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구원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하나냐와 더 큰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서로 대치되는 예언이 선포된다. 예언을 들은 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간에 누구의 예언이 여호와로부터 온 것인지 판단을 내려야 한다.
27장과 28장은 서로 독립된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모두 거짓 예언을 다룬다는 점에서 긴밀하게 연결된다. 특히 ‘바벨론 왕의 멍에’와 ‘바벨론으로 옮겨진 여호와의 성전 기구의 돌아옴’이 공통으로 언급된다. 또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27:16; 28:1)”이 공통으로 등장한다. 27장의 예레미야의 표적 행위와 말씀 선포는 하나냐와 예레미야 사이에 발생한 대결의 배경을 제공한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구원을 거짓 예언으로 정죄하고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하는 예레미야에 맞선 하나냐는 바벨론의 멍에로부터 2년 안에 벗어날 것을 선포했다.
동시대의 동일한 정치적 상황을 두고 예언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로 충돌하는 예언을 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참 예언인지 분별하기 위한 설명이 없다. 다만 예언의 참과 거짓은 여호와의 계시에 의해서만 결정됨을 강조한다.
1. 하나냐의 거짓 구원 예언과 예레미야의 응수(1~9절)
시드기야가 다스린 지 4년 5개월째에 예루살렘 성전 소속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예레미야와 “여호와의 성전”에서 충돌한다. 하나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한 말씀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한 말씀과 완전히 충돌한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것만이 살길임을 선포하고(12, 17절),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다고 선포한다(2절). 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남아 있는 기구마저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을 선포하고(27:19-22), 하나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간 성전의 모든 기구가 2년 안에 제자리로 되돌아올 것을 선포한다(3절). 예레미야는 사로잡혀간 고니야(여호야긴)가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목하고 그곳에서 죽을 것을 선포하고(22:24~30), 하나냐는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선포한다(4절). 또한, 예레미야는 칠십 년(25:11-12) 또는 세 세대(27:7)의 바벨론 지배를 선포하고, 하나냐는 바벨론 왕의 멍에가 2년을 넘지 못할 것을 선포한다. 주전 597년의 재앙을 경험한 자들에게 예레미야는 더 큰 재앙을 선포하고, 하나냐는 자기 이름(‘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에 걸맞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예레미야와 하나냐가 선포한 예언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누군가 한 사람은 거짓을 예언한 자가 된다.
하나냐가 그랬듯(1절), 예레미야도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5절)” 하나냐에게 말한다. 예레미야는 내면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은 예레미야에게도 좋은 소식이 될 수 없다. 예레미야 자신도 하나냐의 구원이 성취되어 빼앗긴 성전 기구와 사로잡혀간 동포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당연히 더 좋다(6절, 참조_29:10; 33:14). 그만큼 예레미야도 바라지 않는 하나님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인 유다의 멸망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예언자라면 개인 기대를 내려놓고 여호와의 결정을 전해야 한다. 하나냐의 구원 예언은 역사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심판 예언과 충돌한다고 예레미야는 주장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을 심판 예언자들에게서 찾았다.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8절).” 역사적으로 볼 때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미 이전의 예언자들이 나라들과 왕국들에 심판을 선포했었고, 그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예언 역사는 구원 예언자들이 아니라 심판 예언자들의 정당성을 증명해 준다. 구원 예언자들이 선포한 구원 신탁은 실제로 이뤄질 때만 여호와께서 보낸 예언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9절). 예레미야는 본문에서 아직은 하나냐를 거짓 예언자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하나냐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로 인정을 받으려면, 먼저 그가 선포한 예언이 성취되어야 한다.
2. 하나냐의 표적 행위와 예레미야의 반응, 여호와의 심판(10~17절)
바벨론의 지배를 멍에를 메는 표적 행위로 연출한 예레미야(27장)에게 맞서 하나냐도 같은 표적 행위로 구원 예언의 확실성을 과시한다. 하나냐의 표적 행위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부숴버린다(10절). 예레미야는 목에 멍에를 메고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만이 살길임을 예언하고,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내 부수고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목에서 바벨론의 멍에를 꺾어버리시기로 하셨다고 예언한다(11a절).
두 예언자가 언어와 행위에서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하나냐의 멍에를 부수는 행위는 단지 예레미야를 모독하거나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 자체를 “모든 백성 앞에서(11절)” 무력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하나냐의 행위에 예레미야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11b절).” 이것은 하나냐를 무시하는 행동이 아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냐를 아직 여호와의 예언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가 자신과 다른 신탁을 선포하지만, 그 신탁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섣불리 하나냐의 구원 예언의 진정성에 대한 평가를 보류한 것이다. 하나냐와 예레미야 모두 여호와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기에 그분의 결정만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선언하거나 결정하지 않은 것이다.
