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다윗은 신속하게 판단했다. “서둘러서 모두 여기에서 도망가자. 머뭇거리다가는 아무도 압살롬의 손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어서 이 곳을 떠나가자. 그가 곧 와서 우리를 따라잡으면, 우리에게도 재앙을 입히고, 이 도성도 칼로 칠 것이다.”(새번역_14절)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의 소식을 듣고 첫번째로 반응한 첫 마디는 “일어나 도망가자(새번역_여기에서 도망가자)” 였다. 다윗은 자신의 무리들과 도성도 칼로 칠 것이 뻔하게 예상되는 압살롬의 행동에 주목했다. 불가피하게 압살롬과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예루살렘 성의 파괴 뿐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단 예루살렘 성에서 압살롬의 군대를 맞이하면 ‘피할 길’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압살롬이 이르기 전에 빨리 성을 벗어나고자 했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백전노장의 혜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 당장의 전투에서 지는 것보다 전쟁 자체를 승리하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불리하고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다윗의 판단은 신속한 도피 결정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과연 다윗처럼 백성들의 안위, 사람의 생명에 가치를 두고 결정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런 가치를 지닌 지도자가 다윗이었다.
*또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압살롬의 군대를 정면으로 대면하기 보다 상황을 지켜보며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결정에 신속한 다윗을 보게 된다. 급하고 어려울 수록 그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좁혀 질대로 좁혀져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다윗은 이 함정에 빠지지 않고 차분하게 반역 사건을 다루고 있다. 경험 많은 통치자의 연륜이 느껴진다.
그런데 한편으로 급히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였다.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듣고 성을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적어도 나단 선지자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저주가 생각나지 않았을까? 칼이 집안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의 처들을 백주에 범하리라(삼하 12:10-11)는 말씀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급박한 순간이었지만 아쉽고 아쉽다.
다윗의 피난길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처럼 여전히 죽기까지 충성을 다짐한 충신들이 함께 하였다. 압살롬은 “그저 따라가기만 한(11절)” 사람들이었다면, 다윗을 따르는 이들은 달랐다. 특히 다윗을 다르는 이들을 보면 “그렛 사람, 블렛 사람,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600명”(18절)이 다윗의 앞에서 행진을 하고 다윗의 뒤를 따라 ‘모든 백성과 모든 신하들'(17-18절)이 따라 나왔다.
*참으로 곤란하고 참담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을 나와 유대 광야로 가는 것만 정했지,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나왔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 속의 다윗 어떻게 이 절망을 맞이하는가?
1.지극히 사람 중심,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14절)
다윗은 매우 현실 적이었고 그 판단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순간의 다윗보다 더 신속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생명 존중”의 마음이 있었다. 속히 피하는 이유는 압살롬의 칼날로 부터 “한 사람이라도 피하지 못할까”하는 것이었다. 또 자신이 성에 머물므로 백성들의 피해가 일어날 것을 원치 않았다. 압살롬의 칼날이 성읍을 칠까(14절) 염려하였다.
어떻해서든지 백성들을 방패 막이 하여 시간을 벌려는 것 보다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성을 떠남으로 인명피해가 나지 않도록 결정한 것이다.
2.충성스러운 신하들과 함께(15, 18-22절)
압살롬의 반역 소식이 들려 오자 다윗은 신속하게 예루살렘 성을 떠나고자 했다. 그때 신하들이 함께 따라 나선다. 그러면서 “모든 일은 임금님께서 결정하신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 종들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새번역_15절) 라고 말하며 광야로 나서는 다윗과 함께 한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호위하기 위해 그의 용병들도 역시 함께 한다. 대부분 블레셋 사람들이었다. 압살롬을 따르는 이들이 “그저” 따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과 분명히 비교가 된다.
특히 따로 언급한 “가드 사람 잇대”의 충성심은 남다르다. 다윗의 표현으로 “이제 막 이민 왔으니 정처 없이 떠나는 자신을 따라올 필요 없다”고 할 때 잇대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이스라엘 백성다운 고백으로 충성을 서약한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시고, 임금님께서도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이 종도 따라가겠습니다.”(새번역_21절)
놀라운 것은 도피의 여정을 떠나는 다윗에게서도 들을 수 없던 신앙고백이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시고…” 대단한 신앙고백이다. 그는 다윗의 정처 없는 피난길에 함께 나서면서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동참한다. 이제 막 용병으로 부름받아 가드에서 예루살렘으로 정착하자 마자 이 사달이 났지만, 그는 자신을 부른 다윗 왕을 저버리지 않는다. 더 나아가 다윗 왕의 하나님을 다윗 왕 보다 더 선명하게 믿음으로 고백하며 다윗을 따라 나선다.
다윗은 이 상황에서 시편 3편의 믿음의 고백을 드렸다. 흥미로운 것은 사무엘서의 기록은 밧세바 사건 이후 영적으로 둔감해진 다윗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 시켰다. 13장 이후 다윗 집안의 다툼은 어쩌면 어쩡쩡한 다윗의 태도가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다윗이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결정하기를 이렇게 신속하게 하고, 더구나 그렇게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오면서 시편 3편을 지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감히 상상력을 펼쳐 보자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잇대의 이 놀라운 고백,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계시는데…”라는 이 고백이 다윗의 영성을 일깨우지 않았을까? 야성의 영성이 다시 돌아오도록 영향을 끼친 것은 잇대의 이 망설임 없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진정 놀랍지 않는가!
