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철저한 심판 [렘 29:15-32]
 – 2024년 07월 07일
– 2024년 07월 07일 –
시드기야 왕의 사절 편에 유배 중인 포로가 된 백성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1~14절)가 그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유배지의 스마야가 예루살렘 성전의 감독자 스바냐에게 편지를 보내 예레미야를 체포하도록 요청할 정도였다. 이를 통해 유배된 바벨론 땅에서도 예언자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성경에 기록된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를 생각할 수 있지만, 예레미야서에는 예언자의 정체가 나오지 않는다. 29장에는 모두 네 곳에 바벨론 유배지에서 활동하는 예언자들에 관한 소개가 나온다. 특이하게도 이들이 전한 메시지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이들의 메시지에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29장의 문맥과 27~28장의 내용을 통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예언을 들은 유배민들의 분별력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1. 유배지의 예언자들(15절)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다는 보도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8~9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서신을 통해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과 점쟁이들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듣고 믿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의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라는 보도는 여호와께서 보낸 선지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하지만 모두가 거짓 선지자는 아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5년째 되었을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부름을 받은 곳은 “갈대아 땅 그발 강 가”다. 이 자체가 매우 충격인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를 시온에 계신 분으로 이해했고,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일으키신 예언자가 유배지에도 있었다. 그래서 본문은 선지자(네비임)을 단수가 아닌 복수형으로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에만 자신의 예언자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끌려간 자들을 위해서도 예언자를 보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온 세계의 하나님이시다.
    
    
    
2.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에 대한 예언(16~20절)
하나님께서 “포로로 끌려가지 않은 자”, 곧 예루살렘에 남은 자의 운명에 대하여 선포한다(16절).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은 여호야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를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을 향하여 “칼과 기근과 전염병(17~18절)”을 두 차례나 선언한다. 즉, 예루살렘에 남겨진 것은 완전한 멸망을 위해서일 뿐이라는 의미다.
    
반면 바벨론 유배민을 기다리는 것은 구원과 평안과 소망의 미래(10~14절)이고,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통해 이들을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으로 만드실 것이다(17~18절). 이렇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19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꾸준히 보내셨으나 이들은 예언자들의 선포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바벨론 유배민들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할 것을 권면한다(20절).
    
    
    
3. 바벨론의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심판(21~23절)
15절에서 유배민들이 여호와께서 보내주신 예언자라고 인정하고 있는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21절)”에게 심판을 선언하신다. 이들은 거짓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21a절), 이웃의 여자와 간음하는 망측한 짓을 저지르기까지 했다(23a절). 즉 여호와의 예언자들이라고 했으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떠들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파렴치한 짓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타락을 속속들이 아시는 여호와께서 증인이시기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23b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들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여 죽게 하고 저주 거리가 되게 하실 것이다(21b~22절). 27~28장의 내용에 근거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거짓은 “유배민들이 2년 만에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이어지는 스마야의 편지에도 유배지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임박한 구원이었음을 보여준다(26~28절). 아합과 시드기야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느부갓네살에게 “너희(유배민들의) 눈앞에서(21절)” 공개적으로 처형 당한 것은 이들의 예언이 바벨론에게 해로운 정치적인 내용이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바벨론의 관점에서 사로잡혀 온 예언자들이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은 반역과 다름이 없었다.
    
한편 거짓 예언자들의 윤리적 타락을 고발하는 말씀은 여호와의 율법을 범하는 자는 그분께서 보내신 예언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구별이 참으로 어렵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가 그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여호와께서 보내신 자가 아님이 분명하다.      
    
    
    
4. 스마야를 고발하다(24~32절)
예레미야가 바벨론으로 서신을 보내자 이에 맞서 유배민들 가운데 활동하는 예언자 스마야가 예루살렘으로 편지를 보낸다. 예레미야의 편지는 사로잡혀 간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내지고, 스마야의 편지는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25절)’에게 보내진다. 예레미야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유배민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편지를 보내고(4절), 스마야는 자기 개인의 이름으로(네 이름으로_25절) 편지를 보냈다. 예레미야의 편지는 유배민들이 인정하는 예언자(15절)가 반응하고, 스마야의 편지에는 여호와께서 직접 반응하신다(24~25, 30절; 참조. 28:12~14).
    
이런 스마야의 행동은 예레미야가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보낸 편지가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를 불안하게 생각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이 예레미야의 활동에 개입하여 그를 단속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스마야가 이렇게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 곧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로 예레미야를 침묵시키려 하자, 여호와께서 직접 개입하신다(25절). 왜냐하면 예레미야에게 가해지는 고발이나 위해는 그를 예언자로 보내신 분을 향한 도발이기도 하다.
    
