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레위인의 자신에게 유리한 일방적인 진술에 의해 이스라엘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다. 토막난 시신의 일부를 받으면서 들려온 기브아에서 일어난 일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둘러 ‘미스바’로 모인 백성들에게 레위인은 자신의 잘못은 쏙 빼고 자기에게 유리한 증언만 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격동하게 되고 결국 베냐민 지파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1.제대로 오랜만에 모였다!
레위인의 첩의 조각난 시신을 받아든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총회로 모였다. 그 규모를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1절)고 증언한다. 가나안 땅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나아왔다고 전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 앞에 모였다는 것이다.
모인 수는 자그만치 칼을 빼는 자만 40만명 이었다. 분배 받은 땅에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을 향해 각기 전투를 감당했었지만 이렇게 “일제히” 모인 것은 가나안 땅 전쟁 이후로 실로 오랜만이었다.
밖의 적과 싸우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같은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이렇게 하나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합보다 분열이 더 많았다. 특히 사사 입다의 때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독선에 분개한 길르앗 자손들이 4만 2천명을 죽였다. 기드온 때에는 그나마 에브라임의 딴지를 부드럽게 받아 주어서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었다.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벌인 일에 저마다 한걸음에 미스바로 모인 것이다.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없었다”며 이 일을 반드시 바로 잡겠다는 마음에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11지파가 하나가 된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는 하나가 되지 않았지만, 자기 동족을 응징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이런.. 이런…
2.그런데 그 레위인이…
이렇게 한달음에 모인 백성들이 레위인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레위인은 어떻게 이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자신의 입장에서 들려준다. 이 레위인의 증언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
레위인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첩을 “붙잡아 끌어냈지만” 이것은 꽁꽁 감춘다. 또,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벌인 짓도 충격이지만, 이를 이스라엘에게 고발하면서 시신을 토막 내어 보낸 엽기적인 방법에 대한 돌이킴도 없다. 이스라엘을 자극적인 방법으로 선동하려는 의도가 다분하게 증언한 것이 분명하다. 선동하기 위해 저지른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돌이킴이 없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의 소행을 베냐민 지파 전체의 책임으로 부풀리고, 무엇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의 직접 당사자일 수도 있는 베냐민 지파에게는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다. 베냐민 지파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그의 증언이 아쉽기만 하다. 소위 가짜뉴스다.
*자신이 수치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여 과장하고 자신이 했던 행동들은 증언에서 쏙 빼는 비열함이 그에게서 보인다. “그 날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해치려고, 내가 묵고 있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나 대신에 내 첩을 폭행하여, 그가 죽었습니다. 내가 나의 첩의 주검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이 유산으로 받은 모든 지역으로 보낸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5-6절)”
*이기적인 비열함이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비극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합당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부르짖는 레위인의 가식에 화가 난다. 자신이 “붙들어 끌어내어” 첩은 능욕을 당하였고, 완전히 탈진하여 기절한 그녀를 차갑게 나귀에 싣고 돌아와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토막을 내 이스라엘에게 보낸 이 일을 마치 정당한 것 인냥,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자신이 음란했고, 비열한 행동은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한 것에 대하여는 마치 베냐민 지파 전체가 그런 것 인냥 매도하는 그의 언어가 큰 화를 앞당겼다.
*아…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이렇다면 그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을까? 그저 참담한 심정으로 베냐민 지파에게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고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애둘러 이스라엘 지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그의 위선적인 언행에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나는?
-모두가 다 공범이다. 그날 밤 레위인의 첩이 밤새 능욕을 당한 그 일을 기브아 주민들은 몰랐을까?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소란을 피며 레위인을 내어 놓으라고 외쳐 댄 그들의 소리를 기브아의 주민들이 과연 몰랐을까? 다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악행을 이전부터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숨만 죽였다.
-레위인은 자신이 욕보일까 두려워 힘없는 첩을 붙들어 그 불량배들에게 끌어내 주었다. 첩이 당한 능욕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저지른 비겁한 짓이었다. 진정한 주범은 레위인이다.
-또, 이스라엘 지파들은 어떤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을 당하는 지파에게는 무관심하더니 율법에 거스르는 것이라고 여긴 불량배들의 죄는 심판하고자 득달같이 달려 든다. 마치 자기는 의인이고 그들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다는 등식을 가지고 말이다. 자신들은 의인이고 그들은 악인이라는 지극히 위험한 이분법적 시각으로 모여든다.
-사사시대 자신들의 의견만이 정도와 진리가 되던 시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조차도 형식적인 또 하나의 우사응로 전락 시킨 이들에게 기브아 불량배들의 범죄는 반드시 척결해야 하는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었지, 자신들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하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져 있었다.
-오늘날 자신의 입장만을 정당화 하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과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문제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지파들처럼 자신들이 판단자(judge)가 되어 힘을 모아 동족을 망하게 하는 결정을 서슴없이 했던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없는 뉴스까지 만들어서 저마다 judge가 되어버린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정신이 기준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이 가장 참담하다.
-어쩌면 한국 교회가 이 모습 일런지 모른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연대하여 주장하는 것들이 진리의 말씀의 가치에서 한참 벗어난 분열과 폭력이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휘두른다. 아… 사사기 묵상이 빨리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 며칠 째 마음이 체하고 있다.
-레위인의 비열함이 이 시대 지도자들의 비열함이 되어서는 안되는데… 그 비열함에 휘둘리는 무지한 백성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 나부터 돌아볼 마음을 주십시오.
