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6:11-18 내 몸의 예수의 상처 자국
할례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교하며 편지를 마무리한다. 자신은 십자가에 이미 못박혔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가기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한다.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으로 늘 되뇌어지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사람은 어떤 이인지 생각해 본다.
바울은 다른 복음의 핵심인 “할례”의 흔적을 단지 “육체의 모양(12절)”으로 표현한다. “할례”라는 형식과 외적인 것에 더 신경을 쓰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 주로 강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율법의 형식과 제도를 강조하고 강요하는 그들은 정작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 이었다(13절). 그러면서도 할례를 강요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임을 강조했다. 거짓 교사들은 이미 할례를 받은 이들이었지만, 실제로 율법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다. 그들은 “위선자”였다. 이런 모습을 바울은 그들이 할례를 받은 것 자체만을 자신들의 자랑거리로 삼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감당해야 할 십자가로 인한 핍박(믿음으로 살아내려는 댓가지불)은 회피하려는 것으로 이용한다고 지적했다.
바울은 그들과 달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음”을 천명한다(14절).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이 고백을 이후 빌립보서와 고린도 전서를 통해 더욱 더 확고하게 선언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그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 하므로 주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을 받더라도 그리스도를 꼭 얻어야 함(붙들어야 함_빌 3:8)”을 고백하고 또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비록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될지라도(고전 4:9-13) 그 모진 수모와 핍박을 견디며 “바른 복음”을 사수 했노라고 고백한다. 말로만의 고백이 아니라 온 몸으로 고백의 댓가를 치루는데 회피하지 않은 것이다.
바른 복음을 위해 기꺼이 받아 들였던 수모와 핍박으로 인해 바울의 몸은 고난의 상처(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e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e 예수를 위하여 받은 박해로 생긴 상처 자국을 뜻함)(새번역_17절)”
바울은 훗날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고난의 흔적을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했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 과정에서 바울의 몸에 남은 흔적들이 “예수의 상처 자국(흔적)”이다.
*예수님을 위해 오롯이 살아온 상처 자국의 몸은 단지 “육체의 흔적(할례)”만을 가지고 율법을 준수 하지도 않으면서 교회를 혼란 스럽게 하는 위선적인 이들이 낯부끄러워 해야 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그들은 예수의 흔적을 가진 이가 전하는 바른 복음을 조롱하며 다른 복음을 강요했다. 다른 복음이 바른 복음을 가려 버렸다.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 히브리어는 “네쿠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상처 입은 피부가 치유 되면서 자연스럽게 피부에 남게 되는 자국(흔적)”을 의미한다. 특히 바울 당시의 시대에 “노예”들의 몸에 주인이 찍는 특별한 문양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이든지 바울은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이 흔적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특히 그가 5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자신도 못박혀 죽었음을” 고백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남겨진 흔적은 바로 “자신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죽었음”이 담겨져 있음을 나타낸다.
*과거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던 자신은 없다. 유대인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제 예수님의 흔적만 남아 있다. 과거의 자신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만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
*또 예수님께 매인 종으로서 자신의 생명이나 권리로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믿음으로 사는 삶임을 드러내는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을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흔적을 가진 구원의 백성인가? 그 백성이라면 나의 삶의 걸음에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복음의 구원안에 있기 위해 기꺼이 자청하여 감내한 고통과 댓가지불의 흔적이 나에게 호소하고 있을까?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인 되심이 새겨진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할 터인데…
-나의 욕심의 흔적, 욕망의 흔적으로 채워지는 구원의 삶이라면, 육체의 모양만 가지고 율법을 준수 하지도 않으며 형식만 강요했던 거짓 교사들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묵상 하면서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절)”라는 부분을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갈라디아서의 모든 내용을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일 수도 있겠고, 본문 가운데서 어떤 부분을 ‘큰 글자’로 쓴 것일 수도 있겠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자면 모든 내용을 큰 글자로 기록했다기 보다 어떤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큰 글자’를 썼을 듯 한데… 그렇다면 어떤 부분일까? 내가 바울이라면 어느 부분을 ‘큰 글자’로 기록해서 강조하며 읽도록 했을까?