여호와께서 공개하신 스마야의 편지에는 서로 관련된 두 개의 내용이 담겨 있다. 먼저 스마야는 제사장 스바냐에게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의 직무를 바로 이행하도록 촉구한다. 스마야의 눈에는 예레미야가 성전 주변에서 자주 보는 “모든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예언자 행세하는 미친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26절).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27절)’는 성전을 소란케 하는 자이기 때문에 붙잡아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과 목에 씌우는 쇠 고랑'”으로 체벌하고 쫓아버려야 했다.
    
28절은 스마야가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간주하는 근거를 보여주는데, 5절을 거의 문자적으로 그대로 인용한다. 스마야와 같은 구원 예언자들이 보기에 바벨론의 지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이방 땅에 정착하여 살라고 권면하는 예레미야는 헛소리를 떠드는 ‘미친놈’에 불과했다. 그런데 스마야의 이런 기대와 달리 제사장 스바냐는 예레미야에게 호의적이었다.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한 소란꾼으로 체포하지 않고 (아마도 성전으로 불러) 그에게 스마야의 편지를 읽어준다(29절). 예레미야는 그의 편지를 듣고 여호와께서 유배민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주신다(30~31a절). 유배민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스마야와 같은 예언자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 고발은 15절의 고발과 거의 일치한다. 동시에 스마야가 “이 년” 이내의 구원을 선포한 하나냐와 같은 계열의 예언자였음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32절을 통해 여호와의 스마야에 대한 심판 예언을 전달한다. 스마야 본인뿐 아니라 후손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구원에 참여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10절에서 밝힌 것처럼 70년 후의 회복에 참여할 후손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다.
    
    
    
나는?
-헛된 꿈을 가진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시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유배민들 가운데서 퍼져 나가고 있던 조기 귀환의 꿈을 깨뜨리고 있다. 다윗의 자손(시드기야)이 예루살렘에서 왕위 남아있는 한 다윗 언약은 유효하다고 믿었던 그들에게 그 왕과 남은 백성에게 임할 참혹한 심판을 선고한다.
    
-한편으로 예루살렘에 남겨진 자들은 자신들이 유배민들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어서 유배를 면했다고 착각하였다. 그러나 유배민들이 기다리는 것은 구원과 평안과 소망이지만,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었다. 여호와께서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어 회개하라고 요청하였으나 부지런히 거절한 그들은 회복되기는커녕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처럼 될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흩어져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들은 고국에 남은 왕과 성전과 백성에게 희망을 걸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서도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분을 전심으로 섬겨야 했다.
    
*현실의 안위와 평안이 내 신앙의 정당성과 정체성을 늘 보증하지 못한다. 우리는 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말씀은 늘 나에게 가장 먼저 적용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는 늘 내가 먼저여야 한다.
    
    
-음란한 선지자 아합과 시드기야를 심판하신다. 성적으로 타락하고 신학적으로 왜곡을 일삼았던 두 선지자 아합과 시드기야는 화형에 처할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이면서도 이웃의 아내와 육체적으로 행음하였으며, 또 백성이 듣기 좋은 거짓 예언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려 영적으로 행음하였기 때문이다.
    
    
-거짓 예언을 한 스마야를 심판하신다. 바벨론에 거한 거짓 선지자 스마야는 예루살렘 백성과 성전 감독자 스바냐와 제사장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들에게 편지한 것을 알리고, 왜 그런 자를 엄히 책망하고 구금하지 않는지 항의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저항하기 위해 유다의 온 권력이 동원되고 있었다.
    
-하지만 스마야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한 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의 자손들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심판 선언을 듣는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심판의 메시지에 입을 막고,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신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씀이 아니다. 쓰고 아프더라도 정말로 우리에게 희망과 긍정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 거짓 목사가 나오는 이유가 뭘까? 거짓을 믿을 준비가 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를 막는 궁극적인 길은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주님, 유배민들의 고통은 안중에 없이 자신들은 평안하다며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평안하다고 죄악과 구별된 것이 아님을 늘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 전하는 자의 말과 삶의 거룩함이 함께 가야 함을 거짓 선지자 아합과 시드기야를 통해 깨닫습니다. 삶 속에 진리가 드러나지 않는 목사를 구별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고, 늘 진리 안에 살아가는 용기도 주십시오.
*주님, 스마야도 역시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구원 예언에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제가 잘 들어서 온전히 전하는 목사여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것에 천착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제 안에 늘 진리의 말씀이 역동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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