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3:1-9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하지 못한다
베드로와 바나바에게 단호한 모습으로 ‘찐 복음’을 지켜낸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다른 복음’에 영향을 받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호소한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완전성을 강조하면서 “거짓 교사’들이 호리는 말에 흔들리는 것을 “어리석다” 일갈 하며 “찐 복음”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갈리디아 성도들이 자신이 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의미를 분명히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분노했다. 하지만 분노에서만 그치지 않고 그들이 다시 “찐 복음”의 은혜 안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분명한 메세지를 이어간다.
2장부터 이어온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님 때문인 것에 대해 논증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 때문인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인지를 생각해 보라 한다(1-5절). 그리고 이것이 왜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인지에 대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6-7절),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8-9절) 분명하게 밝힌다.
1.어리석다! 생각해 보라!(1-5절)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은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과 구별해야 한다. 본문의 의미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구원 받음)을 얻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의롭다 함을 얻음이 믿음에 의해서 라고 하는데, “믿음”은 ‘믿음의 법”, 혹은 “예수님의 신실함”을 믿는 것 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믿음의 법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크게 세 가지로 표현한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믿음’, ‘우리가 예수님의 그 신실한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을 믿는 믿음’이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신실한 믿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구속(속량)하시기 위해 행하신 모든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심을 “예수 사건”이라고 칭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감당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약속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셨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것을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예수 사건, 예수님의 신실함(믿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뜻과 약속을 믿고 온전히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믿음을 본 받아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예수사건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성령을 받은 것(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을 받은 것(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어떻게 율법의 행위(할례, 안식일 준수, 정결법의 시행 등)로 얻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는 거다.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를 수 없음이 증명 되었음에도 또다시 율법 타령이라니… 이런 기막힌 무지와 무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새번역_1절)”
더구나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그들의 눈 앞에 선하게 보여지고 있음에도” ‘다른 복음’에 “홀려버렸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선하게(밝히) 보인다는 것은 성령께서 그만큼 예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사건들을 받아들이고 느끼게 해주셔서 이를 믿었다는 의미이다.
그런 믿음이 있음에도 “홀려 버렸다”… 그만큼 인간의 지독한 교만성은 수비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뭐라도 해야 한다. 내가 이 정도는 해 주어야지…”식의 공로의식은 구원의 문제에서 하등의 영향을 끼칠 수 없음에도 사탄은 여전히 “나의 힘도 조금 보탰어”식의 교만한 생각을 주입시켜 예수님의 완전한 구원을 폄훼 시킨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을 하셨지만, 나도 이 정도는 했어!” 라고 말이다. 바울은 이것을 “어리석다(1,3절)”고 2번이나 부르짖으며 안타까워 한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구원)에 있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 그것을 결정하거나 보완하거나 완성하게 하는 일말의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홀로, 온전히,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셨다. 구원은 이것을 믿으면 얻는다.
*나도 가끔 “홀릴 때”가 있다. 그래도 내가 이 정도는 되지 않나? 그래서 이렇게 이룬 것 아닌가? 라고 말이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이 정도는 해 주어야 구원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연약해 질 때 언제든 다시 재발했다.
*이런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으면, 늘 구원의 확신이 흔들린다. 많은 성도들의 공통점은 “내가 이렇게 믿으면 과연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고민한다. 철저하게 “행위”를 전제로 한 구원관이다. 아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고민으로 방황 하는 것이다. 관점을 미세조정만 하면 구원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이루셨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라는 믿음을 잊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구원의 삶을 사는 이는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고민을 성령께서 던지시고 그 고민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내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내는 길은 감동과 성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좌절과 실망도 있다.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크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렇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의 은혜를 통해 “다시 힘을 내어” 구원받은 삶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우신다.
*그런데 이렇게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을 나의 행위의 보답으로 온전하게 받을 수 있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를 영웅시 하게 하려는 유혹”일 뿐이다.
