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20:18-26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들어갔다!
1-17절까지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큰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여 들려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그 음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시내산을 감싼 구름과 연기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나팔소리를 듣고 번개를 보며 “두려워 떨며, 멀찍이 물러났다 (새번역_18절).”
급기야 모세에게 말한다. “어른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죽습니다(새번역_19절).” 그렇게 두려워하며 떠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직접 말씀하여 주시는 이유를 밝힌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들을 시험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당신들이 주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새번역_20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훈련) 하시려고, 그들이 주님을 두려워 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타나셨다. 애굽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에 걸맞는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눈과 귀에, 심장과 피부에 각인 시키신다. 확실한 시청각 교육이 실감나게 이루어지니 오죽하면 “멀찍이” 더 물러 났을까?
*하나님께서 경계선을 넘어와 죽을까 걱정 하셨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경계선에서 더 물러난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위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지금 이 상태라면 어떤 명령이든 “옛썰!!”할 기세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순종을 일으키는 것이 확실하다. 거리가 멀어진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변질되지 않으면 된다. “간격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와 마음의 문제임을 깨닫는다.”
*한편 모세는 백성들의 요청대로 한껏 물러간 그들을 뒤로 하고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먹구름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나갔다(21절).” 모세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크고 두려운 떨림이 있었지만(히 12: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백성들을 잇기 위해 나아갔다. 지도자는 자기 영광과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 앞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사람이다. 그도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에 떨었겠지만, 백성들의 두려움이 평안이 되도록 희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모습들을 다 지켜 보고 계셨다(22절). 모세와 백성들의 행동을 한참 지켜 보신 후 가르침을 이어가신다. 이미 3-7절까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는 것을 다 보았”음으로(22절)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들은 이들은 하나님의 감동(가르침)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 가르침(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것이 곧 사는 것임을 직감한다. 그들에게 “보고, 듣고, 느끼게” 하신 것은 가르쳐 알게 한대로 살아내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규칙은 크게 세 가지이다.
1.신들의 상을 만들지 말라(23절)
3-7절까지 1-3계명의 하나님을 섬기는 첫 걸음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고대는 “자기를 위하여 온갖 종류의 신상들을 만들어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시대”였다. 그들이 어떤 장신구를 걸치고 있는 지만 보아도 그들이 섬기는 신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상징하는 신상조차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왜 일까?
고대의 세계관은 이름을 지어주고 부르는 행위나 신상을 깍아 만들어 지니는 행위를 통해 인간이 그 신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은 인간의 욕심을 해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부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철저히 나무나 쇠로 만든 우상 조각에 사람이 홀려 다녔지만….
이러한 세계관이 팽배한 사회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며 하나님을 상징하는 신상을 만든다는 것은 만든 이가 신상을 주장하듯, 하나님을 주장(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문화에 대하여 정면으로 저항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경험, 학식과 지식으로 조정되는 존재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이런 애굽의 우상 문화에 익숙한 백성들에게 그런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버리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내가 만들어서 내가 주관하는 신은 신이 아니다!
2.하나님의 이름이 기념되는 모든 곳에 임하여 복을 주리라(24절)
사람이 심리적인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우상 조각들은 없어도 하나님은 그를 섬기는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 그들의 삶을 돌보신다. 어떻게 돌보실까?
정해주신 방법대로 제단을 쌓고… 제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하게 하는 모든 곳에(내가 정하여 준 곳이면 어디든지) “내가 가서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새번역_24절).”
지금 시내산에 내려 오셔서 말씀하여 주신 것처럼,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모든 곳에 하나님(성령)께서 오셔서 복을 내려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아래 거하는 어느 곳에서 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내려 오신다.” 하나님께서 내려 오신 것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나큰 영광이며 감격과 감동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 자체 만으로 얼마든지 풍성한 그 은혜를 누리는 복 안에 거할 수 있다는 의미다.
3.흙으로 든, 돌로 든 너희의 정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방법대로(24, 25-26절)
하나님을 기념하는 번제나 화목제를 드릴 때는 흙으로 쌓든지, 돌로 쌓든지 제물을 바칠 제단을 만들어야 한다. 이때 특히 돌로 제단을 쌓을 때는 인간이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 계단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알몸이 드러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준으로 만든 제단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친 방법으로 나아오라는 명령이다. 특히,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고, 계단을 만들지 말라 등의 명령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장 정돈되고, 정갈하게 만들어 놓은 제단이 아니라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투박한 재료들을 어떤 가공도 하지 않고 사용하라고 하신 것이다.
*제단을 더 잘 만들기 위해 신경 쓰다가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제사)를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을 정으로 가공하는 시간에 들이는 정성보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흙으로 얼기설기 쌓아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제 멋대로의 제단에 드리는 제사여도 드리는 이의 마음과 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제단을 만드는데 들이는 정성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정성을 더 쏟으라는 것이다. 제단을 화려하게 온갖 가공물들을 만드는 정성보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 최선을 다한 예배를 요청하신 것이다.
*나의 방법, 정성은 눈에 보이는 것에 있다. 그것이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면 최고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단 조차 우상화 되지 않도록 각별하게 강조하신 것이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 하려는 심성이 있기에 조금의 가공이 들어가도 곧 우상이 되는 것이다.
나는?
