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예수를 굳게 붙드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의 헛된 가르침을 분별하고 교훈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기 위한 분투가 필요했다. 당시 초대교회가 대부분 그렇듯 교회 개척 초기는 대부분 유대인들로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헬라인이 전도되어 들어왔다. 문화적으로 보면 이질적인 생활 관습에서 오는 차이가 복음의 능력으로 조화되는 신비한 모임이었다. 문화가 다르더라도 예수 복음의 놀라운 능력은 하나된 공동체로 세워지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복음 안에서 하나되기 위해 발버둥 쳤을 초대교회 성도들의 분투가 눈에 선하다. 오늘날 한 언어, 한 문화를 가진 교회에서도 여러 관습과 인식, 사상과 전통에 따라 무수한 분열이 보이는 것을 보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골로새 교회안의 다양한 인식차, 난무하는 거짓 진리들은 무엇이었을까?
1.종교적 전통과의 차이(16-23절)
골로새 교회안에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초하루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16절) 유대교적 전통에 따른 문제들이었다. 즉, 율법주의를 맹신하는 이들이었다. 또 꾸며낸 겸손, 천사 숭배는(18절) 초자연적인 환상을 통해 자기 신앙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경우일 것이다.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신비주의, 은사주의자들이다. 이것들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므로 경건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23절). 지나친 금욕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골로새 교회에는 율법주의를 강요하는 거짓 교사, 신비한 체험과 표적과 이적을 추구하는 은사주의자, 극단적인 금식과 같은 금욕주의를 강요하는 이들이 교회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참견 하면서 각각 자기들이 정한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강요와 종교적 폭력앞에 성도들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 교회안의 모습과 별 다를 바 없다.
*신앙생활에는 어느 정도 슷로 정한 율법주의, 금기가 있으면 좋다. 이를 통해 신앙의 성숙을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다. 신비한 체험이나 은사에 따라 나타나는 놀라운 이적에 마음을 끌릴 수도 있다. 자신의 욕망을 일정한 금욕을 통해 다스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기본, 근본, 기초가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대로, 예수 안에서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으로 서는 것이 기초중의 기초다. 모든 신앙의 형태, 곁가지들이 뿌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간혹 눈에 보이고, 마음에 감동이 되어 이를 헷갈릴 수 있다. 문제는 할례와 율법을 강요하는 거짓교사, 은사주의자들, 금욕주의자들은 “예수 복음”에 기초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에 기초한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구원과 관계 없기에 장차 더 큰 문제, 즉 사망에 이르게 하는 난관이 될 수 있었다.
*예수 복음 보다 자신들이 경험하고 익숙하며 인간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강요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공동체 안에도 분별력이 없으면 이런 류에 휩쓸리게 된다. 그래서 바울이 단호하게 강조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여 있습니까?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건드리지도 말아라” 하니, 웬 말입니까? 이런 것들은 다 한때에 쓰다가 없어지는 것으로서,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데는 지혜를 나타내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새번역_20-21절)”
2.그러면 어떻게?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 세상의 유치한 삶의 방식, 거짓 진리의 방식과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 복음”의 기본기가 중요하다. 신앙을 화려하게 포장하려는 욕구는 늘상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포장을 하면 할 수록 본질에서 계속 벗어날 것이다. 예수 복음에 충실한 것이 가장 탄탄한 신앙이다.
*예수님처럼 이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가장 탄탄하고 훌륭한 신앙생활이다. 버겁게 느껴지겠지만 포기하면 안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닮으려는 노력이 가장 탄탄한 신앙으로 이끌려 지는 길이다.
*예수님처럼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대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주”로 믿기에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삶의 방식이 변화 되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이다.
*복음의 방식은 “교훈을 받은 대로” 살아가는 믿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율법주의, 은사와 신비주의, 그리고 새상살이 방식의 유혹은 감당하기 버겁다. 오늘날은 지독한 맘몬의 유혹, 돈의 유혹이 깊이 깃든 기복주의가 더 큰 도전이다.
*곳곳에서 코로나 시국에 생명과 안전에 관심을 두기보다 더 벌지 못해서, 이전과 비교하여 더 가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해서 힘들어한다. 중요한 것은 생명임에도 유흥에 더 관심을 두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영원한 생명,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세상살이 방식에 익숙해져서 말씀과 가까이 하는 삶을 외면하기 일쑤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으나 진정 “주(LORD)”로 인정하지 않는다. 내 삶의 방향과 가치 의미를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 두기 보다 이 세상에서 모두가 추구하는 것들(부, 명예, 성공, 향락 등)에 둔다. 영원의 가치, 구원 이후의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할 믿음의 길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상에 속한 것, 사람의 규정과 교훈, 꾸며낸 경건에 천착할 뿐이다. 이런 길에 들어서면 안 된다! 어떻게 이 길을 분별하고 구별하여 하나님 백성 답게 살 수 있을까?
나는?
-그래서 상황이 복잡할 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얽히고 섥혀있는 상황일 수록 근본을 확인해야 하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내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중요한 이유다. 복잡한 상황일 수록,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수록, 좌고우면해야 하는 상황일 수록 더욱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말씀을 읽는다. 생각하여 글로 정리한다.
-우리가 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적어도 율법주의, 신비나 은사주의, 세상의 철학과 강요하는 삶의 방식들을 분별하여 창조주 되시고 통치자 되시며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 이다.
-말씀이 살린다!
-말씀이 분별하여 결정하게 한다! 그 걸음이 예수안에 있는 걸음이다!
*주님,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겠습니다
*주님, 말씀을 통해 복음의 방식을 갈고 닦겠습니다
*주님, 말씀이 나를 일깨워, 말씀이 일하는 생을 살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편 111:1-10]
이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찬양시이다. 구조적으로 72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시의 특징은 할렐루야 이후 마지막 시행까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첫 글자가 시작되는 알파벳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