안 땅의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와 다르지 않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즐겁게 누리려고 한다. 풍요로움이 주는 넘치는 향락을 추구하고 또 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의 풍요는 “일용할 양식”의 풍요다.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는 풍요다. 매일 아침 거두러 나가는 댓가를 치뤄야 얻을 수 있는 풍요다. 무엇보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누릴 수 있는 풍요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고 싶고, 내 마음껏 움켜 쥐고 싶고, 내 마음껏 쌓아 놓고 즐기고 싶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잊힌 존재”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 조차도 잊혀져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모든 영역에서 “풍요”의 추구가 노골적이다. 지도자를 뽑는 최우선의 조건은 “경제”이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 한다. 그저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성공에만 함몰된 세상에서 실패는 가치를 츶아가고 회복하는 과정이 아닌 것이 된지 오래다. 실패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다.

-코로나는 어쩌면 이런 이기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여 스스로의 삶을 망치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한 이 세상에 “삶의 참된 가치”를 되찾는 화두를 던지게 한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일수도 있겠다. 하나님 나라 백성부터 세상의 풍요로움에 함몰되어 보지 못한 하나님과 이웃의 가치를 되돌아 보게 하는 것이런지 모른다.

-이제 위드코로나 시대 되었다. 코로나를 쫓아내지 못해 함께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코로나는 우리가 믿음의 조상들이 지킨 하나님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를 시험하시고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는 은총 이어야 한다. 도리어 코로나가 더욱 하나님을 멀어지게 하고 잊혀지게 만드는 것이 되면 소망 없다.

-코로나로 인해 하지 못했던 것을 폭발하듯 즐기려고 찾아 나서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여행지에 사람이 넘쳐난다. 유흥 거리에서 이미 코로나 이전의 흥청망청한 모습들이 시작 되었다. 사회 모든 영역에서 봇물터지듯 코로나로 묶였던 모든 영역들의 반격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예배당은? 믿음의 교제의 현장은? 기도의 자리? 찬양의 자리는? 나눔과 섬김의 자리는? 사역과 헌신의 자리는?……………


**주님, 코로나를 남겨두신 주님의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더욱 주님만 의지하겠습니다.
** 주님, 위드코로나를 핑계하여 나의 만족함과 풍요로움을 먼저 회복하지 않겠습니다. 위드지저스(with JESUS)를 먼저 회복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늘 추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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