*주님, 성도들의 두려움을 품고 구름(흑암) 속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가르침대로만 순종 하겠습니다. 나의 생각, 솜씨로 우상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1-17절까지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큰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여 들려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그 음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시내산을 감싼 구름과 연기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나팔소리를 듣고 번개를 보며 “두려워 떨며, 멀찍이 물러났다 (새번역_18절).”
급기야 모세에게 말한다. “어른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죽습니다(새번역_19절).” 그렇게 두려워하며 떠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직접 말씀하여 주시는 이유를 밝힌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들을 시험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당신들이 주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새번역_20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훈련) 하시려고, 그들이 주님을 두려워 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타나셨다. 애굽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에 걸맞는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눈과 귀에, 심장과 피부에 각인 시키신다. 확실한 시청각 교육이 실감나게 이루어지니 오죽하면 “멀찍이” 더 물러 났을까?
*하나님께서 경계선을 넘어와 죽을까 걱정 하셨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경계선에서 더 물러난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위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지금 이 상태라면 어떤 명령이든 “옛썰!!”할 기세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순종을 일으키는 것이 확실하다. 거리가 멀어진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변질되지 않으면 된다. “간격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와 마음의 문제임을 깨닫는다.”
*한편 모세는 백성들의 요청대로 한껏 물러간 그들을 뒤로 하고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먹구름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나갔다(21절).” 모세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크고 두려운 떨림이 있었지만(히 12: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백성들을 잇기 위해 나아갔다. 지도자는 자기 영광과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 앞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사람이다. 그도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에 떨었겠지만, 백성들의 두려움이 평안이 되도록 희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모습들을 다 지켜 보고 계셨다(22절). 모세와 백성들의 행동을 한참 지켜 보신 후 가르침을 이어가신다. 이미 3-7절까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는 것을 다 보았”음으로(22절)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들은 이들은 하나님의 감동(가르침)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 가르침(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것이 곧 사는 것임을 직감한다. 그들에게 “보고, 듣고, 느끼게” 하신 것은 가르쳐 알게 한대로 살아내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규칙은 크게 세 가지이다.
1.신들의 상을 만들지 말라(23절)
3-7절까지 1-3계명의 하나님을 섬기는 첫 걸음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고대는 “자기를 위하여 온갖 종류의 신상들을 만들어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시대”였다. 그들이 어떤 장신구를 걸치고 있는 지만 보아도 그들이 섬기는 신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상징하는 신상조차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왜 일까?
고대의 세계관은 이름을 지어주고 부르는 행위나 신상을 깍아 만들어 지니는 행위를 통해 인간이 그 신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은 인간의 욕심을 해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부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철저히 나무나 쇠로 만든 우상 조각에 사람이 홀려 다녔지만….
이러한 세계관이 팽배한 사회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며 하나님을 상징하는 신상을 만든다는 것은 만든 이가 신상을 주장하듯, 하나님을 주장(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문화에 대하여 정면으로 저항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경험, 학식과 지식으로 조정되는 존재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이런 애굽의 우상 문화에 익숙한 백성들에게 그런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버리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내가 만들어서 내가 주관하는 신은 신이 아니다!
2.하나님의 이름이 기념되는 모든 곳에 임하여 복을 주리라(24절)
사람이 심리적인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우상 조각들은 없어도 하나님은 그를 섬기는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 그들의 삶을 돌보신다. 어떻게 돌보실까?
정해주신 방법대로 제단을 쌓고… 제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하게 하는 모든 곳에(내가 정하여 준 곳이면 어디든지) “내가 가서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새번역_24절).”
지금 시내산에 내려 오셔서 말씀하여 주신 것처럼,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모든 곳에 하나님(성령)께서 오셔서 복을 내려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아래 거하는 어느 곳에서 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내려 오신다.” 하나님께서 내려 오신 것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나큰 영광이며 감격과 감동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 자체 만으로 얼마든지 풍성한 그 은혜를 누리는 복 안에 거할 수 있다는 의미다.
3.흙으로 든, 돌로 든 너희의 정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방법대로(24, 25-26절)
하나님을 기념하는 번제나 화목제를 드릴 때는 흙으로 쌓든지, 돌로 쌓든지 제물을 바칠 제단을 만들어야 한다. 이때 특히 돌로 제단을 쌓을 때는 인간이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 계단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알몸이 드러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준으로 만든 제단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친 방법으로 나아오라는 명령이다. 특히,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고, 계단을 만들지 말라 등의 명령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장 정돈되고, 정갈하게 만들어 놓은 제단이 아니라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투박한 재료들을 어떤 가공도 하지 않고 사용하라고 하신 것이다.
*제단을 더 잘 만들기 위해 신경 쓰다가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제사)를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을 정으로 가공하는 시간에 들이는 정성보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흙으로 얼기설기 쌓아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제 멋대로의 제단에 드리는 제사여도 드리는 이의 마음과 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제단을 만드는데 들이는 정성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정성을 더 쏟으라는 것이다. 제단을 화려하게 온갖 가공물들을 만드는 정성보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 최선을 다한 예배를 요청하신 것이다.
*나의 방법, 정성은 눈에 보이는 것에 있다. 그것이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면 최고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단 조차 우상화 되지 않도록 각별하게 강조하신 것이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 하려는 심성이 있기에 조금의 가공이 들어가도 곧 우상이 되는 것이다.
나는?
*주님, 성도들의 두려움을 품고 구름(흑암) 속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가르침대로만 순종 하겠습니다. 나의 생각, 솜씨로 우상을 만들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