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전쟁이 끝나니, 더 치열한 보이지 않는 전쟁이 기다린다. [삼하 19:16-39]
 – 2022년 10월 21일
– 2022년 10월 21일 –
다윗은 유다지파의 왕으로 복귀하는 추대로 인해 예루살렘 왕궁으로 복귀한다. 본문은 복귀하는 다윗에게 찾아온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 간교한 속임수로 다윗을 속여 므비보셋을 곤란하게 했던 시바와 므비보셋, 그리고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배웅길에 노구를 이끌고 나왔다. 본문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일까?
 
 
일단 전쟁과 환난 중에 일어난 속고 속이는 일이 비일 비재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정의는 왜곡되고 불의는 징계되지 않는다. 선과 악이 혼란스러워 도덕 가치의 기준이 심하게 흔들린다. 중한 악은 쉽사리 용서를 받고 사소한 잘못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누구도 정직하고 근면하게 살려 하지 않는다. 악과 적당하게 타협하고 거짓을 동원하며 권모술수로 탐심을 취하고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전쟁이 비참한 이유는 그 무엇보다 인간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리라.
 
 
 
1.유다지파의 교만, 다윗의 패착
이러한 전제하에 다윗이 압살롬에게서 왕권을 회복할 때의 상황은 사울에게서 다윗으로 왕권이 넘어갈 때의 상황과 사뭇 달랐다. 그의 혈육인 유다 지파의 마음이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 넘어 갔다는 것은 매우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압살롬은 다윗의 군대와 첫 번째 전투에서 일말의 회복의 여지도 없이 참패를 당하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 남 유다의 지도자들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가 다윗이 사독과 아비아달을 통해 내민 온 이스라엘의 소식들을 전해 듣고 신속하게 움직여서 다윗을 모시고 환궁하였다.
 
 
이렇게 되자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이 크게 불쾌해 했다(41절). 이렇게 불쾌히 여기는 지파들을 향하여 유다 지파는 “자신들은 특혜 받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며 정치적인 압력으로 그들을 통제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훗날 솔로몬 사후 르호보암 왕 시절에 여로보암이 북쪽의 10지파를 규합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게 되는 아주 미세한 뿌리감정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유다지파는 사독과 아비아달을 통해 받은 소식을 통해 다윗의 환궁을 주도하기 전에 먼저 “진정한 회개”에 둔감했다. 다윗으로부터 환궁 촉구를 받았을 때 유다 지파는 무엇보다 “다윗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붙들지 못했음”을 철저하게 “반드시 고백했어야 했다. *회개는 없고 해결만 하려한다.
 
*만약 전쟁에서 패했을 때, 그럴만한 상황은 아니었겠지만,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화해 했다면 어땠을까? 압살롬을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서 패전하는 급박함에 후퇴하기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꼬이기만한 상황들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내전에서 승리한 다윗에게 남은 것은 더 복잡하게 꼬인 이스라엘의 마음을 푸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혜안을 가지고 풀어 가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더욱 아쉬운 것은 광야로 나아갈 때 날선 영적 감각이 또다시 둔감해진 것이 보인다는 점이다. 다윗은 정치적인 감각으로 꼬일대로 꼬인 정국을 풀어가려고 하지만 내놓은 방법마다 묘수가 아니라 악수가 되고 만다.
 
*일단 온 이스라엘에게 모두 전령들을 보내 회복과 복권의 요청을 공평하게 전하지 않고 “혈육과 골육”이라는 이유를 들어 유다 지파에게만 소식을 보낸 것이 큰 실책이다. 더구나 유다 지파의 아마사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한 것도 그렇다. 어찌 되었던 그는 압살롬의 군사령관이었다. 요압을 밀어내려는 의중이 다분히 보이는 인사였지만, 요압이 받아들이기에 명분이 없는 인사였다. 더구나 요압은 내전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사령관 중의 한 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마사는 이후 일어난 세바의 난을 진압하기 전 요압에게 죽임을 당한다(20:10). 다윗의 인사가 이 일의 빌미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2.시므이, 시바의 천운
*또 본문에 등장하는 시므이, 시바와 같은 인물들에 대해 탕평책을 쓴 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 시므이는 신속하게 다윗에게 나아와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며 결국 솔로몬이 즉위할 때까지 살아남았다. 하지만 다윗은 광야로 피난을 갈 때 시므이에게 들었던 저주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지혜롭게 대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사실상 가택연금 수준인 예루살렘을 나가지 말것을 명하고 결국 이를 어긴 시므이를 처형한다.
 
