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줄기 같은 왕의 마음은 주님의 손 안에 있어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이끄신다(1절).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타칸_측정하다, 평가하다) 하시기에(2절)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인생을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어떤 삶일까?
1.공의와 정의로 사는 삶(3절)
“주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반기신다.(새번역_3절)” 너무나도 선명하게 제사 드리는 일보다 반기시는(기뻐하시는) 것을 일상에서 공평과 정의로 사는 것임을 밝히신다.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의 삶에 자연스레 나타나는 정직한 삶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이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는 그의 성품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않는 종교생활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품(마음)은 어떤 것일까?
거만함과 오만함(4절), 속임(6절), 폭력(7절), 다툼(9절), 악함(10절)을 싫어하신다. 특히나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성품(마음)을 드러낸 구절은 13절이다.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으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새번역)”
“가난한 자”는 빈곤한 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회, 문화, 신체적으로 힘을 갖지 못하는 약자를 뜻한다. 도움을 구하는 약자들의 소리에 귀를 닫으면 언젠가 같은 처지에 놓일 때 아무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잠언의 특징인 “인과응보”가 잘 나타나 있는 구절인데, “어려운 사람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정작 자신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부르짖을 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은 종교적 형식을 따라 이를 준수하는 종교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 긍휼, 자비가 일상의 모든 현장에서, 특히 약한 자들에게 드러나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연약하기 그지 없는 인생들에게 다가오셔서 구원의 빛을 비춰 주신 것 처럼, 빛의 자녀는 의당 약한 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공의요 정의다!
2.어떻게?(2절)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새번역_1절)’ 어떻게 이끄실까?
“사람의 행위는 자기의 눈에는 모두 옳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_2절)”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를 평가한다. 이것이 세상의 방법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 잘하면 된다. 어떤 마음을 품고, 무슨 행동을 준비하더라도 그저 눈으로 보이는 것을 “적절하게 포장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세상의 방법이다.
세상의 방법은 그래서 “속이기” 위해 “말”을 하고(6절), 드러나지 않는 악행을 저지른다(7절). 다투기를 좋아하고(9절), 악한 것들만 추구한다(10절). 이런 것들이 드러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살아야 부를 이루고 이름을 내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삶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지 못한다. 그래서 속이는 말로 재물을 구했을지 모르지만, 죽음을 자초한다(6절). 악행(폭력)은 멸망으로 이끈다(7절). 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인(사람)은 외로워 진다(9절). 마음에 악한 것만 추구하는 이는 이웃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하고 멀어지기만 한다(10절).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임을 솔로몬은 강조한다. 아무리 이렇게 악함을 추구하는 세상에 살더라도 마음의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감찰(타칸)”의 의미는 “규정하다, 재다, 측정하다, 평가하다”이다. 나의 마음을 감찰하신 다는 것은 의도와 생각을 평가하는 것도 있지만 이 평가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규정하고, 재고, 측정하기” 위한 것이다. 즉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 길”을 내시기 위해 살펴보시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의도를 꿰뜷어 보시는 하나님은 나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 따라 살도록 마음에 새로운 규정을 새기신다. 이것을 신뢰하고 성령님의 꺠우쳐 주심을 따라 순종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규정, 측정, 평가를 거절하는 인생은 그 길이 크게 구부러진다(8절). 겉모습이 아무리 번지르 해도 마음을 규정하고 평가하시는 하나님을 피해 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약자를 긍휼히 여기고 돕는 삶”이다. 지금 나의 눈에 띄게 하시고, 마음에 감동 주는 이를 외면하면 안된다. 나의 마음이 긍휼의 마음이 메마르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전했다.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새번역_약 2:13)” 내가 긍휼(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나도 똑같이 아무도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
-마르틴 미뮐러 목사(독일_2차 세계대전 반나치운동)의 “나치가 그들을 덮었을 때”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기억이 나서 찾아보았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님, 오늘 연약한 자를 위해 마음을 아끼지 않게 하소서.
*주님, 내 마음의 길을 내시는 주님께서 원하실 때, 이 사회를 향해 언제든지, 주저않고 주님의 마음과 말씀을 외치게 하소서. 연약한 그들에게 말씀이 소망되도록, 나의 삶을 통해 알게 해주소서… 나부터 주님의 긍휼의 말씀이 드러나는 삶을 살게 하소서.
