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 [렘 29:1-14]
 – 2024년 07월 06일
– 2024년 07월 06일 –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보내는 사신 편에 예레미야가 편지를 주어 주전 597년의 유배로 바벨론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이 바벨론 유배지로 확대된다.
    
다수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지배계층에 속했던 바벨론 유배민들의 유일한 소망은 이방 땅에서 죽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학적 사고에 따르면 여호와의 신앙에서 잘린 자들이었다. 이미 24장에서 예레미야는 바벨론 유배민들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임을 선포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유배지에서는 여호와의 성전이 없어 여호와를 찾을 수 없었다. 우상들의 땅인 바벨론은 제의적으로 부정했기에 여호와를 찾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이런 전통적인 신학으로 인해 유배민들의 마음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유배지에서도 여호와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성전이 없어 제사를 드릴 수 없지만,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그분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제의적으로 부정한 땅이지만, 그곳에서 여호와께 기도하면 기도를 들어주신다.
    
    
    
1. 편지를 보내는 예레미야(1~3절)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파견하는 사절 편에 편지를 주어 유배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된다. 첫째, 예루살렘 왕궁에 예레미야를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 19)’라고 약속하신 대로 여호와께서 고관들을 통해 예레미야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셨다. 둘째, 예레미야가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알려진 예언자라는 점이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통치할 때 활발하게 활동했기에 적어도 일부 유배민들은 그를 경험했을 것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다. 그의 편지는 사회적, 종교적 지도자들로부터 일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배민이 읽어야 할 내용이었다.
    
사절을 언제 파견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예레미야 51:59에 따르면 시드기야 제 사년에 왕이 직접 사절을 이끌고 바벨론으로 갔다. 사절을 보내는 목적도 기록이 없다. 봉신국으로서 연례적으로 보내는 조공 사절일 수 있고, 예레미야 27:3의 주변국과의 회합에 대한 변명을 위한 사절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이 편지를 사반의 아들 엘리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가 전달한다. 엘리사는 여기에만 등장하지만 26:24에서 예레미야를 보호해 준 아히감의 아버지 이름도 사반이었다. 둘이 형제일 가능성이 있다. 그마랴의 아버지 힐기야는 열왕기하 22장에 나오는 제사장 힐기야와 동일 인물인지 확실치 않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요시야왕의 통치 아래 개혁 정책을 추진했던 세력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바벨론의 사절로 왕래할 정도라면 바벨론과의 관계가 우호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바벨론의 칠십 년 지배를 선포한 예레미야의 신학적 입장과 겉으로 보기에 크게 다르지 않음을 추측할 수 있다.
    
    
    
2. 유배지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4~9절)
조상들의 뿌리로부터 잘려 먼 이방 땅으로 옮겨진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가나안 땅으로의 조속한 귀환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전통 신학에 따르면 이방 신들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유배지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차라리 배교 행위에 속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유배의 장기화는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종말을 의미했다. 너무 늦지 않게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유배 생활이 길어질 것이니 그에 대비하도록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유배민들은 그곳에 집을 짓고 과수원도 만들고 생활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5절). 또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과 딸을 낳고, 그 아들들과 딸들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내 그들도 아들과 딸을 낳게 해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않게 하여야 한다(6절). 여기에서 삼 대의 언급은 ‘세 세대에 걸친 바벨론의 통치 기간’과 일치한다. 바벨론의 지배 기간이 끝날 때까지 유배지에 살면서 후손이 번성하게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유배지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 성읍을 위해 여호와께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7절).”라는 말씀을 통해 현실적으로 바벨론의 평안이 유배민의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을 강조한다. 또 한편으로 예레미야의 선포에 따르면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칠십 년 지배를 허락하셨기에 그 기간 동안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여야 한다.
 
8~9절은 바벨론 유배지에서도 많은 예언자가 활동했음을 전제한다. 이들이 어떤 예언을 했는지에 대하여 달리 언급하지 않지만,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9절)”라는 말씀을 통해 이들이 하나냐처럼 유배민의 조속한 귀환을 예언했음을 시사한다. 예루살렘과 유배지의 종교적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추측케 한다. 구원 예언자들의 값싼 위로의 말이 유배민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원 예언 선지자들은 왜 이런 거짓 예언을 선포했을까? 고대 세계에서 파종, 수확, 집의 건축, 출생과 다산, 성읍의 평안과 같은 일상적인 생활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평안과 풍족한 삶은 신의 보호와 축복으로 돌려졌고, 이스라엘도 이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바벨론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축복이 가능한가였다. 바벨론에는 여호와의 성전이 없기에 그분께 예배드릴 수 없었다. 제의적으로 더러운 이방 땅에 살기에 제의적 더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성전이 없는데 어떻게 여호와께 나아갈 수 있을까? 제사를 들릴 수 없는 부정한 땅인데 여호와의 축복이 과연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바벨론에 살고 있으니, 바벨론 신에게 축복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성전도 제사도 없는 부정한 땅에서 어떻게 여호와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깊은 고민이 결국 제사장들이나 예언자들이 조속한 귀환 선포 외의 다른 선택이 없다고 여겼다.
    
예루살렘 성전과 가나안 땅을 여호와 종교의 전제 조건이자 충분조건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바벨론은 속히 떠나야 할 곳이었다. 이런 자들에 맞서 예레미야는 성전이 없어도, 제의적으로 부정한 이방 땅에서도 여호와를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축복이 가능함을 선포한다. 당시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새로운 신학을 제시한 것이다.
    