-단연코 “예수의 상처 자국(흔적_스티그마)”이 아닐까 싶다! 우리를 구원의 은혜 안에 거하도록 구해 주신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굳게 지키기 위해 온 몸으로 온갖 수모와 고난을 어떻게 감내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거짓 교사들은 그저 “육체의 모양(할례)”만 있으면 이런 수모와 고난은 맞이 할 필요도 없으니 “예수의 상처 자국(흔적)”이 얼마나 비교 되겠는가!
-할례만 받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은혜안에 거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고통과 고난들이 불필요한(?) 것이 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육신적으로는 편리 하겠지만, 십자가의 은혜 아니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을 것을 확신하는 바울에게는 상처가 남더라도 꿋꿋이 “바른 복음”을 전한 것을 자랑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자랑은 자신의 육체의 모양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큰 글자”로 자신의 몸에 남겨진 “예수의 상처 자국(흔적)”을 기록하며, 갈라디아 성도들도 “예수의 상처 자국”을 남기는 삶이 되기를 강조 했을 것이다!
-바울의 “큰 글자”에 담긴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마음의 진정성과 사랑이 이해가 된다. 이렇게라도 십자가의 바른 복음을 강조하고 지키려는 그의 마음을 꼭 본받으리라!!
-나도 ‘큰 글자’를 꾹꾹 눌러 쓸 수 있는 길을 걸어야 겠다!
-꾹꾹 눌러 쓴 ‘큰 글자’에 담긴 바울의 진정성과 사랑을 본받아야지!
*주님, 예수님의 흔적이 나의 자랑, 나의 복음이 되게 살겠습니다.
*주님, 나의 이름을 높이고자 발버둥 치며 나의 흔적을 남기고자 어리석은 길을 걷지 않겠습니다.
*주님, 큰 글자를 꾹꾹 눌러 쓸 수 있는 순전한 마음을 잃지 않겠습니다!
할례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교하며 편지를 마무리한다. 자신은 십자가에 이미 못박혔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가기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한다.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으로 늘 되뇌어지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사람은 어떤 이인지 생각해 본다.
바울은 다른 복음의 핵심인 “할례”의 흔적을 단지 “육체의 모양(12절)”으로 표현한다. “할례”라는 형식과 외적인 것에 더 신경을 쓰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 주로 강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율법의 형식과 제도를 강조하고 강요하는 그들은 정작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 이었다(13절). 그러면서도 할례를 강요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임을 강조했다. 거짓 교사들은 이미 할례를 받은 이들이었지만, 실제로 율법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다. 그들은 “위선자”였다. 이런 모습을 바울은 그들이 할례를 받은 것 자체만을 자신들의 자랑거리로 삼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감당해야 할 십자가로 인한 핍박(믿음으로 살아내려는 댓가지불)은 회피하려는 것으로 이용한다고 지적했다.
바울은 그들과 달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음”을 천명한다(14절).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이 고백을 이후 빌립보서와 고린도 전서를 통해 더욱 더 확고하게 선언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그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 하므로 주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을 받더라도 그리스도를 꼭 얻어야 함(붙들어야 함_빌 3:8)”을 고백하고 또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비록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될지라도(고전 4:9-13) 그 모진 수모와 핍박을 견디며 “바른 복음”을 사수 했노라고 고백한다. 말로만의 고백이 아니라 온 몸으로 고백의 댓가를 치루는데 회피하지 않은 것이다.
바른 복음을 위해 기꺼이 받아 들였던 수모와 핍박으로 인해 바울의 몸은 고난의 상처(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e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e 예수를 위하여 받은 박해로 생긴 상처 자국을 뜻함)(새번역_17절)”
바울은 훗날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고난의 흔적을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했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 과정에서 바울의 몸에 남은 흔적들이 “예수의 상처 자국(흔적)”이다.
