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요압이라는 인물… [삼하 14:1-20]
 – 2022년 10월 10일
– 2022년 10월 10일 –

장자 암논은 죽었다. 이제 다윗의 뒤를 이를 계승자는 현실적으로 압살롬이다. 이 때문인지 요압은 그에 대한 다윗의 화난 마음이 점차 누그러지고 그리워하는 것을 알게 된다(삼하 13:39). 요압은 그술 땅에 망명중인 압살롬을 어떻게 다시 예루살렘으로 불러 들일 것인지 계획을 세운다.



*요압은 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일까? 요압은 누구보다 다윗의 심정을 잘 파악하는 신하였다. 암논의 죽음과 압살롬의 망명은 다윗에게 큰 충격이었다. 압살롬에 대한 원망과 미련의 감정이 수시로 교차했을 것이다. 이미 장남 암논은 죽었으니 현실적으로 다음 왕위 계승자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윗의 다른 아들들은 아직은 나이가 어렸을 것이다.

요압은 다윗의 고민을 너무도 잘 파악했다. 정말 지혜롭다. 무엇보다 현 상황에서 다윗과 압살롬이 결국 화해할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이 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게 된다면 자신은 차기 정권에서도 탄탄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요압이 이렇게 궁리한 이유는 무엇보다 압살롬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압살롬이 암몬을 죽인 이유는 다윗왕이 처리하지 못한 근친상간에 따른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암논에 대한 동정보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압살롬에게 더 마음을 준 듯하다. 여기에 만에 하나 압살롬이 그술 땅에 머물고 있을 때 다윗이 죽게 된다면 이스라엘은 겉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 질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요압은 이런 저런 이유로 고심 끝에 드고아에서 “뛰어난 기지와 좋은 구변을 가진 슬기롭다고(2절)” 인정받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에게 철저하게 해야 할 말을 준비시켜 거짓 비유를 말하게 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정당화 시킨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목적도, 이것을 이루는 과정도 정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국 드고아에서 온 여인의 구변은 다윗을 설득 시킨다(4-17절). 여인은 암논의 죽음에 연연하지 말고 압살롬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양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데 익숙한데, 심지어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천연덕스럽게 이용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용하며 나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유혹을 잘 분별해야 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다윗은 그 여인의 언변이 요압에게서 철저히 준비된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 앞에서 솔직하게 그렇다고 털어 놓는다. 결과적으로 이 솔직한 고백이 다윗이 압살롬을 살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진실을 용기있게 말할 줄 아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윗이 요압이 사주한 것을 알아챘음을 안 드고아의 여인은 자신이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을 수도 있다. 여인은 고민하지 않고 요압이 사주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요압은 매우 치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쩌면 교활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없는 이야기도 꾸며낼 정도로 이야기꾼이다. 모사꾼이다. 결정적으로 자신은 감추고 설득력있게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여인을 전면에 세워서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 했다.

요압에게는 압살롬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확인할 우선사안이 아니었다. 압살롬이 다윗에 의해 쫓겨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회개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를 용서하고 복권 시키려 한 것이다. 그의 이런 계획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결정한 것이 아닌 자신의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결정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인 안정과 미래 담보를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다윗을 존경해서가 아니다. 그저 다윗이나 압살롬이나 양 진영에서 신임을 받아 미래를 대비하려는 것 뿐이다.



나는?
-주위에 이런 인물들이 꽤 많다. 상황이야 상관없이 자신의 입장과 명분만을 챙기려는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정의, 도덕, 사실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명분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가?”를 맞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직과 진실함이 아닌 위선과 사기의 방법으로 이를 이루려고 행동하기도 한다. 요압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과 가장 잘 들어맞는다.

-요압은 압살롬을 차기 왕위 계승자로 생각하고 다윗이 그를 용서하고 왕궁으로 불러들여 왕위를 물려 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능하기 짝이 없고 외모가 수려한 왕자가 이방 땅에 머무는 것의 위험성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유사시 자칫 이방 민족과 손이라도 잡는 날에는 이스라엘에 큰 위협이 될 수 있기에 심사숙고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침 다윗의 진노가 점차 누그러지는 것도 확인했다. 이 절호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왕이 공의로운 판단보다 국가적인 실리를 챙기도록 일을 꾸민다. 하지만 아무리 지혜로운 계책으로 이 일을 진행하였어도 다윗은 훗날 이 일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아무리 좋은 명분을 가지고 관리하여도 정의로운 가치라는 대의를 저버리면 실패한다. 결국 자신이 이를 통해 얻는 것이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다.


*한편 다윗은 압살롬이 망명한 지 3년이 넘어가자 큰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가는 듯 하다. 그런데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압살롬이 걱정되기 시작했다(13:39). 자신도 숱한 망명의 경험이 있었기에 압살롬의 처지가 남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선뜻 불러올 수는 없었다. 명분이 있었으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불법을 행한 다윗도 자식 문제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준 사람이 바로 요압인 것이다.

*요압은 드고아의 여인을 통해 백성들의 문제는 명쾌하게 해결해 주지만 자기 문제에 있어서는 이처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했다. 남의 문제를 잘 해결하듯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도록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남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속칭 “내로남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갖다 대는 기준으로 자신에게도 대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부분에서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내로남불의 삶이어서는 안 된다. 남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남에게 대는 잣대를 자신에게도 댈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불의에 단호하듯 나의 불의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자신을 변호하듯 상대도 변호해 주어야 한다.



*주님, 요압의 지혜를 보며 감탄이 나오지만 이내 탄식으로 변합니다. 이기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순간의 감탄이 나오게 하는 사람이 결국 탄식으로 가득 찬 인생이 되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 제 자식 일은 장담하지 못하는 것은 왕이라도 그렇다는 것을 봅니다. 이런 부족하기만 한 인생 늘 붙잡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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