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기는 했나 보다… 어제 27장을 한꺼번에 묵상해 버린 것을 오늘 아침에야 깨달았다…. 허허허허 같은 본문이지만 다시 묵상했다.
암튼…본문은 어떤 자세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할지 계속 권면한다.
1.축복하는 말도 때와 장소가 맞아야…(14절)
“이른 아침에 큰소리로 이웃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면, 그것을 오히려 저주로 여길 것이다(새번역_14절)”
‘이른 아침’은 아침(보케르)이 이미 새벽녘, 동틀녘을 의미 하므로 이보다 훨씬 이른, 아직 어둠이 한창인 시간일 가능성이 크다. 깊은 잠에 취해 있을 시간 정적을 깨는 여인의 소리가 어떻게 달갑게 들리겠는가! 아무리 축복의 말이라도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삶 속에서 이와같은 실례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가 적절하지 않으면 오히려 거북스럽고, 오해가 될 만한 말들이 참 많다. 나의 말이 혹시 이리 눈치도 없이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까?
*특히 이런 맥락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듣는 이들의 마음에 전혀 공감되지 않고, 거북스러운 말을 임의로 고집하며 하지 않았는지 되돌아 보게 된다.
*축복의 말도 때와 장소가 맞아야 가치가 있다.
2.친구를 빛나게 하는 친구(17절)
“쇠붙이는 쇠붙로 쳐야 날이 날카롭게 서듯이, 사람도 친구와 부대껴야 지혜가 예리 해진다.(새번역_17절)”
‘날카롭게(하다드)’라는 말의 의미에는 ‘빛나게 한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 단어를 “날카롭게, 혹은 예리하게”로 적용했다. 쇠붙이와 쇠붙이가 부딪혀서 더욱 날카롭게 연마 되듯이 두 친구의 인격과 인격이 서로의 부대낌(토론, 논쟁, 지혜의 대화)를 통해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다.
*하브루타는 유대인의 전통 학습법이다. 서로 열띤 토론을 통해 학습 내용을 숙지해 나가는 방법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나 탈무드를 공부할 때 두 친구가 함께 같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서로 깊은 토론을 통해 율법과 탈무드에 대한 더 깊은 생각과 안목을 빚어 나간다. 서로의 사상과 철학을 발전 시키는 것은 친구간에 오가는 열띤 대화를 통해서 이다.
*좋은 친구는 서로의 학문과 생각을 더욱 깊어지게 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내에서의 관계가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말씀의 이치는 서로 깊게 대화 하면서 깊은 의미를 통찰해 나갈 수 있게 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일까!
*좋은 공동체, 좋은 지체란 말씀이 나의 삶에 쑤욱 들어 오도록 도와 주는 공동체, 지체일 것이다. 말씀을 대화 속에서 자연스레 나누며 서로의 영혼에게 양약을 공급해 주는 진정한 한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과연 이상속에서만 가능할까? 아니다. 오늘 내가 속한 공동체가 바로 이런 곳 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친구라고 스스로 말씀 하셨다(요 15:15). 나의 참 친구이신 예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은 이 세상 어떤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러니 예수님 보다 더 좋은 친구가 어디에 있겠나! 나를 종이라 부리지 않으시고 친구라 불러 주신 예수님과 늘 대화하면 말씀이 더 깊이 보인다. 말씀이 더 사랑스러워 진다.
*좋은 친구 예수님과 함께 말씀 속에서 더욱 말씀을 알아간다. 나의 참 친구 되신 예수님 덕분에 나의 얼굴에서 하늘 영광의 광채가 빛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님의 나의 햇빛 이시다.
*또 곰곰히 묵상이 되는 것은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개역)”이다. 나는 나를 통해 예수님이 더욱 빛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새번역은 “지혜가 예리하여 진다”로 번역했는데, 예수님과 늘 함께 있어 하늘의 지혜가 나에게 구비되었을까?
3.사람 단련은 칭찬으로!(21-22절)
은과 금은 단련하는 법이 정해져 있다. 은은 도가니에 넣었다 빼었다를 반복하며 망치질을 해야 하고, 금은 풀무질을 반복하고 지속적으로 하면서 단련한다. 은을 은답게, 금을 금답게 하는 것은 도가니와 풀무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람답게 단련하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이를 거하는 환경속에서 고난, 연단, 박해, 환란 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올바르게 지적하고 가르치는 책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솔로몬은 전혀 의외의 말을 한다. 사람은 칭찬으로 단련한다(칭찬은 사람됨을 달아 볼 수 있다_새번역_21절)고 했다. 사람을 단련시키고 싶다면 책망하지 말고 칭찬하란다. 솔로몬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재미있는 예화를 하나 든다. “어리석은 사람은 곡식과 함께 절구에 넣어서 공이로 찧어도, 그 어리석음이 벗겨 지지 않는다(새번역_22절)”
책망과 비판으로 어리석음을 벗겨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칭찬이 사람을 연단 한다니….
옛 속담에도 칭찬은 고래도 춤주게 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을 연단 시키는 이 칭찬도 올바로 해야 제대로 연단 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칭찬 사용법일까?
