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댓가는 참담했다. 그러나 기나긴 고통속에 다윗을 방치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긍휼은 심판 중에도 회개하는 영혼에게 임하신다. 공의로우시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지금 나에게도 심판보다 은혜가 더 풍성하게 임한다.
1.참담한 심판의 실현_아이가 죽다(15-23절)
밧세바가 낳은 다윗의 아이는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심히 앓는다. 다윗은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의 멧세지를 듣고 알고 있었지만, 금식하며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간구한다. 다윗 집의 나이든 사람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윗은 듣지 않는다. 그렇게 이레를 앓다가 아이는 죽는다. 헌데 아이가 죽은 사실을 신하들이 차마 다윗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아플 때 이 정도인데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면 얼마나 상심할까 두려워 했다. 신하들이 조심스럽게 수군대는 소리에 다윗은 아이가 죽은 줄 알았다. 다윗이 먼저 신하들에게 묻고 그렇다고 하자 의외로 순순히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먹었다.
신하들은 헷갈렸다. 다윗은 그들에게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소?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새번역_22-23절)
*다윗이 하나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나단이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들었지만 하나님께 엎드려 온 힘을 다해 금식하며 간구했다. 분명한 하나님의 선언 앞에서도 “혹시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인격적이며 인간적인가!
또, 아이가 죽자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없기에 금식할 이유가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서 다윗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 압권이다.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 밧세바와 죄를 지을 때의 무뎌진 감각의 다윗에서 예리하게 날 선 영적 감각으로 다시 돌아왔다.
간음하고 살인을 교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영성을 되찾았다. 아이의 죽음은 너무도 슬프지만 이를 통해 다윗의 어두워졌던 영혼에 빛이 빛취었다. 둔하디 둔해진 영적 감각이 생동하게 되었다.
영성이 건강하게 살아 숨쉬면 “기도해야 할 때와 현실을 인식하여 받아 들여야 할 때를 분간한다. 눈물을 흘리며 매달릴 때와 눈물을 씻을 때를 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는 혹시나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실까 갈급 했지만, 아이의 죽음이 하나님의 최종 결론임을 알고 그저 죽음을 받아들였다.
*상황과 여건이 변화될 일말의 여지가 있을 때는 설혹 하나님의 분명한 선포 앞에 서 있을 지라도 간절히 매달렸다. 아이의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며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나는 기도해야 할 때와 멈추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해야 할 때에 분별하여 행하고 있을까? 억지로 계속 기도하며 매달리거나, 아예 기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주님의 선한 분별과 판단이 다윗처럼 날서 있기를 기도해 본다.
2.하나님의 위로(24-32절)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단호하게 처리하셨다. 말씀하신대로 밧세바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7일을 앓다가 죽었다. 죄에 대한 분명한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비극적인 죽음으로 다윗 왕가에 슬픔이 가득찼다. 하지만 회개한 다윗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다.
먼저 이 깊은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다윗이 밧세바에게 들어가 서로 위로하였는데,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 주셨다. 아이를 낳았는데, “평안”이라는 뜻의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그런데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신다는 의미로 나단 선지자를 보내 “여디디아(주님께서 사랑하신다)”라고 칭해 주셨다(24-25절). 아이를 데려 가시고 아이를 보내 주셨다. 인간의 이해로 어떻게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의 죽음과 새 생명의 탄생 가운데 감내해야 할 지독한 고통이 범죄한 인생에게 큰 경고가 되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생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확실하다. 범죄한 것에 대한 심판이기에 인간의 입장에서 그저 고통 가운데 머물러도 할말 없지만, 깊고 깊은 절망의 시간 속에 방치 하시지 않는다. 받을 자격 없지만 새 생명을 보내 주심으로 위로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그런데 실은 솔로몬은 다윗과 솔로몬 사이에 낳은 네 번째 아들이다(대상 3:5). 솔로몬이 중요하기에 다른 아들들의 이름은 일일히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심판은 단호하고 가혹하나, 이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훨씬 더 풍성하다. 그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하여 구별되어 살아가기를 노력해야 한다.
또, 11장 1절에 언급되었던 암몬 정벌이 12:26으로 이어진다. 특히 요압은 암몬을 거의 정복했지만, 다윗을 불러 다윗의 이름으로 전쟁 승리를 선포하도록 했다. 요압은 랍바 성으로 들어가는 수로를 차단하여 성안으로 물이 공급되지 못하도록 함으로서 성을 정복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보고하며 다윗의 이름으로 암몬을 정복하도록 다윗을 기다렸다가 다윗이 점령하도록 돕는다.
*의외로 암몬을 굴복시키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다윗이 죄악과 벗하며 죄 아래 살 때 하나님은 다윗을 잠시 떠나신 것이다. 전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잠시 떠나셨다. 하지만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전하는 이야기에 회개하며 7일을 금식하며 울부짖을 때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게 돌아오셨다. 전장의 이스라엘 군대에게 돌아왔다.
*왕의 회개가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귀환을 선물해 주셨다. 이제 암몬 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길고 긴 암몬과의 싸움이 순식간에 승리로 끝난다. 다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군대가 된 것이다.
나는?
*삼하 11~12장에서 왕들이 전쟁에 나갈 때 참전하지 않고 궁에 머물면서 시작된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여 주신 다는 것을 깨닫게 한 “여디디아(주님께서 사랑하신다)”의 출생은 다윗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사랑스러운 존재로 점점 커 나간다.
*또한 첫 째 아이의 상실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시기 위해 솔로몬(평안)을 넷째 아이로 주시면서 “여디디아(주님께서 사랑하신다)”라는 이름까지 주셨다. 솔로몬의 출생을 통해 죄악에 빠져 허우적 대던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시작되는 것을 격려하시는 마음이 듬뿍 느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어떤가! 나단 선지자 앞에서 울며 회개한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가에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 한다. 무엇보다 승리를 장담하고 출전했던 이스라엘 군대가 랍바를 포위하며 항오를 벌이고 있지만 그리 압도하지 못하는 모습은 분명 어색하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하였지만 암몬은 이제 이스라엘의 골칫거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의 회개를 바라보시면서 자신들을 부담이 되고 있던 암몬 족속을 순식간에 판세를 압도하게 하신다.
솔로몬의 출생과 암몬 정복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다윗에게 주시는 위로로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지은 자들에게 합당하게 행하신다. 그러나 회개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결코 폐하지 않는다.
심판 중에서라도 은혜를 베푸시는 긍휼이 넘치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 죄에 단호하지만, 영혼 구원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지켜 주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주님, 참담한 심판의 자리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회개하는 자에게 위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니 신뢰가 더욱 갑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편 111:1-10]
이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찬양시이다. 구조적으로 72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시의 특징은 할렐루야 이후 마지막 시행까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첫 글자가 시작되는 알파벳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