    
    
3. 여호와의 최종 목표(10~14절)
바벨론 유배는 세 세대까지 계속된다. 분명히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벨론에게 허락한 칠십 년이 차면 여호와께서 이전에 쫓아 보내셨던 모든 곳에서 유배민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10, 14절). 여호와께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정한 때가 되면 자신이 했던 “선한 말(직역하면 은혜로운 약속)”을 성취하신다. 11절에서 이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신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새번역).”
    
여호와께서 세우신 계획은 “평안”을 위한 것이지, “재앙”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벨론 유배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힘든 재앙임이 틀림없지만, 하나님 계획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바벨론 유배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미래와 소망”임을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의 땅이지만 그곳에서 기도를 들으시는 여호와께 부르짖기를(12절) 멈추지 말고, 온전한 마음으로 찾고 또 찾으면 만나주시겠다(13~14절)고 약속하신다. 바벨론 유배민은 이제 하나님의 남은 자로 인정을 받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흩어진 모든 지역에서 “모아” 떠나왔던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다. 부정한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교제가 가능하도록 기도의 문을 열어주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전통 신학의 한계가 극복된다. “너희가 나를 구하면 (나를) 만나리라”라는 이 약속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찾는 자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가 온 마음으로 찾는다면 응답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이름을 두신 여호와에 의해 성전과 제사가 없는 이방 땅에서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 진 것이다.
    
    
    
나는?
-나는 어떤 가문, 어떤 교회로 일구어 가고 있는가? 예레미야는 엘리사와 그마랴 편에 1차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백성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가장 먼저 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편지를 전한 엘리사와 가마랴의 붙잡혀간 사반과 힐기야 가문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 두 집안은 요시야를 도와 기울어져 가는 유다에서 여호와 신앙의 회복에 진력했으며(왕하 22장), 위험을 무릅쓰고 예레미야 편에 서서 그를 옹호했다(렘 26장). 선지자의 조언대로 친바벨론 정책을 지지했고, 그 결과 훗날 사반의 손자 그다랴는 유다 총독이 되어 여호와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렘 40~41장). 배반과 불순종이 만연하던 시대에 이 두 집안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명맥이 이어져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외로운 길을 꿋꿋이 걸어갔다.
    
-이방의 땅 바벨론에도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역사의 참 주인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니, 그분이 허락하신 때가 되어야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70년 만에 돌아올 수 있다. 그때까지는 속히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집 짓고 농사짓고 결혼하여 자녀 낳고 번성하기를 힘써야 한다. 바벨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바벨론에게도 계실 것이다. 애굽을 통해 야곱의 후손들을 번성케 하셨듯이 바벨론을 통해 그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다.
    
-70년 만에 돌아올 것이니 죄기 귀환을 약속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심판의 시간을 잘 감내하고 정금같이 정결해지면 그들에게 예비된 장래는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이 될 것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먼저 결단하여 자기 백성에게 마음을 돌이키실 것이니 그때 백성은 전심으로 부르짖고 찾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부르짖으면 그제야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마음을 바꾸시고 응답을 시작하셔야 우리가 기도할 수 있고, 그 기도가 성취될 수 있다.
    
    
*예레미야는 이미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포로 생활에 대한 지침을 주기 위해서였다. 지침의 내용은 첫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5~7절), 둘째 거짓 선지자의 예언을 조심하라(8~9절) 그리고 셋째 회복의 소망을 가지라 이다(10~14절).
    
*포로로 끌려간 장로, 제사장, 선지자, 백성에게 여전히 관심을 보이시고 위로와 경고 그리고 회복(소망)의 말씀을 주신다(1~4절).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여전히 관심이 있으시다.
    
*엘라사와 그마랴를 준비하여 편지를 전달하도록 하셨다(3절). 하나님은 그의 뜻을 수행할 사람을 친히 준비하신다. 나에게 말씀하시고 깨우치기 위해서 보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나에게 보내신 그에게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의 섬세함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포로 생활이지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지라고 하신다(5~7절).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언약이기도 하다.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주신 축복이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보냄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자칭 예언자, 점쟁이, 해몽가를 조심해야 한다(8~9절). 믿음에서 벗어날수록 이런 사람을 찾아가려는 유혹이 생기게 된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으로 제한하고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10~11절). 포로 생활은 평안이며 장래에 소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생각이다.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평안과 소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다.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잘 감당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부르짖고 찾으면 들어주시고 만나주신다(12~13절).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잠시 포로 생활을 하게 하신다. 지금의 어려움을 호소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으로 다가와 주실 것을 구해야 할 것이다.
 
    
    
*주님, 드러나지 않지만, 오롯이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의 걸음을 걷는 믿음의 선배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 세대에게 올곧은 믿음의 선배로 서보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자칭 예언자들을 주의해야 한다.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내려놓을수록 이런 유혹은 더 강해질 것을 압니다. 늘 말씀을 붙잡겠습니다.
*주님, 어느 곳에서든지 부르짖고 찾으면 들어주시고 만나주시는 은혜를 누리겠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선포한 대로 이루어지다 [왕하 7:3-20]

하나님은 나병 환자 넷을 이용하여 사마리아를 전쟁과 기근에서 구하신다. 이로써 엘리사를 통해 예고하신 말씀을 성취하신다. 아람의 군사들은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 도망갔다. 이에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