시바의 경우도 시류를 잘 타고 났음이 틀림없다. 보통때의 경우라면 그는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왕위를 백성들에게 다시 얻은 후 온 이스라엘의 화합이 우선 과제였기에 개인적인 원한 갚음을 뒤로 미룬다. 자신을 저주하고 속였던 인물들을 “알면서도” 용서함으로 대화합을 시도하였다.
 
*이들에게는 “천운”이었다. 다윗에게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왕권의 회복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했다.
 
*하지만 다윗은 왕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됐다. 아무리 자신의 정책과 정치적이고 정무적인 판단으로 탕평책을 시행하여도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주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아쉽게도 피난갈 때 다윗의 영성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예민하게 작동되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에서 잠시 시선을 뗀 듯 하다. 이 불안감이 괜한 것은 아니기를 바래본다.
 
*혼란한 정국일 수록 사람들에게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바랬어야 했다! 자신의 정치적 고려와 선택, 이에 따른 인간적인 탕평책이 먼저가 아니다.
 
*예루살렘으로의 환궁 전에 요단을 건너자 마자 자신을 영접하러온 길갈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하나님께 고하는 시간을 갖었어야 했다. 회개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도록 먼저 겸손히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사람을 먼저 의지하려는 유혹,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강력한 유혹보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추구하고 붙잡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나!
 
 
 
3.바르실래, 고맙고 고마운 은인
시므이나 시바와 같은 마음은 역겹지만 겉으로는 받아주는 사람도 다윗에게 나아왔지만, 바르실래와 같은 반가운 이도 환송을 나왔다.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피난 생활의 시작에서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잊지 못할 은인이었다. 다윗은 그런 바르실래에게 예루살렘으로의 동행을 요청했다.
 
어쩌면 반란을 겪은 직후 복귀하는 다윗에게 그와 같은 충성스러운 신하의 존재는 너무도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자신의 나이를 감안하여 고향에 머물르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모습이 참 감동이 된다.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필요 이상의 자리를 탐하지 않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충성을 행동으로 보여준 바르실래와 같은 동역자가 있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나는?
-철저히 기회 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는 시므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 주인을 모함했던 시바, 다윗이 다시 복권한 것으로 자신에 대한 오해는 개의치 않는 므비보셋,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소탈하게 거절하는 바르실래…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나의 삶은 누구와 닮았을까?
 
-우리들을 무한경쟁으로 집어넣고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야비해도 되고, 거짓을 도구 삼아도 된다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나는 시므이, 시바, 므비보셋, 바르실래…와 같은 인물들중에 누구와 닮았을까? 누구의 모습을 이 시대에서 구현하고 있을까?
 
 
*문제가 해결됐다고 여기면, 또 다른 문제가 연이어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내전이 끝나니 더 복잡한 마음의 내전을 치루어야 한다. 이러한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또 구해야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일관한다.
 
*피난을 나설 때 감람산을 오르며 하나님께 울부짖던 그 야성이 보이질 않는다. 간구한대로 원수들을 물치쳐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없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사모함도 없다. 다시 내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의지만 보인다.
 
*다윗이나 나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공통된 지점이지 않을까? 늘 의지하고 사모하며 바라야 할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나도 여전히 나의 생각, 나의 결정에만 몰두 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 보다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더 추구하고 추구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보다 사람들에게 더 지지를 호소하고 있지는 않는가?
 
 
*놀고치 않을 삶을 시작하는 아침에 믿음으로 살기 위해 치열하게 하루 하루를 버티며 인내로 살아간 믿음의 선진들과 오늘 나와 함께 이 믿음의 길을 걷는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로와 용기, 격려를 받는 아침이어서 감사하다. 나 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을 먼저 걸어간 하나님의 사람들과 지금 함께 걷고 있는 더온누리 공동체가 있어 힘이 난다! 용기가 생긴다!
 
*어리숙하고 실패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 하신다. 믿음의 공동체가 서로 격려하고 있다… 오늘도 다시 힘을 내야 할 충분한 이유다!
 
 
 
**주님,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바라보게 하는 말씀으로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사람에게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모합니다.
**주님, 그럼에도 함께 믿음의 길을 격려하며 걷게 하신 공동체가 있어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하기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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