*나는 여전히 이 유혹에 “홀리려고” 흔들린다. 내가 묵상을 꾸준히 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 앞에서 내가 중심이 되려하는 마음에 “홀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오히려 여전히 내 마음의 눈 앞에 나의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님의 모습”이 살아있기를 원한다. 알량한 자만심, 자기 자랑에 취해 있는 어리석은 모습이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늘 말씀을 묵상하는 자리에서 되뇌인다. 어리석다! 생각해 보라!
2.갑자기 아브라함?(6-7절)
바울이 갑자기 아브라함의 예를 든다. 거짓 교사들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 혈통이며 언약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으로 무장되어 예수님의 찐 복음외에 다른 것(율법의 행위)를 더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철저하게 반박하는 것이다. 5절에서 6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5.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6.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새번역_5-6절)”
거짓교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사람이었다. 그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은혜”로 부르셨다. 이것 자체가 “복음”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음이나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전한 “바른 복음”이 “다른 복음”이 아니었다. 동일한 복음이었다.
한마디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부른 것이나 오늘날 우리를 부른 것은 모두 하나님을 찾지 않던 인간을 하나님이 택하셔서 부르셔서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의 백성 되게 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창 12장에서 부름받아 15장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가 하나님의 백성 되었음(의롭다 여김을 받음)은 “그가 여호와를 믿음으로(창 15:6)” 얻은 것이다.
*행위로 의로움을 흉내 낼 수 있어도 지속할 수는 없다. 인간은 죄에 대해 철저히 무력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죄에 무력하여 죽음으로 치닫는 인생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믿음(성령)”을 주셔서 그 믿음으로 죄에 대하여 싸우게 하신다.
3.그러므로(8-9절)
그렇게 아브라함이나 바울이나 갈라디아 성도들이나 우리나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복이다. 이 복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마땅히 알게되고 얻는 복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은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누그든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를 “하나님의 자녀, 백성” 되게 하여 주신 복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백성으로 이 복을 누리고, 이 복을 전하는 통로로 살아내야 한다. 흘려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믿음으로 사는 이는 아브라함과 함께 이 복을 누린다.
“8. 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c”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c 창 12:3; 18:18; 22:18)
9.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새번역_8-9절)”
나는?
-“개구리가 올챙이적 시절을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다. 유대인들이 딱 그렇다. 거짓 교사들이 그렇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르게 되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았고 가나안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을 잊어 버렸다.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린 그들은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어떨까? 성경의 가르침을 망각한 채 지금 나의 상황과 지식, 경험과 목적에 함몰되어 “다른 말씀”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가르치지는 않을까?
-이런 유혹은 말씀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의식하지 못한 채 종종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늘상 들어왔던 것이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과정에서 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깨달을 때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도 예전에 작성해 놓았던 설교문을 읽을때면 찢어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러니 말씀앞에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하고, 간절히 성령의 깨우침을 사모해야 하는지 모른다. “다른 복음”이 아니라 “바른 복음”이어야 하기에…”다른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이 되어야 하기에…
-또 묵상 중에 “꾀임(홀림)”에 넘어가는 “어리석음”이 나에게도 있음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팔랑귀다. 아내가 늘 그랬다… 사람 말을 너무 잘 믿는단다. 홈쇼핑 광고 보면 안된다고 했다… 나는 팔랑귀다. 헌데, 말씀에 대하여 팔랑귀여야지, 다른 복음에 대하여 팔랑귀여서는 안되는데, 가끔 나는 “다른 말씀, 다른 복음”에 팔랑귀가 될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고 돌이키도록 도와 주셨다. 그래서 여전히 “그 말씀, 바른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예수님을 밝히 바라보며 팔랑귀의 꾐의 소리를 분별해야지… 그 말씀에 늘 집중하여 다른 말씀을 걸러내야지…
*주님, 예수님의 복음, 그 말씀만 전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저는 늘 올챙이일때를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팔랑귀가 되지 않도록 “그 말씀”이 더욱 선명하고 밝히 들리게 도와 주십시오!
