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3:10-18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
바울은 아브라함이 그런 것 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사는 것을 확고히 선언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에 따라 살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설명을 이어간다.
#.율법으로 산다고? 천만에! 오히려!(10-18절)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 하였습니다.(신 27:26)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합 2:4)_(새번역_10-11절)”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항상, 그리고 모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강조한다. 율법의 요구는 역설적이게도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됨을 얻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율법 아래 사는 것이 저주다. 그래서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외침을 겸허하게 다시 반복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은 철저히 그 믿음으로 산다.
바울이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할 때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신 21:23)”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저주 받은 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자청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13절)” 그리고 오히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14절)” 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 때문에 받은 저주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지금 이 세대 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게 이어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새번역_17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의 행위에 억압된 저주가 아니다. 믿음으로 누리는 죄(저주)에서의 자유함 이다. 다시는 율법의 저주에 놓이지 않게 하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사람간의 약속이 정해진 다음 이후에 더해지거나 폐할 수 없는 것처럼(15, 1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은 430년 후 주어진 율법에 의해 결코 폐하여 질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먼저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약속(언약)을 통해 그에게 유업을 주셨기 때문에 결코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니다(18절)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전한 이 놀라운 성경 해석을 곰곰히 생각하고 있으면 그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 감탄할 뿐이다. 당시 어느 누구도 이방인의 구원에 대하여 이처럼 목숨걸고 전하고 변호하는 이가 있었을까? 유대인 외에 하나님을 믿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시대의 이방인들(헬라인들)에게 목숨걸고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고 고난 받음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베드로은 유대인을 위한 사도로, 자신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확신했다. 실제로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성취한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 이라는 확고한 신학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를 전하고 가르치는 그의 열정이 직면하는 오랫동안 다져진 유대주의의 장벽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자신의 성경해석에 삶의 열정을 바친다.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면서 도전이 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14절)” 초대교회가 막 시작되는 시기에 이방인의 구원을 강력하게 전파하는 그의 모습이 특별하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 은혜와 감동을 전하는 것은 감격속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이를 더욱 내밀하고 치밀하게 변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무조건 감정적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했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구약성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치열하게 해석하고 연결해야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 모두에게 변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중요한 일을 ‘사명’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당시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특별하고 생소한 것이었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 그때는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으로만 특정하고 이를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 “위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유명한 어느 광고 문구처럼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홀로 “아니오”를 외친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인가?” 정통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그렇다 라고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오히려 더욱 이 맹신에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자들을 잡아죽이러 다녔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버렸다.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던 구약성경의 해석들이 원저자의 가르침에 무너져 내렸고 그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안디옥에서 공식적으로 바나바와 사역을 하기 전까지 10여년 동안 그는 치열하게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성경 안에서 그 해답들을 찾아 냈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과 과정 속에 성령께서 함께 해주셨다.
*지금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 되었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해서 강조하고 알려 주는 것도 사실은 이미 그들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쳤던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 속에 깃들어져 있었다. 그러니 거짓 교사들의 다른 복음에 유혹을 받는 상황에서 그저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 아니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체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특정 그룹의 특혜를 강조하는 성경 해석은 왜곡된 해석과 신학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만약 그 왜곡된 신학이 무수한 시간으로 다져져 단단하게 다져져 있다면…이에 맞서는 용기가 대단하고 대단한 것이다.
*나는 어떨까? 한국교회안에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관습이나 성경해석에 대하여 “질문 던지는” 용기가 있을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른 의미를 찾아 내기 위해 “용기있는 해석”을 주저하지 않고 있는가?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과 유대주의자들, 교회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용기있는 “질문과 해석”을 나는 나에게 맡겨주신 공동체에게 과연 바울처럼 용기있게 펼칠 수 있을까?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왜?와 어떻게?를 치열하게 던지고 대답해 줄 수 있는 목사일까?
나는?
*주님, 제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보다 왜? 라고 질문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주님, 제게 단지 용기에서 멈추지 않고 바른 하나님 나라 복음을 치열하게 설명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주십시오.