“네가 너를 칭찬하지 말고, 남이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 칭찬은 남이 하여 주는 것이지, 자기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새번역_2절)” 칭찬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 함정은 “자화자찬”이라는 함정이다. “자기 자랑”이 되는 “자화자찬”은 반드시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더 많게 한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이 칭찬해 주는 것은 나의 마음을 더욱 겸손하게 만드는 담금질이다.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새번역_5절)” 꾸짖음을 좋아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진심어린 충고를 거절하면 인생길이 그만큼 외로워 진다. 친구의 쓰디쓴 충고를 받는 것이 당장은 거북스러울수 있지만, 이를 거절하면 순식간에 패망이 이른다. 나에게 드러내 놓고 서운한 말을 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을까?
그 친구는 좋으신 예수님(성령님),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누가 있을까? 이런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며 나가는 길은 충고에 서운함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 놓고 꾸짖어 주는” 그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용으로 가능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자주 하고 있을까? 혹은 칭찬 받는 삶을 살고 있을까?
*나에게 주저하지 않고 해주는 쓰디쓴 충고를 마다하지 않을 친구가 있을까? 혹은 나의 친구에게 그런 존재일까?
*칭찬이라는 도가니와 풀무를 구비하는 삶이어야 하겠다!
4.성실함이 가져올 안정(평화, 배부름_23-27절)
“부지런히 살피며(잘 알아 두며)…마음에 두라(정성을 기울여라)” 이것이 성실함이다. 부지런함이 지속되는 성실은 그 열매를 반드시 맺히게 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부지런해야 하고 이것이 성실하게 이어져야 한다. 그러면 산다. “꼴을 거두고, 양 털 옷을 입을 수 있고, 땅을 사들일 수 있다. 넉넉하여 여종의 먹거리까지 보장한다.”
*부지런히 살피며, 마음에 두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손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 거두고, 입고, 사들이며, 먹는다.
*성실하지 않으면 결코 바라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다!
나는?
-때에 맞게 말하는 지혜로움을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나를 빛나게 하셨듯, 나도 친구(지체, 공동체)를 빛나게 했으면 좋겠다! 나로 인해 예수님이 빛났으면 좋겠다.
-칭찬을 언제 해 봤을까? 언제 받아 보았을까? 칭찬으로 단련되는 삶이어라!.
-부지런히 살피고 마음에 두어 성실하게 살아가는 “손”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시리라!
*주님, 때에 맞는 말을 하는 입술로 단련 시켜 주십시오.
*주님, 나로 인해 참 친구 예수님이 빛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주님, 칭찬하는 눈과 입술을 주십시오.
*주님, 성실한 손을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암튼…본문은 어떤 자세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할지 계속 권면한다.
1.축복하는 말도 때와 장소가 맞아야…(14절)
“이른 아침에 큰소리로 이웃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면, 그것을 오히려 저주로 여길 것이다(새번역_14절)”
‘이른 아침’은 아침(보케르)이 이미 새벽녘, 동틀녘을 의미 하므로 이보다 훨씬 이른, 아직 어둠이 한창인 시간일 가능성이 크다. 깊은 잠에 취해 있을 시간 정적을 깨는 여인의 소리가 어떻게 달갑게 들리겠는가! 아무리 축복의 말이라도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삶 속에서 이와같은 실례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가 적절하지 않으면 오히려 거북스럽고, 오해가 될 만한 말들이 참 많다. 나의 말이 혹시 이리 눈치도 없이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까?
*특히 이런 맥락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듣는 이들의 마음에 전혀 공감되지 않고, 거북스러운 말을 임의로 고집하며 하지 않았는지 되돌아 보게 된다.
*축복의 말도 때와 장소가 맞아야 가치가 있다.
2.친구를 빛나게 하는 친구(17절)
“쇠붙이는 쇠붙로 쳐야 날이 날카롭게 서듯이, 사람도 친구와 부대껴야 지혜가 예리 해진다.(새번역_17절)”
‘날카롭게(하다드)’라는 말의 의미에는 ‘빛나게 한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 단어를 “날카롭게, 혹은 예리하게”로 적용했다. 쇠붙이와 쇠붙이가 부딪혀서 더욱 날카롭게 연마 되듯이 두 친구의 인격과 인격이 서로의 부대낌(토론, 논쟁, 지혜의 대화)를 통해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다.
*하브루타는 유대인의 전통 학습법이다. 서로 열띤 토론을 통해 학습 내용을 숙지해 나가는 방법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나 탈무드를 공부할 때 두 친구가 함께 같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서로 깊은 토론을 통해 율법과 탈무드에 대한 더 깊은 생각과 안목을 빚어 나간다. 서로의 사상과 철학을 발전 시키는 것은 친구간에 오가는 열띤 대화를 통해서 이다.
*좋은 친구는 서로의 학문과 생각을 더욱 깊어지게 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내에서의 관계가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말씀의 이치는 서로 깊게 대화 하면서 깊은 의미를 통찰해 나갈 수 있게 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일까!
