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을 결정한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 성읍들을 모조리 멸절 시키자고 소리를 높였다(5절). 그들은 기브아 사람들의 악함을 처벌하는데 무관심 했고 총회의 소집을 무시한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이 총회를 통해 ‘누구도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아내로 주어서는 안 된다’는 엄숙한 서약을 한다(1절).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베냐민 지파가 멸망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총회는 뒤늦게 분노가 잦아들고 난 후 찾아온 파멸에 대한 뉘우침들이 일어났다(6절).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 지파의 무장한 자들만 죽였어야 했고 농부들이나 목동 부녀들 아이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다고 후회한다. 이스라엘 지파중의 하나가 없어지게 생겼다고 대성통곡한다(2절). 이런 이율배반적인 사람들이 어딨나? 자신들이 결정하고 결행한 일의 결과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원망한다. 이렇게 하기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먼저 아닐까?
어찌되었든 이에 림몬 바위에 피해 있던 6백명에게 사면령을 내렸고 다시 형제로서 받아 들이겠다고 공적으로 약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6백명을 통해 베냐민 지파가 다시 세워 질 수 있도록 그들의 아내를 구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미 누구도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엄숙히 서약을 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열심을 내어 찾은 방법은 어처구니 없게도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을 칼날로 쳐서 “모든 남자와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고(11절) 결혼할 수 있는 처녀 400명을 찾았다(확보했다). 기가 막히게 이런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닥치는 대로 베냐민 지파를 멸절 시킨 후 뒤늦게 정신 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사용 한 것이다.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결정하고 행한 삶에는 결국 “폭력이 악순환 될 뿐”이다.
*베냐민 지파를 진멸 시켜서 사라질 위기에 림몬 바위에 피신한 6백명의 용사들을 사면하고 이들에게 딸을 주어 다시 지파가 연명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미 총회에서 자신들의 딸을 주지 않기로 결정했기에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을 전멸 시키고 처녀만 남겨두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성급하게 , 감정에 치우쳐 결정한 일 때문에 아픔과 상처만 남은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 다시 한번 묻는 지혜와 느긋함이 있어야 하겠다.
*한편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여전히 하나님과의 형식적인 관계가 드러나 씁쓸하다.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을 승리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까지 드렸다(4절). 그러나 진멸에 가까운 베냐민 지파를 어떻게 회복 시켜야 할 런지에 대하여는 전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앞선 세 번의 전투 때마다 하나님께 물었던 것을 포함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형식적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쟁을 마친 후 부르짖고 제단을 쌓는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행위는 잘 했지만, 진정 필요한 것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여 듣기 원하는 마음이 이스라엘에게 회복 되지 않았다. 묻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기다리지도 않았다!
*자기들끼리, 지기들의 말만 주장하고, 자기들끼리 맹세하고 되새기며, 자기들의 해결책을 찾고 만 있었다. 그렇게 찾아 낸 것이 또 다른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그것도 힘없는 연약한 성읍 하나를 주저 없이 진멸 해 버린다(8-11절). 이런 말도 안되는 폭력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안에 버젓이 일어났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당황스러운 상황에 대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릴 줄 알아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전쟁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는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형식은 하나님과 함께 한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이 이렇게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아가도 아무렇지도 않는 이들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막으려고 또 다른 동족을 살해하는 이 무도함이 사사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민낯이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짓을 반복하고 있는 듯 하여 씁쓸하다. 베냐민 지파에게는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내놓으라고 요청하고 이 악한 행위가 어떻게 된 것인지 경위를 물었으나(20:12-13), 동족상잔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의 사람들과 이들이 속해 있는 길르앗 지파에게는 이마저도 행하지 않았다.
-지파 멸족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급하게 12,000명의 군사를 보내 힘 없는 성읍의 온 주민들을 칼로 쳐서 죽이고 처녀 사백명을 끌고 왔다. 베냐민의 멸족을 막으려고 다른 동족을 살해하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정의로운 전쟁을 반대한 것으로 보았고, 이스라엘 총회에 대항하는 불순한 집단으로 매도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동참하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반대 의견에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 사고가 당연히 응징하고 본 때를 보여야 한다는 식의 행동을 정당화 했다. 이렇게 무지하고 무식하며 무도한 백성이라니…
*주님, 폭력이 폭력을 낳았음에도 당연하게 이를 결정합니다. 나의 소견대로 사는 것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나의 소견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늘 구하겠습니다.