두 예언자의 팽팽한 대립은 여호와의 개입으로 해결이 된다(12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어 하나냐가 당신의 의지에 거슬러 예언했음을 알리신다.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13절).” 이는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보여주기 위해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부숴버린 하나냐의 행동이 바벨론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만든 것임을 강조하신다. 부서진 나무 멍에 대신 무겁고 부술 수 없는 쇠 멍에가 씌워진다. 모든 민족이 쇠 멍에를 메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야 한다(14a절). 또한 여호와께서는 민족들뿐만 아니라 들짐승까지도 바벨론 왕에게 넘겨주신다(14b절). 이에 따라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다시 찾아가 그와의 대결을 마무리한다.
하나냐를 여호와께서 보내지 않으셨음에도 그분의 이름으로 예언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한 거짓 예언자로 고발하고(15절) 그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한다(16절). 그는 금년에 죽는다. 예레미야의 심판 선고에 따라 하나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는다(17절). 두 예언자의 대결이 “그해 다섯째 달” 있었으니, 두 달 후에 하나냐는 여호와의 징벌적 죽음을 맞는다. 이로써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참된 예언자임이, 입증된다. 동시에 그가 선포한 바벨론 왕의 멍에가 여호와의 의지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거짓 예언자들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 내리기 전에 방해를 놓는다(1~4절). 말씀을 듣고 난 후 삶 속에 자리 잡기 전까지 이처럼 방해가 일어난다. 말씀을 가리는 거짓과 유혹의 소리를 듣고 있지는 않는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거짓 예언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말하면서 거짓으로 예언한다(2~9절). 하나님은 이미 호세아, 이사야,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의 멸망과 70년의 포로 생활을 예언하셨으며, 남은 기구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냐는 포로 생활의 기간을 임의로 줄였으며 남은 기구도 2년 안에 되찾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3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른 말을 하면 거짓 예언자이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교묘하게 해석하는 가르침을 주의해야 한다. 조심해야 한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멍에를 취하여 꺾으며 강하고 확고한 모습을 보였다(10~11절). 하나님을 거부하는 도발적인 행동이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강하게 보이기 위하여 이런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않는가?
-하나냐가 꺾은 나무 멍에 대신에 쇠 멍에를 주셨다(12~14절). 하나님의 징계를 거부하고 피하면 더 큰 징계가 내려진다. 더 큰 매를 맞기 전에 작은 매를 맞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거짓 예언자 하나냐를 심판하셨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단과 거짓 가르침에 대한 심판이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거짓 선지자의 거짓 예언…. 성전 선지자 하나냐는 2년 안에 바벨론에 탈취당한 성전 기물이 돌아오고 여고냐를 포함하여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확고하게 예언했다. 예레미야 조차 그의 예언이 성취되기를 원할 만큼(6절)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어긋나는 것도 아니었다. 또, 성전이 있는 시온의 안전을 예언했던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의에 빠진 백성의 마음에 큰 위로를 줄 수 있는 희망적인 메시지였다. 심지어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 걸린 멍에를 취해 꺾음으로써 선지자적 상징 행위까지 했다(10~11절).
*당연히 항복을 요구한 예레미야보다 행복을 약속한 하나냐를 압도적인 다수가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조건과 상황이 그를 참 선지자가 되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러고도 그는 백성으로 거짓을 믿게 한 거짓 선지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는데, 갔으며, 하나님께서 맡기지 않은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외롭게 당대의 정서에 어긋나는, 백성이 기대하는 말씀이 아닌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적인 전통에서 보면 하나냐만 홀로 평화를 선포한 선지자였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역사적으로 거절과 핍박을 당하면서 살았으나, 하나냐만큼은 존경과 환대를 받았을 것이다. 그가 참 선지자인지는 그의 예언이 성취되고 난 후에야 판가름 날 것이지만(신 18:21~22), 그는 자기가 선포한 2년 안에 도래할 회복을 보지도 못하고 그의 말을 들은 백성이 심판당하기 전에 맨 먼저 심판을 당해 죽고 만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침묵하였고(11절),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는 혹독한 말씀이라도 담대히 전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세대는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가 있어야 한다. 비록 환영받지는 못하더라도 말씀을 듣고 떨리는 심정을 부여잡을 수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거짓 예언자의 길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주님, 백성에게 환영받지 못해도 주님의 말씀대로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