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지만, 그를 만나지는 않는다. 그술 땅에 머무는 압살롬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간절했으나 데려 오기 위한 명분도, 구체적인 회개의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데려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압은 다윗의 이런 마음을 잘 알아채고 드고아 여인을 통해 압살롬의 귀환을 결정하게 하였다. 그렇게 3년만에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압살롬을 돌아오도록 허락을 했지만, 다윗에게는 그 다음이 없었다. 돌아오게 한 명령은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라고 쳐도 돌아온 후 압살롬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작 본인이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턱대도 돌아오게 한 듯 하다.
그래서인지 요압이 그술로 직접 가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 왔지만(23절), 다윗은 그를 맞이 하지 않는다(24절). 암논을 살해한 것에 대한 마음의 정리가 여지껏 안되었을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큰 사건을 일으킨 압살롬에 대하여 어떤 처벌도 공식적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또 압살롬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공적 회개도 없었다. 이렇게 어느 것 하나 3년전 사건에 대한 갈무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귀환을 허락한 것이다.
요압이 그술로 압살롬을 데리러 간 사이 다윗의 마음에 이런 부분이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도록 허락은 하였지만, 환영하지는 않는다.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24절)”는 명령을 압살롬에게 내린다. 요압은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며 재빨리 다윗의 마음을 또 알아차린다. 그는 압살롬을 그의 집으로 돌려 보낸 후 일절 만나지 않는다. 다윗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요압이 자신을 그술까지 와서 데리러 왔을 때 모든 일이 해결 된 듯이 여겼을 수 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의 다윗의 냉대 앞에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2년이 다 되도록 일절 연락조차 없는 상황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술에 거하는 것이나 자신의 집에 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분노했을 수도 있겠다. 3년의 그술에서의 망명생활, 그리고 돌아와서 2년의 “가택연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어야 했을까?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이 시간속에서 압살롬은 어떻게 그이 삶을 돌아보아야 했을까?
사건의 결말을 알고 있는 나는 이 상황에서 압살롬이 근신하며 회개하고, 자신의 지난날의 과오를 철저히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압살롬의 모습은 이와 반대로 펼쳐진다. 어떤 회개나 반성조차 그의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친형을 살해한 큰 죄를 저질렀으니 이에 따른 짊어져야 할 죄책의 무게도 마땅히 짊어져야 했다.
하지만 압살롬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하다. 오히려 암논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순종한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여기는 듯 하다. 실제로 백성들의 민심도 이를 반영하는 듯하다. 문제는 압살롬에 대한 백성들의 인기는 그저 그의 외모 때문이었는데(25절) 정작 자신은 착각한듯 보인다. 어떤 근신이나 회개와 자숙의 기간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와우이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지려는 이후 행보는 씁슬하기 그지 없다.
백성들의 인기에 압살롬은 다윗을 만나려고 노력한다. 요압을 통해 주선되기를 요청하지만 묵묵부답이자, 또 다시 무리수를 둔다. 요압의 보리밭을 “방화”하여 요압과 만나고 다윗과의 만남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한다(30-31절). 요압은 이 소식을 듣고 불편한 기색으로 압살롬을 만난다. 한편으로 요압이 압살롬을 만날 수 밖에 없는명분을 만들어 준 것일 수 있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불편한 마음은 2년 동안 일절 상다하지 않았기에 요압에게도 압살롬을 쉽게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압살롬도 정치적 판단력이 보통이 아니다.
요압을 만난 압살롬은 그가 드고아 여인에게 했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요압의 입에 할 말을 알려 준다. “…무엇 때문에 제가 그수르에서 왔습니까? 차라리 제가 계속 그곳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제가 임금님의 얼굴을 뵙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 죄가 있다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새번역_32절) 요압은 자신이 드고아 여인에게 사용한 방법을 사용하는 압살롬에게 놀랐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2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다시 다윗에게 압살롬을 만나 줄 것을 요청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 판단한 듯 하다.
다윗은 요압의 말을 듣고 압살롬을 5년 만에 만나준다. 5년만의 상봉에 압살롬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다윗은 아들과 입을 맞췄다(33절). 그런데 사무엘서 저자는 이 만남을 매우 형식적인 필체로 기록을 남긴다. 5년만의 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이 아니라 그저 형식적인 만남이었음을 애써 드러내는 듯 하다.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 압살롬은 5년전 사건에 대한 어떤 사죄도 하지 않았다. 왕가 내에서 자신 스스로 적극적으로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지도 않고 그저 망명생활과 가택연금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산 것 뿐이었다.
특히 압살롬은 요압을 통해 다윗에게 “저에게 죄가 있다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라는 표현 속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자신의 행동과 죄에 대하여 어떤 반성도 없다. 마치 “나는 죄가 없으니 오아자로서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자리에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심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자신이 암논을 죽인 것은 정당한 행위였고 암논은 벌을 받은 것 뿐이다는 것이다. 압살롬은 철저히 자신만을 위한 정치적 계산에 몰두 하고 있었다.
*압살롬의 마음은 “무죄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행동은 늘 정당하다 여기는 인물이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지고 왕위 후계자의 자리에 당당히 서겠다고 요청하는 모습이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다윗은 이런 아들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어떻게 행동해야 이 아들이 죄에 대한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까도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윗은 어떤 행동도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묵묵부답은 늘 일만 키웠다. 암논이 다말에게 몹쓸 짓을 했을 때도 화만 낼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망명했을 때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화만 내고, 슬퍼하며 곡만 했을 뿐이다.
*자기만큼이나 큰 죄를 지은 아들 압살롬을 하나님 앞에서 회복 시키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다윗이 아쉽고 아쉽기만 하다. 또 뒷북만 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답답하고 답답하다….
*어쩌면 다윗과 같은 “묵묵부답”의 모습이 때로는 장점이 될 수 있고 약점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적재적소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자리가 왕의 자리이다. 하나님의 왕권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을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왕은 이러한 순간을 놓치면 곤란하다. 혹시 놓쳤더라도 금새 말머리나 일머리를 잡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결해야 했다. 외면하고 묵인하며 지나온 시간 만큼이나 압살롬은 제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고집불통의 청년으로 성장하고 말았다.
*바로잡을 무수한 기회들을 모두 미적거리다가 놓쳐 버리고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주님, 바로잡을 수 있을 때 바로잡는 결단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압살롬과 같은 자기가 옳다에 함몰된 지도자들이 이끄는 세상이 두렵습니다. 긍휼을 베푸셔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겸손한 지도자를 볼 수 있도록 희망을 주십시오.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편 111:1-10]
이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찬양시이다. 구조적으로 72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시의 특징은 할렐루야 이후 마지막 시행까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첫 글자가 시작되는 알파벳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