베드로와 바나바에게 단호한 모습으로 ‘찐 복음’을 지켜낸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다른 복음’에 영향을 받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호소한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완전성을 강조하면서 “거짓 교사’들이 호리는 말에 흔들리는 것을 “어리석다” 일갈 하며 “찐 복음”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갈리디아 성도들이 자신이 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의미를 분명히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분노했다. 하지만 분노에서만 그치지 않고 그들이 다시 “찐 복음”의 은혜 안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분명한 메세지를 이어간다.
2장부터 이어온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님 때문인 것에 대해 논증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 때문인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인지를 생각해 보라 한다(1-5절). 그리고 이것이 왜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인지에 대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6-7절),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8-9절) 분명하게 밝힌다.
1.어리석다! 생각해 보라!(1-5절)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은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과 구별해야 한다. 본문의 의미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구원 받음)을 얻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의롭다 함을 얻음이 믿음에 의해서 라고 하는데, “믿음”은 ‘믿음의 법”, 혹은 “예수님의 신실함”을 믿는 것 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믿음의 법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크게 세 가지로 표현한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믿음’, ‘우리가 예수님의 그 신실한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을 믿는 믿음’이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신실한 믿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구속(속량)하시기 위해 행하신 모든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심을 “예수 사건”이라고 칭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감당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약속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셨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것을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예수 사건, 예수님의 신실함(믿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뜻과 약속을 믿고 온전히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믿음을 본 받아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예수사건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성령을 받은 것(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을 받은 것(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어떻게 율법의 행위(할례, 안식일 준수, 정결법의 시행 등)로 얻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는 거다.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를 수 없음이 증명 되었음에도 또다시 율법 타령이라니… 이런 기막힌 무지와 무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새번역_1절)”
더구나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그들의 눈 앞에 선하게 보여지고 있음에도” ‘다른 복음’에 “홀려버렸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선하게(밝히) 보인다는 것은 성령께서 그만큼 예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사건들을 받아들이고 느끼게 해주셔서 이를 믿었다는 의미이다.
그런 믿음이 있음에도 “홀려 버렸다”… 그만큼 인간의 지독한 교만성은 수비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뭐라도 해야 한다. 내가 이 정도는 해 주어야지…”식의 공로의식은 구원의 문제에서 하등의 영향을 끼칠 수 없음에도 사탄은 여전히 “나의 힘도 조금 보탰어”식의 교만한 생각을 주입시켜 예수님의 완전한 구원을 폄훼 시킨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을 하셨지만, 나도 이 정도는 했어!” 라고 말이다. 바울은 이것을 “어리석다(1,3절)”고 2번이나 부르짖으며 안타까워 한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구원)에 있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 그것을 결정하거나 보완하거나 완성하게 하는 일말의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홀로, 온전히,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셨다. 구원은 이것을 믿으면 얻는다.
*나도 가끔 “홀릴 때”가 있다. 그래도 내가 이 정도는 되지 않나? 그래서 이렇게 이룬 것 아닌가? 라고 말이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이 정도는 해 주어야 구원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연약해 질 때 언제든 다시 재발했다.
*이런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으면, 늘 구원의 확신이 흔들린다. 많은 성도들의 공통점은 “내가 이렇게 믿으면 과연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고민한다. 철저하게 “행위”를 전제로 한 구원관이다. 아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고민으로 방황 하는 것이다. 관점을 미세조정만 하면 구원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이루셨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라는 믿음을 잊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구원의 삶을 사는 이는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고민을 성령께서 던지시고 그 고민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내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내는 길은 감동과 성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좌절과 실망도 있다.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크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렇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의 은혜를 통해 “다시 힘을 내어” 구원받은 삶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우신다.
*그런데 이렇게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을 나의 행위의 보답으로 온전하게 받을 수 있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를 영웅시 하게 하려는 유혹”일 뿐이다.
