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아굴의 잠언이다. 세상 속에서 자신이 깨닫지 못한 것, 놀랄만한 것, 지혜로운 것, 위풍당당한 것들을 나열한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감탄하는 것들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지혜 없다고 고백한 것을 증거(?)한다… 그런데 실상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이라도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끄심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1.감출 수 없다. 다 드러난다. 그런데 왜?(18-20절)
기이한 하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 서넛(18-20절)…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간 자취, 뱀이 바위로 지나간 흔적,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간 자취,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하였던 자취…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독수리가 하늘을, 뱀이 바위 위로, 배가 바다 위로 지나간 자취나 흔적은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를 빗대어 음녀의 유혹이 마치 흔적도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먹고 입을 씻음같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나는 아무런 악행도 한 일이 없다(새번역_20절)”고 오히려 떳떳한 음녀의 행동이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간 자취을 알 수 없듯, 뱀이 바위위로 지나간 흔적을 찾을 수 없듯, 바다 위로 지나간 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듯이 자신의 음란한 행동도 그렇게 완벽히(?) 감출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음녀의 말이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드러나고 밝혀질 일을 애써 감추는 것,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들통날 거짓을 무리해가며 하는 것이 어리석음을 빗댄 것이다. 살다보면 이런 유혹이 한 두번일까?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아주 작은 사소한 것을 넘어가기 위해 “작은 거짓”으로 속인다. 하지만 결국 들통난다. 이런 경험을 일상에서 경험했으면 “솔직, 진실”한 삶을 살아갈 법 한데, 여전히 들통날 작은 거짓말을 반복한다.
*음녀가 자신의 음행을 감추고 ‘나는 이런 일을 행하지 않았다’고 발각될 위기를 넘겼을 지라도 언젠가 그 사실은 드러난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독수리의 하늘길, 뱀의 바윗길, 배가 다니는 바닷길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한다.
*아굴에게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들통날 거짓을 마치 완전히 감출 수 있다고 여기며 천역덕스럽게 속이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켜 보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아굴이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니? 그것 참 신기하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단 말이야… 라고 말이다.
2.세상을 흔드는 하나님 나라 복음(21-23절)
세상을 뒤흔들 만한 하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일 서넛(21-23절)… 종이 임금이 되는 것, 어리석은 자가 배불리 먹는 것, 꺼림을 받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 여종이 그 안주인의 자리를 이어 받는 것…. 오늘날의 사고로는 이렇게 개천에서 용 난 것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굴의 시대는 절대 넘지 못할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하긴 오늘날에도 인도와 같은 지역에서 여전히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카스트 제도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아굴의 시대에도 흔하지 않았지만 이런 일이 있었기에 그의 잠언에 기록했을 것이다. 실제로 종이 임금이 되는 것과 같은 말도 안되는 일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나, 바벨론의 총독이 된 다니엘이 있었다. 미움을 받는 여자(새번역_ 꺼림을 받는 여자, 23절) 라는 표현은 ‘미워하다 증오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적대적이며, 혐오를 받고 경멸 당한다 라는 내용을 가진다. 당시 통념상, “창기”나, 이방신의 신녀와 같은 여인 일 것이다. 그런데 “호세아”는 음행을 즐기던 여인과 결혼하여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예언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사회 통념상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살고 있는 시대의 통념에 얼매여 사는 것 보다,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세상을 뒤흔들만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고난과 환난 핍박을 견디는 이들이 받는 무수한 순교의 위협을 당당히 견딘 이들을 향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히 11:38)”이라 하였다. 세상 가치를 뒤흔들만한 혁명적인 일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의 사랑과 희생 섬김과 나눔의 삶을 통해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실제로 하나님 나라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전해지는 과정에서 세상은 “소동”이 일어났다. 이런 일을 본 적이 없었다고 놀랐다. 그렇게 들어간 복음은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주인과 종이 한 상에서 먹고 교제하고, 물건 취급을 받던 여인들의 인권이 회복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세상이 주장하는 가치와 체계를 뒤흔들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들어가며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일은 여전히 일어난다. “복음이 영향력을 끼치는 곳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세상 가치관이라는 권세가 흔들린다”
*복음이 선포되고 세워지는 세상마다 복음을 감당하지 못해 흔들린다. 세상이 고집하는 왜곡된 사고체계가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 복음이라는 은혜의 체계가 회복된다.
