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가? [삿 5:19-31]
 – 2021년 11월 11일
– 2021년 11월 11일 –

승리의 노래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 승리는 단지 야빈 왕과의 싸움에서 만이 아니었다. “여러 왕들이 와서 싸움을 돋우었다. 므깃도의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움을 돋우었으나, 그들은 탈취물이나 은을 가져 가지 못했다(새번역_19절)”의 말씀을 보면 야빈의 군대로 개전이 되었다가 주변 가나안 족속들과 확전이 된 것이 분명하다.

이 확전된 전쟁도 역시 하나님께서 앞서서 싸우셨다. “별들이 하늘에서… 그 다니는 길에서(새번역_20절), 기손 강물이 그들을 휩쓸어 갔고…(새번역_21절)”이라는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개입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께서 대신, 그리고 적극적으로 싸우셨으니 승리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앞서 싸우시니 그 뒤를 따라 “힘차게 진군하는(새번역_21절)” 것은 당연하고 당연하다!. 하나님의 승리의 찬가가 울려퍼진다! 그런데….


1.아… 메로스…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가 전장에 인접한는 “메로스”라는 마을과 주민들을 저주한다. 메로스는 다볼산 북쪽, 이스르엘 평야의 끝자락 어딘가에 위치한 성읍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그 저주의 강도가 무척이나 강하다. “저주하라… 거듭 거듭 저주할 것은…(23절)”라고 했다. “사정 없이 철저히”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그 이유가 분명하다. “….그들은 주님을 도우러 나오지 않았다. 주님을 돕지 않았다. 적의 용사들과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새번역_23절)” 전장 근처라면 납달리 지파의 땅 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곳의 마을 주민들이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현장에 있었음에도 “나오지 않고, 돕지 않으며,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드보라의 승리의 노래 가운데 불리워질 정도라면 메로스는 전장의 판도를 결정 지을 수도 있을 뭔가가 있는 성읍이었을 수 있다. 또는 격렬한 전쟁 속에서도 지형지물이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해 주는 성이었을 수도 있겠다. 메로스의 뜻은 “피난처”라는 뜻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기에 하나님의 전장을 외면한 이들은 오히려 그 피난처의 지위가 박탈된다. 진정한 피난처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메로스(피난처)를 질책하셨기 때문이다.

*진정한 피난처는 싸움의 현장을 벗어난 안전하다고 여기는 장소가 아니다. 외면하여 편안한 것이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 순종 하는 자리가 진정한 피난처다. 그곳이 아무리 창칼이 맞부딪치고 화살이 난무하는 전장의 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신 전장이 진정한 피난처이다. 하나님께서 피난처(안식처)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 있고, 그것을 직접 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반응하지 않는” 지독한 보신주의를 간과하지 않으신다. 겸손하게 주님의 일하시는 현장으로 나아와야 함에도 그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이 폭풍이 지나가기만 바랬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그 치열한 순종의 현장 한 가운데 있음에도 “무관심하고 무반응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쩌면 가장 지독한 교만일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무반응과 무관심을 강하게 질책하신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현장에서의 비열한 외면과 거절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오히려 대적으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여도 무반응과 외면을 고수하는 그들을 대적으로 간주하셨다.

*나는 “메로스”와 같은 경우의 상황에 직면할 때 어떻게 할까? 바람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자세로 그저 나만 평안하면 된다며 성문을 걸어 잠글 것인가? 하나님의 전쟁에 기꺼이 헌신할 것인가? 곰곰이 되씹을 수록 그리 호기롭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에둘러 일깨워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다. 이웃사랑은 실제로 돕고 베푸는 사랑이어야 한다. 전장 중에 있는 민족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행동이 아니다. 마땅히 질책 받아야 한다.


2.야엘을 축복하다(24-27절)
“메로스”를 거듭 거듭 저주한 것과 선명하게 비교되는 시스라를 죽인 여인 야엘을 축복한다. 그녀의 지혜와 담대함, 단호함을 칭송한다. 무엇보다 결국 하나님의 예언대로(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찬양한다. ㅍ동족의 전쟁에 그것도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문을 걸어 잠그고 동참하지 않은 비겁한 메로스를 포함한 참전하지 않은 지파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야엘은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어머니’ 드보라의 승리 찬가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 기록되었다. 전쟁에 동참하지 않은 지파들과 메로스을 어둘러 거듭 거듭 비판하는 것이다.