*주님, 무지와 무식과 무도함이 판치는 교회가 되지 않도록 주님 뜻에 더욱 순종 하겠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겠습니다. 늘 지혜롭게 행하기를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베냐민 지파가 멸망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총회는 뒤늦게 분노가 잦아들고 난 후 찾아온 파멸에 대한 뉘우침들이 일어났다(6절).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 지파의 무장한 자들만 죽였어야 했고 농부들이나 목동 부녀들 아이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다고 후회한다. 이스라엘 지파중의 하나가 없어지게 생겼다고 대성통곡한다(2절). 이런 이율배반적인 사람들이 어딨나? 자신들이 결정하고 결행한 일의 결과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원망한다. 이렇게 하기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먼저 아닐까?
어찌되었든 이에 림몬 바위에 피해 있던 6백명에게 사면령을 내렸고 다시 형제로서 받아 들이겠다고 공적으로 약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6백명을 통해 베냐민 지파가 다시 세워 질 수 있도록 그들의 아내를 구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미 누구도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엄숙히 서약을 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열심을 내어 찾은 방법은 어처구니 없게도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을 칼날로 쳐서 “모든 남자와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고(11절) 결혼할 수 있는 처녀 400명을 찾았다(확보했다). 기가 막히게 이런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닥치는 대로 베냐민 지파를 멸절 시킨 후 뒤늦게 정신 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사용 한 것이다.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결정하고 행한 삶에는 결국 “폭력이 악순환 될 뿐”이다.
*베냐민 지파를 진멸 시켜서 사라질 위기에 림몬 바위에 피신한 6백명의 용사들을 사면하고 이들에게 딸을 주어 다시 지파가 연명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미 총회에서 자신들의 딸을 주지 않기로 결정했기에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을 전멸 시키고 처녀만 남겨두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성급하게 , 감정에 치우쳐 결정한 일 때문에 아픔과 상처만 남은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 다시 한번 묻는 지혜와 느긋함이 있어야 하겠다.
*한편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여전히 하나님과의 형식적인 관계가 드러나 씁쓸하다.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을 승리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까지 드렸다(4절). 그러나 진멸에 가까운 베냐민 지파를 어떻게 회복 시켜야 할 런지에 대하여는 전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앞선 세 번의 전투 때마다 하나님께 물었던 것을 포함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형식적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쟁을 마친 후 부르짖고 제단을 쌓는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행위는 잘 했지만, 진정 필요한 것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여 듣기 원하는 마음이 이스라엘에게 회복 되지 않았다. 묻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기다리지도 않았다!
*자기들끼리, 지기들의 말만 주장하고, 자기들끼리 맹세하고 되새기며, 자기들의 해결책을 찾고 만 있었다. 그렇게 찾아 낸 것이 또 다른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그것도 힘없는 연약한 성읍 하나를 주저 없이 진멸 해 버린다(8-11절). 이런 말도 안되는 폭력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안에 버젓이 일어났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당황스러운 상황에 대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릴 줄 알아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전쟁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는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형식은 하나님과 함께 한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이 이렇게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아가도 아무렇지도 않는 이들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막으려고 또 다른 동족을 살해하는 이 무도함이 사사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민낯이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짓을 반복하고 있는 듯 하여 씁쓸하다. 베냐민 지파에게는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내놓으라고 요청하고 이 악한 행위가 어떻게 된 것인지 경위를 물었으나(20:12-13), 동족상잔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의 사람들과 이들이 속해 있는 길르앗 지파에게는 이마저도 행하지 않았다.
-지파 멸족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급하게 12,000명의 군사를 보내 힘 없는 성읍의 온 주민들을 칼로 쳐서 죽이고 처녀 사백명을 끌고 왔다. 베냐민의 멸족을 막으려고 다른 동족을 살해하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정의로운 전쟁을 반대한 것으로 보았고, 이스라엘 총회에 대항하는 불순한 집단으로 매도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동참하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반대 의견에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 사고가 당연히 응징하고 본 때를 보여야 한다는 식의 행동을 정당화 했다. 이렇게 무지하고 무식하며 무도한 백성이라니…
*주님, 폭력이 폭력을 낳았음에도 당연하게 이를 결정합니다. 나의 소견대로 사는 것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나의 소견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늘 구하겠습니다.
*주님, 무지와 무식과 무도함이 판치는 교회가 되지 않도록 주님 뜻에 더욱 순종 하겠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겠습니다. 늘 지혜롭게 행하기를 생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