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손 들고 기도하고, 선행으로 단장하며, 정숙함과 거룩함으로 바른 복음 안에 서라 [딤전 2:8-15]
 – 2024년 11월 04일
– 2024년 11월 04일 –
바울이 계속해서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권면한다. 특히 공적인 가르침에 열심인 여자들에게 가르치려 하지 말고 조용히 배우라고 권면한다. 또 남자들을 주관하려 하지 말고 조용히 가정에 충실하며,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건한 삶임을 밝힌다.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의 배경은 거짓 교사들의 문제와 함께 여자들의 문제가 결합한 특수한 상황에서 여자들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깨달음 없이, 어떤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된 열심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려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 바울이 볼 때 그러한 여자들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된 여자들에게 그들은 가르치려 하지 말고 가정에 충실하면서, 조용히 배우는 일을 계속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1. 남자에 대한 권면(8절)
바울이 남자 성도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한다. 본문은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1~7절 권면의 연장선임을 밝힌다. 남자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실행, 곧 예수를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가족이 되는 뜻과 섭리에 순종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이런 측면을 유대교적 배경으로 이해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제사장적인 중보기도의 성격이 있음을 알게 한다.
    
또, 단지 남자 성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신자의 일상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결단의 표현이며 동시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따르는 걸음이다. 기도와 일상의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기도할 때 “분노와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고” 하라고 한다. 이는 기도가 과정뿐 아니라 기도 이후 삶이 분노와 다툼이라는 죄를 버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즉, 기도는 세상과 다른 모습을 드러내어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구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세상과의 구별, 거룩함”은 기도에서 출발한다. “각처에서”라는 표현은 남자 성도의 제사장적인 기도와 삶은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기대하게 한다.
    
    
    
2. 여자에 대한 권면(9~15절)
남자 성도에 대한 권면에 비해 여자 성도에 대한 권면은 훨씬 길고 구체적이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여자들이 교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추측한다. 바울의 권면은 먼저 옷차림과 치장에 대한 것부터 시작된다(9~10절).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단장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땋은 머리는 여자들의 일상적인 머리 모양이었지만, 여러 가지 장신구(금, 진주 등)로 화려하게 땋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는 부유한 여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장식과 값진 의복으로 치장하고서 교회에 왔다. 이러한 과시욕은 다양한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될 뿐 경건하고 거룩한 신앙의 행위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주의할 것은 바울은 여인들이 단장하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다. 금이나 은이나 값진 옷으로 단장하지 말고 선행으로 단장하라고 명령한다.
    
또 다른 종류의 여인들에게 권면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교회에서 가르치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여자들에게 명령한다.(11~12절). 바울은 그들에게 모든 일에 순종하고 가르치려고 하지 말며, 조용히 배우라고 명령한다. 이런 명령은 바울의 여성관에 대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의 특별한 상황은 바울이 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겐그레아 교회의 자매인 뵈뵈를 적극 추천했는가 하면, 브리스길라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소개하였다. 또 빌립보 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역할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후 1세기 당시 유대 사회나 헬라 사회에서 여자들은 여러 측면에서 활동에 제약받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나마 가장 자유롭고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었던 영역은 종교활동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여자들의 적극적인 종교활동이 자칫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었다.
    
    
바울은 여인들이 가르칠 만한 자격이나 자질을 갖추지 못했고 도리어 조용히 배워야 할 위치에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못 박는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여자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남자들을 주관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13~14절이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소개한다. 첫째,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하와가 그 후에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13절). 이 말은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에 관해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14절). 이것이 여자에게 ‘가르치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단호한 이유이다.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교회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일과 아내가 남편을 주관하는 것을 연결하여 설명한다. 사실 여자가 공적인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과 남편을 가르치고 주관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둘을 서로 연결하여 마치 같은 문제인 것처럼 설명한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상황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바울이 언제나 가르쳐 왔던 일관적인 가르침이었다. 바울뿐 아니라 베드로도 그렇게 가르쳤다(엡 5:22; 골 3:18; 벧전 3:1). 아내가 남편을 주관하면 안 되는 이유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다음에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먼저(프로토스)”라는 말 자체에 주도권을 의미하는 첫째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았기에 남자에게 리더십이 주어진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일반적인 문제로 확대하여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남편의 아내 사랑과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을 명령한 것은 그것이 인간 창조의 본성에 들어맞는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즉,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가장으로서의 리더십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욕구이며, 그러한 욕구를 서로에게 충족시켜 주는 것이 창조의 목적에 들어맞는 것이라는 뜻이다.
    
14절에서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다는 것은 왜 여자가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지 설명한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교묘한 속임수로 성도들을 미혹할 때는 주로 여자들을 유혹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또한 여자들이 잘 속아 넘어간(딤후 3:6)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현대의 동등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보다 고대에는 여자들이 교육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남자들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당시에 여자들이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잘 넘어갔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여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조용히 배우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속임수에 잘 넘어간다는 사실을 인간 최초의 타락을 통해 논증한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였다. 이러한 설명은 당시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이해할 때는 남자든 여자든 판단력이 부족하여 잘못된 가르침에 잘 속는 자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조용히 더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는 것이다.
    