*좋은 공동체, 좋은 지체란 말씀이 나의 삶에 쑤욱 들어 오도록 도와 주는 공동체, 지체일 것이다. 말씀을 대화 속에서 자연스레 나누며 서로의 영혼에게 양약을 공급해 주는 진정한 한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과연 이상속에서만 가능할까? 아니다. 오늘 내가 속한 공동체가 바로 이런 곳 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친구라고 스스로 말씀 하셨다(요 15:15). 나의 참 친구이신 예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은 이 세상 어떤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러니 예수님 보다 더 좋은 친구가 어디에 있겠나! 나를 종이라 부리지 않으시고 친구라 불러 주신 예수님과 늘 대화하면 말씀이 더 깊이 보인다. 말씀이 더 사랑스러워 진다.
*좋은 친구 예수님과 함께 말씀 속에서 더욱 말씀을 알아간다. 나의 참 친구 되신 예수님 덕분에 나의 얼굴에서 하늘 영광의 광채가 빛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님의 나의 햇빛 이시다.
*또 곰곰히 묵상이 되는 것은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개역)”이다. 나는 나를 통해 예수님이 더욱 빛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새번역은 “지혜가 예리하여 진다”로 번역했는데, 예수님과 늘 함께 있어 하늘의 지혜가 나에게 구비되었을까?
3.사람 단련은 칭찬으로!(21-22절)
은과 금은 단련하는 법이 정해져 있다. 은은 도가니에 넣었다 빼었다를 반복하며 망치질을 해야 하고, 금은 풀무질을 반복하고 지속적으로 하면서 단련한다. 은을 은답게, 금을 금답게 하는 것은 도가니와 풀무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람답게 단련하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이를 거하는 환경속에서 고난, 연단, 박해, 환란 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올바르게 지적하고 가르치는 책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솔로몬은 전혀 의외의 말을 한다. 사람은 칭찬으로 단련한다(칭찬은 사람됨을 달아 볼 수 있다_새번역_21절)고 했다. 사람을 단련시키고 싶다면 책망하지 말고 칭찬하란다. 솔로몬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재미있는 예화를 하나 든다. “어리석은 사람은 곡식과 함께 절구에 넣어서 공이로 찧어도, 그 어리석음이 벗겨 지지 않는다(새번역_22절)”
책망과 비판으로 어리석음을 벗겨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칭찬이 사람을 연단 한다니….
옛 속담에도 칭찬은 고래도 춤주게 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을 연단 시키는 이 칭찬도 올바로 해야 제대로 연단 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칭찬 사용법일까?
“네가 너를 칭찬하지 말고, 남이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 칭찬은 남이 하여 주는 것이지, 자기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새번역_2절)” 칭찬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 함정은 “자화자찬”이라는 함정이다. “자기 자랑”이 되는 “자화자찬”은 반드시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더 많게 한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이 칭찬해 주는 것은 나의 마음을 더욱 겸손하게 만드는 담금질이다.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새번역_5절)” 꾸짖음을 좋아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진심어린 충고를 거절하면 인생길이 그만큼 외로워 진다. 친구의 쓰디쓴 충고를 받는 것이 당장은 거북스러울수 있지만, 이를 거절하면 순식간에 패망이 이른다. 나에게 드러내 놓고 서운한 말을 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을까?
그 친구는 좋으신 예수님(성령님),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누가 있을까? 이런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며 나가는 길은 충고에 서운함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 놓고 꾸짖어 주는” 그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용으로 가능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자주 하고 있을까? 혹은 칭찬 받는 삶을 살고 있을까?
*나에게 주저하지 않고 해주는 쓰디쓴 충고를 마다하지 않을 친구가 있을까? 혹은 나의 친구에게 그런 존재일까?
*칭찬이라는 도가니와 풀무를 구비하는 삶이어야 하겠다!
4.성실함이 가져올 안정(평화, 배부름_23-27절)
“부지런히 살피며(잘 알아 두며)…마음에 두라(정성을 기울여라)” 이것이 성실함이다. 부지런함이 지속되는 성실은 그 열매를 반드시 맺히게 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부지런해야 하고 이것이 성실하게 이어져야 한다. 그러면 산다. “꼴을 거두고, 양 털 옷을 입을 수 있고, 땅을 사들일 수 있다. 넉넉하여 여종의 먹거리까지 보장한다.”
*부지런히 살피며, 마음에 두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손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 거두고, 입고, 사들이며, 먹는다.
*성실하지 않으면 결코 바라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다!
나는?
-때에 맞게 말하는 지혜로움을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나를 빛나게 하셨듯, 나도 친구(지체, 공동체)를 빛나게 했으면 좋겠다! 나로 인해 예수님이 빛났으면 좋겠다.
-칭찬을 언제 해 봤을까? 언제 받아 보았을까? 칭찬으로 단련되는 삶이어라!.
-부지런히 살피고 마음에 두어 성실하게 살아가는 “손”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시리라!
*주님, 때에 맞는 말을 하는 입술로 단련 시켜 주십시오.
*주님, 나로 인해 참 친구 예수님이 빛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주님, 칭찬하는 눈과 입술을 주십시오.
*주님, 성실한 손을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