*예수님을 위해 오롯이 살아온 상처 자국의 몸은 단지 “육체의 흔적(할례)”만을 가지고 율법을 준수 하지도 않으면서 교회를 혼란 스럽게 하는 위선적인 이들이 낯부끄러워 해야 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그들은 예수의 흔적을 가진 이가 전하는 바른 복음을 조롱하며 다른 복음을 강요했다. 다른 복음이 바른 복음을 가려 버렸다.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 히브리어는 “네쿠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상처 입은 피부가 치유 되면서 자연스럽게 피부에 남게 되는 자국(흔적)”을 의미한다. 특히 바울 당시의 시대에 “노예”들의 몸에 주인이 찍는 특별한 문양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이든지 바울은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이 흔적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특히 그가 5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자신도 못박혀 죽었음을” 고백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남겨진 흔적은 바로 “자신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죽었음”이 담겨져 있음을 나타낸다.
*과거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던 자신은 없다. 유대인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제 예수님의 흔적만 남아 있다. 과거의 자신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만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
*또 예수님께 매인 종으로서 자신의 생명이나 권리로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믿음으로 사는 삶임을 드러내는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을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흔적을 가진 구원의 백성인가? 그 백성이라면 나의 삶의 걸음에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복음의 구원안에 있기 위해 기꺼이 자청하여 감내한 고통과 댓가지불의 흔적이 나에게 호소하고 있을까?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인 되심이 새겨진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할 터인데…
-나의 욕심의 흔적, 욕망의 흔적으로 채워지는 구원의 삶이라면, 육체의 모양만 가지고 율법을 준수 하지도 않으며 형식만 강요했던 거짓 교사들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묵상 하면서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절)”라는 부분을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갈라디아서의 모든 내용을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일 수도 있겠고, 본문 가운데서 어떤 부분을 ‘큰 글자’로 쓴 것일 수도 있겠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자면 모든 내용을 큰 글자로 기록했다기 보다 어떤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큰 글자’를 썼을 듯 한데… 그렇다면 어떤 부분일까? 내가 바울이라면 어느 부분을 ‘큰 글자’로 기록해서 강조하며 읽도록 했을까?
-단연코 “예수의 상처 자국(흔적_스티그마)”이 아닐까 싶다! 우리를 구원의 은혜 안에 거하도록 구해 주신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굳게 지키기 위해 온 몸으로 온갖 수모와 고난을 어떻게 감내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거짓 교사들은 그저 “육체의 모양(할례)”만 있으면 이런 수모와 고난은 맞이 할 필요도 없으니 “예수의 상처 자국(흔적)”이 얼마나 비교 되겠는가!
-할례만 받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은혜안에 거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고통과 고난들이 불필요한(?) 것이 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육신적으로는 편리 하겠지만, 십자가의 은혜 아니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을 것을 확신하는 바울에게는 상처가 남더라도 꿋꿋이 “바른 복음”을 전한 것을 자랑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자랑은 자신의 육체의 모양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큰 글자”로 자신의 몸에 남겨진 “예수의 상처 자국(흔적)”을 기록하며, 갈라디아 성도들도 “예수의 상처 자국”을 남기는 삶이 되기를 강조 했을 것이다!
-바울의 “큰 글자”에 담긴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마음의 진정성과 사랑이 이해가 된다. 이렇게라도 십자가의 바른 복음을 강조하고 지키려는 그의 마음을 꼭 본받으리라!!
-나도 ‘큰 글자’를 꾹꾹 눌러 쓸 수 있는 길을 걸어야 겠다!
-꾹꾹 눌러 쓴 ‘큰 글자’에 담긴 바울의 진정성과 사랑을 본받아야지!
*주님, 예수님의 흔적이 나의 자랑, 나의 복음이 되게 살겠습니다.
*주님, 나의 이름을 높이고자 발버둥 치며 나의 흔적을 남기고자 어리석은 길을 걷지 않겠습니다.
*주님, 큰 글자를 꾹꾹 눌러 쓸 수 있는 순전한 마음을 잃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