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잠언이 이어진다. 일상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다양한 주제로 언급한다. 굳이 큰 틀의 주제를 잡으라면, “말”, “절제”, “과유불급”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말’에 대한 잠언은 “부드러운 혀(15절)”, “거짓 증거(18절)”, “참소 하는 혀(23절)”, “다투는 여인(24절)”, “먼 곳에서 오는 좋은 기별(25절)” 등이다. “절제, 과유불급”과 관련된 잠언은 “꿀(16, 27절)”, “이웃집 출입(17절)”, “노래(20절)”, “마음(28절)” 이다. 이밖에 원수 사랑(21절), 의연함(26절) 등이 있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 속 지혜로운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1.말 조심(15,18-19, 23-25절)
‘말’은 때에 따라 맞는 말이 있고 맞지 않는 말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적절한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은 차이가 크다. 또,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과유불급”인 것도 많다. “절제”가 되지 않는 “말”은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상대방이나 자신에게나 동일하다. 그래서 “말은 늘 조심”해야 한다.
“말”에 대한 잠언을 다루면서 이에 따른 행동에 관한 것도 함께 알려 준다. “오래 참음을 부드러운 혀(15절)”와 연결 시켰다. 성급하고 빠른 말보다 충분히 들어주고 ‘조근 조근’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상대방의 어조와 어투에 따라 변하는 ‘카멜레온 혀’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 들어오는 말이든지 한결같이 ‘받아주고, 인내하며 차분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겠다.
*부드럽지 않은 혀는 “거짓말로 증언하는 혀(18절)”이다. 이것은 망치, 칼, 뾰족한 화살과 같다. 환난 때 이런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마치 썩은 이와 뼈가 부러진 다리를 의지하는 것(새번역_19절)”과 같다. 도무지 믿은 것이 못된다는 의미다. 또, “헐뜯는 혀(23절)”이다. 특히 헐뜯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차라리 홀로 사는 것이 더 낫다(23-24절)고 까지 말한다.
*부드러운 혀는 오래참는 혀이다. 변함없는 말을 하는 혀이다. 거짓을 말하고 헐뜯는 혀는 서로를 죽이는 망치, 칼, 뾰족한 화살이며, 도무지 의지할 것이 못 된다. 분노를 일으키고 불화를 가져온다. 비수 같은 말들이 쏟아질 때는 다락방에라도 홀로 있는 것이 낫다. 아.. 얼마나 피곤한 삶인가!
*이것은 일상에서도 중요하지만 특히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할 때 더욱 중요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세상을 복음을 늘 대적하고 경계한다. 그들을 향해 말하는 복음의 입술은 “부드럽게” 들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새번역_벧전 3:15)”
2.과유불급(16-17,27-28절)
현대사회는 중독 사회다. 별 희한한 중독도 있을 만큼 중독이 넘치는 사회이다. 니코틴, 알코올, 게임, 쇼핑, 투기, 스마트폰, 도박….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문제는 특정 항목 하나에 중독되기 보다 대게 니코틴과 알코올, 게임과 스마트폰, 알코올과 도박… 등 서로 얽혀서 중독되어 있는 경우도 흔하다.
신앙생활에서도 중독은 있다. 너무나 지나쳐서 일상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지나친 기도와 금식, 지나친 광신적인 활동… 세세하게 구분하기보다 “종교 중독”이라 표현 해도 무방할 만큼 균형이 사라진 중독자가 꽤 있다. 이런 중독자로 인해 사회가 큰 피해를 입기도 한다.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이런 종교중독에서 오는 막대한 피해를 우리는 고스란히 받아 보았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절제”가 있음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지 모른다. 오늘 말씀에서도 “꿀을 발견하더라도 적당히 먹어라. 과식하면 토할지도 모른다. 이웃집이라 하여 너무 자주 드나들지 말아라. 그가 싫증이 나서 너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새번역_15-16절)… 마음이 상한 사람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과 같고,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다.(새번역_20절)…. 꿀도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듯이, 영예를 지나치게 구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자기의 기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이 무너져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새번역_27-28절).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어떻게 절제 할 수 있을까?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28절)”. “마음”을 새번역은 ‘기분’이라고 번역했다. 기분 내키는 대로가 아니라 제어(기분을 통제)하는 것이 관건이다.
현대사회는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특히 예술분야의 표현력은 이 부분을 너무도 강조한다. 하지만 충동적인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결국 충동에 존재가 사라진다. 아무리 크게 쌓은 건축물이라도 한순간에 무너지게 만드는 것은 “충동적 행동”이다.
