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19:14-25 하나님 앞에 나아오려면…
19장은 출애굽한 지 한달 반만에 마침내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설교” 하신 것이다. 이후에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한 이 경험을 특별하게 경험하였다.
이미 10-15절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구체적으로 준비할 것을 알려주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셀레이는 기다림으로 모세로부터 준비하라고 전해 들은대로 착착 준비하였다. “마음”을 다하여 준비하는 것에는 개인적인 쾌락도 당연히 절제해야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다뤄져야 할 것이었다.
드디어 셋째 날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우리도 역시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떻게 해야 할까?
1.두려워서 떨었다(16절)
“마침내 셋째 날 아침이 되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나며,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산양 뿔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지자, 진에 있는 모든 백성이 두려워서 떨었다(새번역_16절).”
“떤다(하라드)”의 뜻은 “나도 모르게 몸이 흔들리거나 떨리는 모습”을 가리킨다. 팔에 소름이 돋고 몸이 저절로 떨려 땅바닥에 완전히 엎드릴 수 밖에 없는 모습을 “하라드”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나며, 짙은 구름이 산을 덮고, 산양 뿔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현장은 “떨지 않을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다.
2.하나님의 배려_확인하고 또 확인하시는(21-22, 24절)
“많이 죽을까 하노라(21절)…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22, 24절)” 새번역은 좀 더 직관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에게, 나 주를 보려고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다가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단단히 일러 두어라. 나 주에게 가까이 오는 제사장도 자신을 성결하게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주가 그들도 쳐서 죽일 것이다.” … “너는 어서 내려가서, 아론을 데리고 올라오너라. 그러나 제사장들과 백성은 나에게 올라오려고 경계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경계선을 넘으면, 나 주가 그들을 쳐서 죽일 것이다.”(새번역_21-22, 24절)
경계선을 넘으면, 성결하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을 여러차례 당부하신 것이다. 왜 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 열가지 재앙이나 홍해 도하, 광야에서 물과 식량을 공급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은 확실하게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두가 궁금해 할 뿐이다.
호기심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면 댓가는 이유를 불문하고 죽음이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시내산에서 나타나는 신기한 현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은 함부로 더 가까이 나오다가 죽게 될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또한 제사장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성결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철저하게 지킨 성결 상태에서만 나아올 것을 명령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직 모른다. 온전히 모르기에 제대로 가르치며 혹여나 자기 생각대로 행하다가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에 빠지지 않기를 배려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시는 마음을 가늠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철저하게 지키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우리를 향한 인자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나의 육신의 호기심, 욕심을 따르는 본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지키고자 절제하는 마음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3.그럼에도_하나님의 허락을 따라 더 나아감(19-20, 24절)
시내산 아래 경계선은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 누구라도 넘어서지 않도록 확실하게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땅바닥에 선을 긋지는 않았을터이고 시내산이 돌산이니 주변에 널린 돌덩이로 돌담을 쌓았을 수도 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함부러 이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해야 했기에 아마도 돌담이 가장 적절한 경계선이었을 것이다.
경계선(돌담)을 사이에 두고 누구도 돌담 너머 시내산 기슭과 광야가 나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돌담 경계선을 넘어서 시내산 기슭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산양 뿔)나팔소리가 길게 울려 퍼질 때였다(13절, 17절).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시내산 기슭까지는 들어설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안됐다. 하지만 모세와 아론은 좀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임의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20절)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산 꼭대기에 강림하셔서 모세를 음성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아론을 데리고 올라오라고 말씀하셨다(24절).
*성막의 구조와 시내산에서 백성들이 처음 하나님을 대면할 때 구분되는 구조가 비슷하다. 성전 뜰, 성소, 지성소로 구성된 성막은 산 기슭, 산(구름이 가득한), 산꼭대기로 구분된 것과 동일하다. 성전 뜰까지는 백성들의 출입이 가능했지만,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제사장들이 아니면 불가능했고, 지성소는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기에 구름이 가득한 산과 산 꼭대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신 모세와 아론만 올라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의 구조와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 경험케 하신 것이다.
또, 성막을 완성한 후 레위인들에게 외인들이 함부로 성막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게 하셨는데(민 3:10) 본문의 하나님의 배려와 동일하다. 무지, 부지중에 함부로 성막을 침입하여 목숨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된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을때의 심정을 “심히 두렵고 떨린다”(히 12:21)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히 12:25)”고 경고한다. 더 나아가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 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는 불이십니다(새번역_히 12:28-29)” 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됨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섬기지 않으면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불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마음대로 살면 된다고 착각하는 성도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이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설 때, 일말의 경외함도 없이 함부로 교만하게 행하는 이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내가 그들을 돌로 칠까” 걱정하신 대로 일어나는 심판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은혜를 예수님 때문에 받았다면 일상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자!