바울은 아브라함이 그런 것 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사는 것을 확고히 선언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에 따라 살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설명을 이어간다.
#.율법으로 산다고? 천만에! 오히려!(10-18절)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 하였습니다.(신 27:26)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합 2:4)_(새번역_10-11절)”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항상, 그리고 모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강조한다. 율법의 요구는 역설적이게도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됨을 얻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율법 아래 사는 것이 저주다. 그래서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외침을 겸허하게 다시 반복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은 철저히 그 믿음으로 산다.
바울이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할 때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신 21:23)”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저주 받은 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자청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13절)” 그리고 오히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14절)” 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 때문에 받은 저주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지금 이 세대 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게 이어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새번역_17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의 행위에 억압된 저주가 아니다. 믿음으로 누리는 죄(저주)에서의 자유함 이다. 다시는 율법의 저주에 놓이지 않게 하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사람간의 약속이 정해진 다음 이후에 더해지거나 폐할 수 없는 것처럼(15, 1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은 430년 후 주어진 율법에 의해 결코 폐하여 질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먼저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약속(언약)을 통해 그에게 유업을 주셨기 때문에 결코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니다(18절)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전한 이 놀라운 성경 해석을 곰곰히 생각하고 있으면 그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 감탄할 뿐이다. 당시 어느 누구도 이방인의 구원에 대하여 이처럼 목숨걸고 전하고 변호하는 이가 있었을까? 유대인 외에 하나님을 믿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시대의 이방인들(헬라인들)에게 목숨걸고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고 고난 받음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베드로은 유대인을 위한 사도로, 자신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확신했다. 실제로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성취한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 이라는 확고한 신학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를 전하고 가르치는 그의 열정이 직면하는 오랫동안 다져진 유대주의의 장벽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자신의 성경해석에 삶의 열정을 바친다.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면서 도전이 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14절)” 초대교회가 막 시작되는 시기에 이방인의 구원을 강력하게 전파하는 그의 모습이 특별하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 은혜와 감동을 전하는 것은 감격속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이를 더욱 내밀하고 치밀하게 변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무조건 감정적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했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구약성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치열하게 해석하고 연결해야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 모두에게 변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중요한 일을 ‘사명’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당시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특별하고 생소한 것이었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 그때는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으로만 특정하고 이를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 “위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유명한 어느 광고 문구처럼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홀로 “아니오”를 외친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인가?” 정통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그렇다 라고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오히려 더욱 이 맹신에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자들을 잡아죽이러 다녔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버렸다.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던 구약성경의 해석들이 원저자의 가르침에 무너져 내렸고 그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안디옥에서 공식적으로 바나바와 사역을 하기 전까지 10여년 동안 그는 치열하게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성경 안에서 그 해답들을 찾아 냈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과 과정 속에 성령께서 함께 해주셨다.
*지금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 되었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해서 강조하고 알려 주는 것도 사실은 이미 그들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쳤던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 속에 깃들어져 있었다. 그러니 거짓 교사들의 다른 복음에 유혹을 받는 상황에서 그저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 아니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체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특정 그룹의 특혜를 강조하는 성경 해석은 왜곡된 해석과 신학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만약 그 왜곡된 신학이 무수한 시간으로 다져져 단단하게 다져져 있다면…이에 맞서는 용기가 대단하고 대단한 것이다.
*나는 어떨까? 한국교회안에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관습이나 성경해석에 대하여 “질문 던지는” 용기가 있을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른 의미를 찾아 내기 위해 “용기있는 해석”을 주저하지 않고 있는가?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과 유대주의자들, 교회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용기있는 “질문과 해석”을 나는 나에게 맡겨주신 공동체에게 과연 바울처럼 용기있게 펼칠 수 있을까?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왜?와 어떻게?를 치열하게 던지고 대답해 줄 수 있는 목사일까?
나는?
*주님, 제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보다 왜? 라고 질문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주님, 제게 단지 용기에서 멈추지 않고 바른 하나님 나라 복음을 치열하게 설명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