*주님, 지체의 죄에 대하여 의인의 꼿꼿함 보다 죄인의 두려움을 함께 공감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1.제대로 오랜만에 모였다!
레위인의 첩의 조각난 시신을 받아든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총회로 모였다. 그 규모를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1절)고 증언한다. 가나안 땅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나아왔다고 전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 앞에 모였다는 것이다.
모인 수는 자그만치 칼을 빼는 자만 40만명 이었다. 분배 받은 땅에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을 향해 각기 전투를 감당했었지만 이렇게 “일제히” 모인 것은 가나안 땅 전쟁 이후로 실로 오랜만이었다.
밖의 적과 싸우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같은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이렇게 하나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합보다 분열이 더 많았다. 특히 사사 입다의 때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독선에 분개한 길르앗 자손들이 4만 2천명을 죽였다. 기드온 때에는 그나마 에브라임의 딴지를 부드럽게 받아 주어서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었다.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벌인 일에 저마다 한걸음에 미스바로 모인 것이다.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없었다”며 이 일을 반드시 바로 잡겠다는 마음에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11지파가 하나가 된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는 하나가 되지 않았지만, 자기 동족을 응징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이런.. 이런…
2.그런데 그 레위인이…
이렇게 한달음에 모인 백성들이 레위인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레위인은 어떻게 이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자신의 입장에서 들려준다. 이 레위인의 증언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
레위인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첩을 “붙잡아 끌어냈지만” 이것은 꽁꽁 감춘다. 또,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벌인 짓도 충격이지만, 이를 이스라엘에게 고발하면서 시신을 토막 내어 보낸 엽기적인 방법에 대한 돌이킴도 없다. 이스라엘을 자극적인 방법으로 선동하려는 의도가 다분하게 증언한 것이 분명하다. 선동하기 위해 저지른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돌이킴이 없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의 소행을 베냐민 지파 전체의 책임으로 부풀리고, 무엇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의 직접 당사자일 수도 있는 베냐민 지파에게는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다. 베냐민 지파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그의 증언이 아쉽기만 하다. 소위 가짜뉴스다.
*자신이 수치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여 과장하고 자신이 했던 행동들은 증언에서 쏙 빼는 비열함이 그에게서 보인다. “그 날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해치려고, 내가 묵고 있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나 대신에 내 첩을 폭행하여, 그가 죽었습니다. 내가 나의 첩의 주검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이 유산으로 받은 모든 지역으로 보낸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5-6절)”
*이기적인 비열함이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비극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합당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부르짖는 레위인의 가식에 화가 난다. 자신이 “붙들어 끌어내어” 첩은 능욕을 당하였고, 완전히 탈진하여 기절한 그녀를 차갑게 나귀에 싣고 돌아와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토막을 내 이스라엘에게 보낸 이 일을 마치 정당한 것 인냥,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자신이 음란했고, 비열한 행동은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한 것에 대하여는 마치 베냐민 지파 전체가 그런 것 인냥 매도하는 그의 언어가 큰 화를 앞당겼다.
*아…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이렇다면 그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을까? 그저 참담한 심정으로 베냐민 지파에게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고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애둘러 이스라엘 지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그의 위선적인 언행에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나는?
-모두가 다 공범이다. 그날 밤 레위인의 첩이 밤새 능욕을 당한 그 일을 기브아 주민들은 몰랐을까?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소란을 피며 레위인을 내어 놓으라고 외쳐 댄 그들의 소리를 기브아의 주민들이 과연 몰랐을까? 다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악행을 이전부터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숨만 죽였다.
-레위인은 자신이 욕보일까 두려워 힘없는 첩을 붙들어 그 불량배들에게 끌어내 주었다. 첩이 당한 능욕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저지른 비겁한 짓이었다. 진정한 주범은 레위인이다.
-또, 이스라엘 지파들은 어떤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을 당하는 지파에게는 무관심하더니 율법에 거스르는 것이라고 여긴 불량배들의 죄는 심판하고자 득달같이 달려 든다. 마치 자기는 의인이고 그들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다는 등식을 가지고 말이다. 자신들은 의인이고 그들은 악인이라는 지극히 위험한 이분법적 시각으로 모여든다.
-사사시대 자신들의 의견만이 정도와 진리가 되던 시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조차도 형식적인 또 하나의 우사응로 전락 시킨 이들에게 기브아 불량배들의 범죄는 반드시 척결해야 하는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었지, 자신들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하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져 있었다.
-오늘날 자신의 입장만을 정당화 하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과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문제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지파들처럼 자신들이 판단자(judge)가 되어 힘을 모아 동족을 망하게 하는 결정을 서슴없이 했던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없는 뉴스까지 만들어서 저마다 judge가 되어버린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정신이 기준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이 가장 참담하다.
-어쩌면 한국 교회가 이 모습 일런지 모른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연대하여 주장하는 것들이 진리의 말씀의 가치에서 한참 벗어난 분열과 폭력이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휘두른다. 아… 사사기 묵상이 빨리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 며칠 째 마음이 체하고 있다.
-레위인의 비열함이 이 시대 지도자들의 비열함이 되어서는 안되는데… 그 비열함에 휘둘리는 무지한 백성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 나부터 돌아볼 마음을 주십시오.
*주님, 지체의 죄에 대하여 의인의 꼿꼿함 보다 죄인의 두려움을 함께 공감하는 마음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