*나는 여전히 이 유혹에 “홀리려고” 흔들린다. 내가 묵상을 꾸준히 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 앞에서 내가 중심이 되려하는 마음에 “홀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오히려 여전히 내 마음의 눈 앞에 나의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님의 모습”이 살아있기를 원한다. 알량한 자만심, 자기 자랑에 취해 있는 어리석은 모습이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늘 말씀을 묵상하는 자리에서 되뇌인다. 어리석다! 생각해 보라!
2.갑자기 아브라함?(6-7절)
바울이 갑자기 아브라함의 예를 든다. 거짓 교사들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 혈통이며 언약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으로 무장되어 예수님의 찐 복음외에 다른 것(율법의 행위)를 더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철저하게 반박하는 것이다. 5절에서 6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5.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6.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새번역_5-6절)”
거짓교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사람이었다. 그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은혜”로 부르셨다. 이것 자체가 “복음”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음이나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전한 “바른 복음”이 “다른 복음”이 아니었다. 동일한 복음이었다.
한마디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부른 것이나 오늘날 우리를 부른 것은 모두 하나님을 찾지 않던 인간을 하나님이 택하셔서 부르셔서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의 백성 되게 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창 12장에서 부름받아 15장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가 하나님의 백성 되었음(의롭다 여김을 받음)은 “그가 여호와를 믿음으로(창 15:6)” 얻은 것이다.
*행위로 의로움을 흉내 낼 수 있어도 지속할 수는 없다. 인간은 죄에 대해 철저히 무력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죄에 무력하여 죽음으로 치닫는 인생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믿음(성령)”을 주셔서 그 믿음으로 죄에 대하여 싸우게 하신다.
3.그러므로(8-9절)
그렇게 아브라함이나 바울이나 갈라디아 성도들이나 우리나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복이다. 이 복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마땅히 알게되고 얻는 복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은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누그든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를 “하나님의 자녀, 백성” 되게 하여 주신 복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백성으로 이 복을 누리고, 이 복을 전하는 통로로 살아내야 한다. 흘려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믿음으로 사는 이는 아브라함과 함께 이 복을 누린다.
“8. 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c”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c 창 12:3; 18:18; 22:18)
9.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새번역_8-9절)”
나는?
-“개구리가 올챙이적 시절을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다. 유대인들이 딱 그렇다. 거짓 교사들이 그렇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르게 되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았고 가나안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을 잊어 버렸다.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린 그들은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어떨까? 성경의 가르침을 망각한 채 지금 나의 상황과 지식, 경험과 목적에 함몰되어 “다른 말씀”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가르치지는 않을까?
-이런 유혹은 말씀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의식하지 못한 채 종종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늘상 들어왔던 것이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과정에서 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깨달을 때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도 예전에 작성해 놓았던 설교문을 읽을때면 찢어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러니 말씀앞에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하고, 간절히 성령의 깨우침을 사모해야 하는지 모른다. “다른 복음”이 아니라 “바른 복음”이어야 하기에…”다른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이 되어야 하기에…
-또 묵상 중에 “꾀임(홀림)”에 넘어가는 “어리석음”이 나에게도 있음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팔랑귀다. 아내가 늘 그랬다… 사람 말을 너무 잘 믿는단다. 홈쇼핑 광고 보면 안된다고 했다… 나는 팔랑귀다. 헌데, 말씀에 대하여 팔랑귀여야지, 다른 복음에 대하여 팔랑귀여서는 안되는데, 가끔 나는 “다른 말씀, 다른 복음”에 팔랑귀가 될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고 돌이키도록 도와 주셨다. 그래서 여전히 “그 말씀, 바른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예수님을 밝히 바라보며 팔랑귀의 꾐의 소리를 분별해야지… 그 말씀에 늘 집중하여 다른 말씀을 걸러내야지…
*주님, 예수님의 복음, 그 말씀만 전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저는 늘 올챙이일때를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팔랑귀가 되지 않도록 “그 말씀”이 더욱 선명하고 밝히 들리게 도와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