15절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라는 권면이다. 그런데 여자들에게 특정하여 이런 권면을 한다. 본문을 헬라어의 어순을 따라 직역하면, “여자들은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만약 정숙함으로 계속해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한다면.”이다.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다. 여자가 해산을 통해 구원받게 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이 표현은 “만약 정숙함으로 계속해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한다면”이란 말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계속해서 경건한 신앙(믿음, 사랑, 거룩함)으로 가정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하는 권면이다. 이는 거짓 교사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경건한 종교 생활이 아니라고 가르친 것(딤전 4:3)에 따른 바울의 변론이었다.
    
이러한 권면이 거짓 교사들의 영향에 따른 변증적인 것이라면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린 여자들이 가정을 소홀히 하고 당시의 질서를 무시하며 남편의 권위를 무시한 상황이 있었을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여자들이 결국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가정으로 돌아가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정숙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으로 살면서 아이를 낳는 것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런 가정은 당시 에베소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기에 단정할 수 없다.
    
    
    
나는?
-바울은 남자들에게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한다(8절). 예배 가운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며 은혜에 감사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다툼과 분노는 그 은혜와 긍휼을 받는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고,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일도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도 제단에 나오기 전에 화해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울은 각처에서 기도하기를 원했다. 특히나 분노와 다툼 없이 기도할 것을 강조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라도 악한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연약해 보이고 무기력해 보이며 더디게 보이더라도 기도는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선하고 거룩한 영적 싸움의 방식이다.
    
-남자들의 선한 싸움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이라면, 여자들의 선한 싸움은 먼저 유행을 무분별하게 좇아 성전 창기나 사치스러운 부유층 여인들을 연상케 하는 머리 모양이나 보석으로 외모를 치장하지 않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외모를 중시하는 세상 나라와 구별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값비싼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고 선행으로 단장해야 한다(벧전 3:3-4).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을 차별하거나 자신을 과시하려고 외모를 꾸미지 않고, 속사람을 단장하려고 힘쓰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선한 싸움은 외모보다 내면을 가꾸는 싸움을 이어간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단장은 복음의 영광을 따라 사는 “착한 행실”이다.
    
-외모보다 선행으로 단장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들에게 더 어울린다. 참된 단장은 값비싼 것으로 사치스럽게 외모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소박함과 정절로 자신을 가꾸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 온유와 순종으로 남성의 권위를 존중하는 성품을 닦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여자가 남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선한 싸움이다. 이 가르침은 특별히 에베소 교회 안에서 여인들이 침묵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적용한다(당시 문화적인 적용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것이 여성들의 가르치는 사역을 전적으로 금지한 명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의 원리를 따라 남성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위가 존중된다면 여성들도 가르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왔다. 바울에게도 탁월한 여성 사역자들이 함께했었다.
    
-여인들은 일체 순종하고 조용히 배우라고 권면한다.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일을 금한다. 이는 교회 안의 여성 리더십이나 가르치는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에베소의 독특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특별한 가르침이다.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어 예배 질서를 어지럽히는 여인들에게 질서를 존중하고 먼저 가정에 충실히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외모보다 선행으로 단장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들에게 더 어울린다(9~11절). 참된 단장은 값비싼 것으로 사치스럽게 외모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소박함과 정절로 자신을 가꾸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 온유와 순종으로 남성의 권위를 존중하는 성품을 닦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화려한 외모나 현란한 언변이 아닌 경건한 언행과 성실한 선행으로 세상과 구별되기를 바라신다. 나의 내면과 삶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외적인 아름다움에만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않기를…
    
*바울은 교회 안에서 남녀 간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교훈하며 여성이 취해야 할 태도를 ‘창조 원리’에서 찾는다(11~14절). 여성들이 남성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지으신 창조 질서를 따르는 것으로써, 남녀 간의 차별이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녀 간의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오늘의 진보한 지식과 남녀에 대한 인식과 배치되는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고민을 준다. 그러나 문맥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을 구비하기 전에는 섣불리 자기 감정과 확신에 기반하여 가르치려들지 말라는 의미다. 제대로 배우는 것이 먼저이고 배운대로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먼저다. 확증편향된 것과 진리의 말씀을 헷갈리면 가르치려 들지 말아야 한다. 먼저 배워야 한다. 겸손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신앙의 열매와 같다.
 
*오늘 말씀은 참 머리 아프고 마음도 심란하게 하는 말씀이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기반한 말씀일 수 있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세대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아닐 듯하다. “돕는 배필”의 배필이라는 의미에는 “동등한 상응한”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오늘날은 디모데서가 기록된 당시의 성에대한 인식과 비교가 되지 않는 성숙한 진보가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하고,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분명 이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올바로 이해해야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의 말씀과 거짓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바른 복음을 배우고 순종하며 일상을 살아내는 가운데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은혜를 따라 시시각각으로 미혹해오는 것들을 바른 복음으로 분별할 수 없다면 섣불리 자신의 경험과 확신을 마치 진리인양 가르치지 말라는 행간을 놓치면 안된다.
    
    
    
 
*주님, 외모보다 내면을 단장하고 주어진 역할과 사명에 충실하여 주의 뜻을 이루어 가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선한 싸움이 세상의 방법과 확연하게 달라야 할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툼이나 분노보다 손을 들고 기도함으로, 외모보다 내면과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바른 하나님 나라 복음을 잘 배우고, 가르침으로 제게 맡기신 공동체에 주님의 마음과 뜻을 제대로 전하기를 힘쓰겠습니다.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분별력을 구합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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