3.작은 것에 깃든 하나님의 지혜(24-28절)
땅에서 아주 작으면서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24-28절)…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 바위 사이에 집을 짓는 사반(오소리), 임금은 없지만 떼를 지어 함께 나아가는 메뚜기, 사람의 손에 잡힐 것 같은데도 왕궁을 드나드는 도마뱀….”작다(카탄)”는 말은 크기가 작다는 의미도 있지만, “하찮은, 어린, 중요하지 않은”이라는 의미도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크기도 크기지만,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들이라는 뜻이겠다. 개미, 오소리, 메뚜기, 도마뱀… 크기도 작지만,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들이라 하겠다. “가장 지혜롭다”는 것은 최고로 지혜롭다는 최상급의 의미이다. “하찮은 것이 최고로 지혜롭다!”라는 감탄이라 해도 무방하다.
*우리가 볼 때 하찮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이라도 우리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찮게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지혜를 배우고, 이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하심을 깨닫고 항상 겸손해야 할 것을 교훈한다 할 것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며 가치를 판단하는 어리석은 존재이다. 겉으로 보기에 크고 아름다우면 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하찮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한다. 개미나, 오소리, 메뚜기, 도마뱀을 귀하게 여기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시각, 태도로 인간을 보지 않으신다. 마치 지혜로운 인간이 아주 작고 미미한 개미, 오소리, 메뚜기, 도마뱀을 바라보며 이들의 지혜로운 생존 방식에 감탄하며 이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인간을 바라보신다.
*바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 사람은 외모르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가득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엇던 소년 다윗을 바라보신 하나님의 마음이셨다. 외모(용모와 키)가 번듯한 사울왕이 통치 하고 있던 시대에 그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시각은 이새의 여러 아들 중에 “어리고 왜소한” 다윗을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신 것은 어리고 왜소한 모습이 아니었다. 다윗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이었다.
*주님께서도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마 18:3). 어리고 미성숙한 아이들이지만, 그들의 순수하고 순전한 주님을 찾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볼 수 있는 지혜, 그것은 작디 작은(하찮고 하찮은) 개미, 오소리, 메뚜기, 도마뱀을 보고서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섭리를 깨닫는 것과 같다. 그 작고 하찮은 시각으로 보이는 것 마저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솜씨가 깃들어져 인간이 생각지도 못하는 지혜로움으로 살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다 드러날 삶이기에 늘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사람에게 감출 수 있다 여겨도 하나님께 감출 수 없다. 하나님께 감출 수 없기에 사람에게도 언젠가 드러난다.
*세상이 아무리 강력한 관습과 문화의 장벽을 치더라도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세상을 변혁 한다. 세상을 변화 시킨다. 통념상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도 하나님 나라 복음의 가치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방식이다.
*중심을 보며 지혜를 배운다. 외모, 외연에 치중하는 세태를 거스려 중심을 보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작고 왜소한 것들이라도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창조의 기이한 솜씨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중심을 보는 지혜로움이 장착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중심을 보셨듯, 나도 내가 바라보는 것들의 중심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주님, 늘 진실한 마음과 입술을 주십시오.
*주님, 견고한 세상 가치에 찌든 나의 안목과 사고를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무너뜨려 주십시오.
*주님, 중심을 보는 지혜로움을 주십시오.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편 111:1-10]
이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찬양시이다. 구조적으로 72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시의 특징은 할렐루야 이후 마지막 시행까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첫 글자가 시작되는 알파벳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