*주님, 오늘도 경건(성결)하고 경외함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경계를 교만하게 넘지 않겠습니다. 저의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그림:”시내산에 오른 모세/장 레옹 제롬/1900/프랑스
19장은 출애굽한 지 한달 반만에 마침내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설교” 하신 것이다. 이후에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한 이 경험을 특별하게 경험하였다.
이미 10-15절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구체적으로 준비할 것을 알려주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셀레이는 기다림으로 모세로부터 준비하라고 전해 들은대로 착착 준비하였다. “마음”을 다하여 준비하는 것에는 개인적인 쾌락도 당연히 절제해야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다뤄져야 할 것이었다.
드디어 셋째 날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우리도 역시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떻게 해야 할까?
1.두려워서 떨었다(16절)
“마침내 셋째 날 아침이 되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나며,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산양 뿔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지자, 진에 있는 모든 백성이 두려워서 떨었다(새번역_16절).”
“떤다(하라드)”의 뜻은 “나도 모르게 몸이 흔들리거나 떨리는 모습”을 가리킨다. 팔에 소름이 돋고 몸이 저절로 떨려 땅바닥에 완전히 엎드릴 수 밖에 없는 모습을 “하라드”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나며, 짙은 구름이 산을 덮고, 산양 뿔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현장은 “떨지 않을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다.
2.하나님의 배려_확인하고 또 확인하시는(21-22, 24절)
“많이 죽을까 하노라(21절)…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22, 24절)” 새번역은 좀 더 직관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에게, 나 주를 보려고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다가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단단히 일러 두어라. 나 주에게 가까이 오는 제사장도 자신을 성결하게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주가 그들도 쳐서 죽일 것이다.” … “너는 어서 내려가서, 아론을 데리고 올라오너라. 그러나 제사장들과 백성은 나에게 올라오려고 경계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경계선을 넘으면, 나 주가 그들을 쳐서 죽일 것이다.”(새번역_21-22, 24절)
경계선을 넘으면, 성결하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을 여러차례 당부하신 것이다. 왜 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 열가지 재앙이나 홍해 도하, 광야에서 물과 식량을 공급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은 확실하게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두가 궁금해 할 뿐이다.
호기심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면 댓가는 이유를 불문하고 죽음이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시내산에서 나타나는 신기한 현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은 함부로 더 가까이 나오다가 죽게 될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또한 제사장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성결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철저하게 지킨 성결 상태에서만 나아올 것을 명령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직 모른다. 온전히 모르기에 제대로 가르치며 혹여나 자기 생각대로 행하다가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에 빠지지 않기를 배려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시는 마음을 가늠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철저하게 지키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우리를 향한 인자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나의 육신의 호기심, 욕심을 따르는 본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지키고자 절제하는 마음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3.그럼에도_하나님의 허락을 따라 더 나아감(19-20, 24절)
시내산 아래 경계선은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 누구라도 넘어서지 않도록 확실하게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땅바닥에 선을 긋지는 않았을터이고 시내산이 돌산이니 주변에 널린 돌덩이로 돌담을 쌓았을 수도 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함부러 이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해야 했기에 아마도 돌담이 가장 적절한 경계선이었을 것이다.
경계선(돌담)을 사이에 두고 누구도 돌담 너머 시내산 기슭과 광야가 나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돌담 경계선을 넘어서 시내산 기슭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산양 뿔)나팔소리가 길게 울려 퍼질 때였다(13절, 17절).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시내산 기슭까지는 들어설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안됐다. 하지만 모세와 아론은 좀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임의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20절)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산 꼭대기에 강림하셔서 모세를 음성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아론을 데리고 올라오라고 말씀하셨다(24절).
*성막의 구조와 시내산에서 백성들이 처음 하나님을 대면할 때 구분되는 구조가 비슷하다. 성전 뜰, 성소, 지성소로 구성된 성막은 산 기슭, 산(구름이 가득한), 산꼭대기로 구분된 것과 동일하다. 성전 뜰까지는 백성들의 출입이 가능했지만,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제사장들이 아니면 불가능했고, 지성소는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기에 구름이 가득한 산과 산 꼭대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신 모세와 아론만 올라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의 구조와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 경험케 하신 것이다.
또, 성막을 완성한 후 레위인들에게 외인들이 함부로 성막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게 하셨는데(민 3:10) 본문의 하나님의 배려와 동일하다. 무지, 부지중에 함부로 성막을 침입하여 목숨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된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을때의 심정을 “심히 두렵고 떨린다”(히 12:21)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히 12:25)”고 경고한다. 더 나아가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 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는 불이십니다(새번역_히 12:28-29)” 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됨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섬기지 않으면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불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마음대로 살면 된다고 착각하는 성도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이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설 때, 일말의 경외함도 없이 함부로 교만하게 행하는 이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내가 그들을 돌로 칠까” 걱정하신 대로 일어나는 심판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은혜를 예수님 때문에 받았다면 일상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자!
*주님, 오늘도 경건(성결)하고 경외함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경계를 교만하게 넘지 않겠습니다. 저의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그림:”시내산에 오른 모세/장 레옹 제롬/1900/프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