1.공의와 정의로 사는 삶(3절)
“주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반기신다.(새번역_3절)” 너무나도 선명하게 제사 드리는 일보다 반기시는(기뻐하시는) 것을 일상에서 공평과 정의로 사는 것임을 밝히신다.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의 삶에 자연스레 나타나는 정직한 삶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이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는 그의 성품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않는 종교생활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품(마음)은 어떤 것일까?
거만함과 오만함(4절), 속임(6절), 폭력(7절), 다툼(9절), 악함(10절)을 싫어하신다. 특히나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성품(마음)을 드러낸 구절은 13절이다.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으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새번역)”
“가난한 자”는 빈곤한 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회, 문화, 신체적으로 힘을 갖지 못하는 약자를 뜻한다. 도움을 구하는 약자들의 소리에 귀를 닫으면 언젠가 같은 처지에 놓일 때 아무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잠언의 특징인 “인과응보”가 잘 나타나 있는 구절인데, “어려운 사람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정작 자신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부르짖을 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은 종교적 형식을 따라 이를 준수하는 종교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 긍휼, 자비가 일상의 모든 현장에서, 특히 약한 자들에게 드러나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연약하기 그지 없는 인생들에게 다가오셔서 구원의 빛을 비춰 주신 것 처럼, 빛의 자녀는 의당 약한 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공의요 정의다!
2.어떻게?(2절)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새번역_1절)’ 어떻게 이끄실까?
“사람의 행위는 자기의 눈에는 모두 옳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_2절)”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를 평가한다. 이것이 세상의 방법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 잘하면 된다. 어떤 마음을 품고, 무슨 행동을 준비하더라도 그저 눈으로 보이는 것을 “적절하게 포장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세상의 방법이다.
세상의 방법은 그래서 “속이기” 위해 “말”을 하고(6절), 드러나지 않는 악행을 저지른다(7절). 다투기를 좋아하고(9절), 악한 것들만 추구한다(10절). 이런 것들이 드러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살아야 부를 이루고 이름을 내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삶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지 못한다. 그래서 속이는 말로 재물을 구했을지 모르지만, 죽음을 자초한다(6절). 악행(폭력)은 멸망으로 이끈다(7절). 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인(사람)은 외로워 진다(9절). 마음에 악한 것만 추구하는 이는 이웃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하고 멀어지기만 한다(10절).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임을 솔로몬은 강조한다. 아무리 이렇게 악함을 추구하는 세상에 살더라도 마음의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감찰(타칸)”의 의미는 “규정하다, 재다, 측정하다, 평가하다”이다. 나의 마음을 감찰하신 다는 것은 의도와 생각을 평가하는 것도 있지만 이 평가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규정하고, 재고, 측정하기” 위한 것이다. 즉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 길”을 내시기 위해 살펴보시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의도를 꿰뜷어 보시는 하나님은 나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 따라 살도록 마음에 새로운 규정을 새기신다. 이것을 신뢰하고 성령님의 꺠우쳐 주심을 따라 순종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규정, 측정, 평가를 거절하는 인생은 그 길이 크게 구부러진다(8절). 겉모습이 아무리 번지르 해도 마음을 규정하고 평가하시는 하나님을 피해 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약자를 긍휼히 여기고 돕는 삶”이다. 지금 나의 눈에 띄게 하시고, 마음에 감동 주는 이를 외면하면 안된다. 나의 마음이 긍휼의 마음이 메마르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전했다.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새번역_약 2:13)” 내가 긍휼(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나도 똑같이 아무도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
-마르틴 미뮐러 목사(독일_2차 세계대전 반나치운동)의 “나치가 그들을 덮었을 때”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기억이 나서 찾아보았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님, 오늘 연약한 자를 위해 마음을 아끼지 않게 하소서.
*주님, 내 마음의 길을 내시는 주님께서 원하실 때, 이 사회를 향해 언제든지, 주저않고 주님의 마음과 말씀을 외치게 하소서. 연약한 그들에게 말씀이 소망되도록, 나의 삶을 통해 알게 해주소서… 나부터 주님의 긍휼의 말씀이 드러나는 삶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