*더 놀라운 것은 지금 도망하는 다윗을 호위하는 군사들은 유다 지파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인들이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원수처럼 여겼고, 다윗이 무너뜨렸던 블레셋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때 가장 적대적으로 맞섰던 이방인들이 지금은 다윗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고 있다. 수세에 몰렸고, 우군은 아무도 없는, 누구도 편들기를 거부할 때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이라니….
*진정 놀랍지 않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에게 그 마음이 넘어가는 기회주의자들임에 틀림없지만, 끝까지 다윗의 곁을 충성스럽게 지킨 이들은 우직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렇다 이렇듯 나는 끝까지 주님의 뜻에 충성하고 싶다. 이리 저리 기회를 찾아 헤메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는 걸음이기 원한다. 끝까지 주님과 주님의 뜻을 지키는 종이 되련다.
3.온 땅 사람이 울다!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다!(23절)
다윗의 삶에 쫓김과 도피가 다시 시작되었다.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이 과정에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사울 왕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실망하여 왕권을 옮기시겠다거나, 다윗의 통치에 제동을 거시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다윗은 도피의 길을 망설임 없이 선택하였다.
압살롬의 반란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한 것임을 분명히 알았지만, 예루살렘 성을 사수 하기 위하여 신하들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신하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왕으로서의 자존심,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신하들과 가족들을 먼저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게 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고 기록한다(23절). 이 때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었다. *압살롬에게 이스라엘 민심이 돌아섰다고 했지만, 여전히 다윗을 위해 우는 백성들도 있었다.
심지어 도피하는 왕을 따라 사나 죽으나 어디든지 가겠다고 맹세하는 이들은 심지어 이방인들이었다. 압살롬이 민심을 등에 업고 반역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다윗을 따르는 백성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도피를 결정하다니… 그것은 순전히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알았을까? 아니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다시 광야 길로 향하는 무너진 마음이었을까?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압살롬의 반란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언된 저주가 있지만, 구태여 압살롬이 스스로 그 칼이 될 필요는 없었다. 즉, 이 반란은 압살롬의 권력에 대한 야망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압살롬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일어서면서 “반역에 동참하는 백성들이 많아 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고 여기는 증거로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에게도 역시 그와 함께 하기 위해 기꺼이 광야로 함께 나가는 백성들이 있었고, 성을 떠나는 다윗을 위해 큰 소리로 울어줄 백성들도 있었다. 단지 “민심, 여론”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준이어서는 안 된다.
-아직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압살롬은 자신들에게 모여드는 많은 백성들을 의지하였고, 다윗은 백성들의 생명과 예루살렘 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예루살렘 성을 비워주는 결정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는 것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지 못했다. 또 다윗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백성들과 신하는 압살롬에게 넘어간 백성들의 민심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민심, 여론이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불분명한 때에도 다윗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을 따라 결정한다. 백성들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결정이다.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생명만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 즉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들의 생명도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예루살렘 성을 수성 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발생하게 될 무수한 생명들의 희생을 먼저 고려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이익이 위는 것과 명분을 지키는 것보다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였다. 다윗, 그는 참으로 왕 답다!
*이런 다윗에게 가드 사람 잇대와 같은 이들의 충성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닐까!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결정에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신속함을 보고 그의 모든 신하들이 당연히 잇대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큰 소리로 울며 광야 길로 함께 향할 결심을 한 것은 다윗의 이런 마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 나도 언제나 잇대처럼 담대한 신앙고백과 행동의 사람이기를 바래 본다. 누구라도 할 것 없이 큰 소리로 통곡하고 슬퍼하는 그 현장에서 자신이 다윗과 함께 광야로 나서는 것은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계시고, 그 주님이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믿기에 광야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면 개의치 않는다는 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 없는 도시 예루살렘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황량한 광야에 생명과 구원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삶이기를 바란다.
*우리의 지도자들에게서 다윗과 같은 백성을 위하는 참 마음이 있기나 할까? 지금 우리의 문제는 지도자들에게 대한 이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에 있다. 정치 뿐일까? 교회 지도자들에게 대한 세상과 성도들의 시각은 어떨까? 자신만 생각한다는 불신과 실망이 역력하지 않는가?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다윗의 결정과 행동에 감탄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철저히 무능하다고 비판과 모함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위급하고 다급한 그 찰나의 선택과 결정을 자신을 위하여가 아닌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과 신하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신속하고 과감하게 내린다.
*나의 걸음에도 위기가 밀려와 찰나의 순간에 결정해야 할 때, 상황에 밀려서가 아니라,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하기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과 생명을 존중하는 결정을 내리기를 결심해 본다. 무엇보다 나의 만족을 위한 결정 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결정하기 위해 나의 명분과 체면을 기꺼이 내려 놓으리라!
*백성들이 서로 싸우게 될 현장을 지키는 왕 보다,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광야 길로 나서는 다윗의 용기를 본 받고 싶다.
*주님, 명분과 실리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우선 순위었던, 다윗 왕의 결정을 본 받겠습니다.
*주님, 민심과 여론에 기대어 백성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왕권 마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잠시 내려놓는 다윗의 선택과 결정이 신선합니다. 백성들을 이렇게 위하는 지도자를 이 시대에 볼 수 있을까요?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저부터 이런 마음을 부어 주십시오!
*주님, 어쩌면 다윗의 영성을 일깨웠을 수 있는 잇대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편 111:1-10]
이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찬양시이다. 구조적으로 72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시의 특징은 할렐루야 이후 마지막 시행까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첫 글자가 시작되는 알파벳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