특히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는 장면을 4장에 비하여 자세하게 한컷 한컷 보여주듯 설명한다. 그의 죽음이 연약한 여인 야엘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져서”가 3번이나 반복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는 반드시 꾸부러며 엎드러져서 망한다. 지금 잘 나간다고 영원히 잘 나가는 것은 아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지혜롭다. 인생의 참 지혜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안에 야엘처럼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되는 믿음의 결단과 행함이 있기를 사모해 본다. 하나님의 일에 마음으로 공감하고 몸으로 행동했으면 좋겠다. 메로스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 처럼 자신의 삶에 대한 안일함에 취하여 주님꼐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안일해 진 다면”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3.시스라 어미의 시선(28-30절)
아들 시스라의 패전과 죽음을 알턱 없던 시스라의 어미는 지난 20년간 늘 그랬던 것 처럼 아들이 승전하고 전리품을 나누느라 돌아오는 것이 지체 되는 것으로 여겼다(30절). 그러면서 언제나 돌아올 것인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시스라의 어미는 아들의 귀환이 늦어지는 것을 “그들이 어찌 약탈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용사마다 한두 처녀를 차지 하였을 것이다. 시스라가 약탈한 것은 채색한 옷감, 곧 수놓아 채색한 옷감이거나, 약탈한 사람의 목에 걸칠 수놓은 두 벌의 옷감일 것이다.”(새번역_30절)라고 이야기 한다. 피가 흥건히 적셔진 노략물들에 대한 탐욕이 노골적이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스라엘의 눈물과 피를 쥐어 짜서 자신들이 당연히 쟁취 했을 것라고 생각하는 노략물에 대한 관심이 아들 시스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보다 더 직접적이다.

늘 승리하여 약탈물을 나누었던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패전한 민족의 여인들을 마치 짐승이나 물건처럼 취급 하였던 가나안의 폭력적인 문화에 매우 익숙한 모습이다. 같은 여인 이면서 그 여인들이 당할 수치와 모욕은 안중에도 없다. 오히려 그런 악한 행동을 하는 아들과 자신의 민족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이제 곧 자신과 자신의 딸들이 그 꼴을 당해야 할 것을 상상도 못하고 있다.

자신이 말한대로 당할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아들과 자신의 민족의 참담한 패배는 상상조차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자행한 폭력과 억압을 당연하듯 받아들인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이런 죄악을 좌시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전혀 생각지도 못할 때 일어난다. 시스라의 어미에게 이 심판이 닥쳤다.


4.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31절)
하나님은 원수들을 결국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신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앞서 싸워 주심으로 40년간의 평화가 시작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감정이나 입의 말로 증명 되는 것이 아니다. 전장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대덕 앞에 단호하고 담대하게 장막 말뚝을 내리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편에 선 이는 그를 사랑하기에 기꺼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

*아무리 밤이 깊어 어두운 흑암 가운데 있는 삶이라고 여겨져도 그러면 그럴수록 “해를 힘 있게 돋게 하시는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편에 서기를 계산해서는 안 된다. 세상 계산으로 따지면야 유익할 일 전혀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결정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 이미 있는 인생이다.


나는?
-결국 하나님의 편에 섰던 야엘,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의 큰 아들),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는 하나님의 승리의 찬가를 마음껏 부르고 누렸다. 하나님의 전쟁에 참전하여 하나님께서 부리신 별들과 강을 직접 목격했다.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하나님의 편에 섰는가? 그렇지 않는가 가 분명히 갈린다. 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담대하게 담당하였다. 철저히 하나님의 편에 서서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아 버린다. 그녀는 이방인이었다.

-결국 이방인이든 이스라엘 민족이든 상관 없이 “하나님의 편”에 선 야엘은 축복을 받을 이라며 칭송이 돌아오지만, 메로스처럼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의 편에 동참하지 않으면 저주에 저주가 돌아온다.

-나의 일생이 하나님 편에 늘 서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주님, 메로스처럼 보신주의, 기회주의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야엘처럼 하나님의 편에 서겠습니다.
*주님, 폭력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흉내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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