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새로운 삶에 대한 또 다른 권면이 이어진다. 큰 틀에서 악을 미워하는 것과 선에 속한 사랑의 삶에 대해 권면한다. 형제에 대한 거짓없는 사랑(9-10절), 열심(11-13절), 박해하는 자를 축복함(14절), 동료 신자와 겸손히 함께 할 것(15-16절), 악에 대한 자세를(17-21절) 다룬다. 신자의 삶은 대부분 관계에 근거한다.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와 수평적인 성도와의 관계, 세상 속에서 만나게 될 여러 관계들이다. 신자가 바르게 산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수직적인 혹은 수평적인 관계에 충실한 것으로 국한할 수는 없다. 관계를 맺고 살 수 밖에 없는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바른 가르침을 통해 합당한 모습을 만들어 가야 하리라.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의 핵심은 “사랑”이다. 공동체(그리스도의 몸)안에서 실천해야 할 사랑의 명령과(9-13절) 로마의 박해와 냉대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사랑의 실천(14-21절)으로도 단락을 구분할 수 있겠다.
1.공동체(그리스도의 몸)안에서의 사랑 실천(9-13절)
“사랑에는 거짓이 없게 하라”는 주제를 던진다(9절). 이후 13절까지 거짓 없는 사랑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준다. 먼저 성도간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아가페”를 사용했다. 아가페는 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간의 사랑도 ‘아가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동일한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게 된다”는 메세지를 전한다.
형제 사랑과(10절_필라델피아) 뒤이어 등장하는 우애는(필로스톨고이_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을 지칭) 둘 다 가족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신앙 공동체 지체들에게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하나의 새로운 가족으로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다양한 인종과 사회구성원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향한 존경(9절)”도 필요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11절 상)”의 번역은 “열의를 가지고 망설이지 말고”를 의미한다. “(열심을) 품고”로 번역된 “프뉴마”를 성령으로 번역한다면, “성령으로 혹은 성령을 따라 열심을 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열정적인 사랑의 실천은 성령을 쫓아 주를 섬길 때 가능하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내서 해야 할 것은 “성령 안에서 뜨거운 것, 주를 섬기는 것, 소망으로 즐거워 하는 것, 환난에 대해 참는 것, 기도를 계속 하는 것, 성도의 필요에 동참하는 것, 환대”등이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뜨겁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내라는 권면이고,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 인내하고 미래 소망을 품고 기뻐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내라는 권면인 것이다. 또 성도의 상태를 돌아보아 그들의 필요를 함께 나누는 것과 순회 전도자들을 포함한 다른 성도를 환대하는 것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내라고 한다.
2.공동체(그리스도의 몸) 외부를 향한 사랑의 실천(14-21절)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내게 호의적인 사람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를 향해서도 나타나야 한다(14-16절). 또 다른 사람들이 당한 일에 마음 깊이 함께 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은 겸손해야 한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잠시라도 우쭐거리면 곤란하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줄 뜻을 품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다(17-21절). 원수에게 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까지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배의 삶인데, 예배의 삶은 곧 사랑하는 삶이다. 그 사랑의 대상에는 나를 핍박하는 사람, 즉 원수까지 포함한다. 그들의 저주에 저주로 응답하지 않고 축복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하는 삶이 아니고 무엇일까?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꼐서 심판으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량하시는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복음을 우리에게 베푸셨다. 이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우리도 역시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원수에게 까지라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원수는 하나님께서 친히 갚으실 것을 믿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다.
*또 사랑하는 삶은 공동체와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교만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로운 척 하지 않고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다. 다가가 같이 울고 같이 웃으며 공감하고 통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포기하시고 낮고 낮은 인간이 되셨고 우리와 같이 되어 긍휼을 베풀고 사랑하셨던 것처럼….
나는?
-바울은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 신자의 삶이라고 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본문에서 자세하게 나열한다. 큰 주제로 압축하자면 “사랑”이다.
-모든 것의 본질은 사랑이다. 주님께서 날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은 결국 사랑이셨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랑을 받은 존재이니 역시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삶을 살기에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하고(18절), 한 마음,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특히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있는척 하면 안된다(16절). 또 제 몸하나 책임지기 어려운 상황이어도 성도들을 위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한다(13절). 나에게 고통과 고난을 주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나 바울은 그들을 축복하라고 한다(14절).
*이 모든 행동은 주님에게 받은 사랑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긍휼, 자비를 기억하기에 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어도 정말 행하기 힘든 경우가 왜 없겠나! 사랑하라는 명령이 때로 절망이 되는 순간이 있다. 저절로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사랑하려는 처절한 순종의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힘든 사람이 분명히 있다.
*바울은 도저히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혹 있다면 이렇게 하라고 권면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②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③‘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②그, ‘진노하심에’ ③신 32:35(새번역_19절)”
*아… 얼마나 고심했을지 공감이 간다. 바울의 삶에 이런 대상이 없었을까? 아무리 주님의 사랑안에 깊이 거한다 한들 그도 인간이다. 때때로 올라오는 원수에 대한 분노가 왜 없을까? 그럼에도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손에 그 원수를 맡기고자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의 경륜에 순종하려는 치열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시편의 저주의 기도들이 생각이 난다. 원수를 향하여 하나님께 탄원한다. 오직 하나님께 그 저주의 탄원를 드리며 마음을 다스린 믿음의 선조들이 바울의 가르침에서 살아난다. 원수를 갚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직접 그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그를 향한 저주의 기도를 하면 된다.
*그런데 저주의 기도만 하면 안 된다. “④“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④잠 25:21; 22(새번역_20절)” 원수에 대한 저주의 기도를 하나님께 하지만, 주리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면 마실 것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셈이 된다고 했다.
*사랑하는 삶과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삶을 함께 살아내는 존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이것은 둘 다 어렵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새번역_11절)”, “기도를 꾸준히(새번역_12절)” 하라고 권면한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은 어떻게 가능할까? 고민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된다.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오는 성령의 뜨거운 마음은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충분히 도우신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어디에서 다져지는 것일까? 이 또한 고민할 것이 아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 가운데 말씀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면 된다. 기도는 말씀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통찰하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요즘 우리 공동체는 이 말씀을 실제하게 하는 시간들을 지나고 있다. 사랑하는 것은 즐거운 것이지만,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겨울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사랑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나의 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다. 형제 사랑을 하기 위해 기꺼이 화목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주님,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사랑하기 버거운 원수라도 섬겨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아래 원수를 내려 놓겠습니다.
*주님, 더 성령으로 뜨겁게, 기도 가운데서 주님과 동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