충동적인 행동보다 생각하고 생각하여 행동하여야 한다. 아무리 맛있는 꿀이라도 지나치면 독이다.
나는?
*주님, 말 조심하는 하루 이게 하소서
*주님, 지나치지 않도록 절제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1.말 조심(15,18-19, 23-25절)
‘말’은 때에 따라 맞는 말이 있고 맞지 않는 말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적절한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은 차이가 크다. 또,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과유불급”인 것도 많다. “절제”가 되지 않는 “말”은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상대방이나 자신에게나 동일하다. 그래서 “말은 늘 조심”해야 한다.
“말”에 대한 잠언을 다루면서 이에 따른 행동에 관한 것도 함께 알려 준다. “오래 참음을 부드러운 혀(15절)”와 연결 시켰다. 성급하고 빠른 말보다 충분히 들어주고 ‘조근 조근’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상대방의 어조와 어투에 따라 변하는 ‘카멜레온 혀’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 들어오는 말이든지 한결같이 ‘받아주고, 인내하며 차분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겠다.
*부드럽지 않은 혀는 “거짓말로 증언하는 혀(18절)”이다. 이것은 망치, 칼, 뾰족한 화살과 같다. 환난 때 이런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마치 썩은 이와 뼈가 부러진 다리를 의지하는 것(새번역_19절)”과 같다. 도무지 믿은 것이 못된다는 의미다. 또, “헐뜯는 혀(23절)”이다. 특히 헐뜯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차라리 홀로 사는 것이 더 낫다(23-24절)고 까지 말한다.
*부드러운 혀는 오래참는 혀이다. 변함없는 말을 하는 혀이다. 거짓을 말하고 헐뜯는 혀는 서로를 죽이는 망치, 칼, 뾰족한 화살이며, 도무지 의지할 것이 못 된다. 분노를 일으키고 불화를 가져온다. 비수 같은 말들이 쏟아질 때는 다락방에라도 홀로 있는 것이 낫다. 아.. 얼마나 피곤한 삶인가!
*이것은 일상에서도 중요하지만 특히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할 때 더욱 중요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세상을 복음을 늘 대적하고 경계한다. 그들을 향해 말하는 복음의 입술은 “부드럽게” 들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새번역_벧전 3:15)”
2.과유불급(16-17,27-28절)
현대사회는 중독 사회다. 별 희한한 중독도 있을 만큼 중독이 넘치는 사회이다. 니코틴, 알코올, 게임, 쇼핑, 투기, 스마트폰, 도박….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문제는 특정 항목 하나에 중독되기 보다 대게 니코틴과 알코올, 게임과 스마트폰, 알코올과 도박… 등 서로 얽혀서 중독되어 있는 경우도 흔하다.
신앙생활에서도 중독은 있다. 너무나 지나쳐서 일상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지나친 기도와 금식, 지나친 광신적인 활동… 세세하게 구분하기보다 “종교 중독”이라 표현 해도 무방할 만큼 균형이 사라진 중독자가 꽤 있다. 이런 중독자로 인해 사회가 큰 피해를 입기도 한다.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이런 종교중독에서 오는 막대한 피해를 우리는 고스란히 받아 보았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절제”가 있음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지 모른다. 오늘 말씀에서도 “꿀을 발견하더라도 적당히 먹어라. 과식하면 토할지도 모른다. 이웃집이라 하여 너무 자주 드나들지 말아라. 그가 싫증이 나서 너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새번역_15-16절)… 마음이 상한 사람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과 같고,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다.(새번역_20절)…. 꿀도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듯이, 영예를 지나치게 구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자기의 기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이 무너져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새번역_27-28절).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어떻게 절제 할 수 있을까?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28절)”. “마음”을 새번역은 ‘기분’이라고 번역했다. 기분 내키는 대로가 아니라 제어(기분을 통제)하는 것이 관건이다.
현대사회는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특히 예술분야의 표현력은 이 부분을 너무도 강조한다. 하지만 충동적인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결국 충동에 존재가 사라진다. 아무리 크게 쌓은 건축물이라도 한순간에 무너지게 만드는 것은 “충동적 행동”이다.
충동적인 행동보다 생각하고 생각하여 행동하여야 한다. 아무리 맛있는 꿀이라도 지나치면 독이다.
나는?
*주님, 말 조심하는 하루 이게 하소서
*주님, 지나치지 않도록 절제하는 마음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