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3장은 심판 이후에 있을 구원의 말씀들이 수집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죄악 때문에 심판을 당하지만,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집행하시는 중에 벌써 이스라엘과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신다.
예레미야가 거짓 예언자와 대결한 후에 본문은 갑작스럽게 구원의 말을 선포한다. “땅을 차지한다”라는 표현뿐 아니라 “돌아간다”라는 용어가 반복된다. 이 단어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회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원하다”라는 용어도 수차례 반복한다. 예레미야의 구원 예언이 언제 주어졌는가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서신을 보낸 것이 시드기야 통치 4년 즈음이고(28:1), 29장은 그 서신에 대한 반응을 보여준다. 30장은 구원 예언을 선포하지만, 이후 예레미야는 다시 심판을 이야기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1. 머리말(1~3절)
심판 이후의 회복에 관한 예언을 모아 놓은 “위로의 책”으로 불리는 30~31장 전체의 머리글이다. 독특한 것은 일반적으로 당사자들 앞에서 선포하도록 예언자에게 말씀이 주어지는데, 이 부분은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하신 점이다. 이는 후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보존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문맥의 흐름은 심판 이후에 있을 구원 약속은 예레미야에게만 알려지고 이를 들어야 할 자들에게는 감춰진다는 점이다. 아직 심판의 대상자들이기에 선포된 심판이 이뤄지기까지 구원의 말씀은 이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두루마리에 남겨져 읽혀질 때를 기다린다. 한편 예언이 문서화되었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없어도 그를 통해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예언자를 통해 선포됐던 여호와의 의지가 이제는 글로 전달되고, 예언자의 선포에 주어졌던 신적 권위가 마찬가지로 글에도 주어진다.
3절은 “보라 ~ 날이 오리니”라는 표현은 지금과는 다른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대는 여호와의 선포로 시작된다. 회개에 따른 응답으로 주어지지 않고 여호와의 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을 되돌리실 날이 온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유배지에서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다시 데려와 그 땅을 다시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고향에서 쫓겨났지만, 그렇다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사실이 무효가 된 것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조상들에게 주셨던 땅을 유배당한 자들에게 되돌려주신다.
바벨론에게 유배당한 유다 백성은 물론, 앗수르에 의해 유배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린다.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북쪽 지파들도 참여한다. 정치적 분열과 반목이 끝나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시 여호와의 백성으로 통일된다. 24장과 29장에서 밝혔듯이 가나안에 남은 자들이 아니라 유배민들이 여호와께서 베푸신 구원의 수혜자가 된다.
2. 여호와의 날과 그 이후(4~7절)
개역개정은 5절의 화자로 여호와를 전제했지만, 전체 문맥으로 보면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의 아우성을 인용하는 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심판에 떨어진 백성은 서로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공포의 외침)”만 듣는다. 환난에 휩쓸린 땅에는 “두려움”만 있고 생명과 사회의 안전을 보장해줄 “평안함(샬롬)”은 어디에도 없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공황에 빠진 자들의 절망적인 울부짖음만이 들릴 뿐이다.
여호와께서 공포의 아우성을 듣는 이들(너희)에게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라고 명령하신다(6절). 그런데 용사들이 마치 해산하는 여자처럼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배에 송을 대고 망연자실한다. ‘해산하는 여자’는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싸움에 용감한 자들이 해산하는 여자처럼 전투 능력(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절망적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들의 손은 맥이 풀려 무기를 들지도 못한다.
그날은 야곱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큰 재앙의 날이다. 그러나 심판으로 야곱의 역사가 끝장나지는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심판이 구원 시대를 가능하게 해준다. 파괴적 심판에 긍정적 의미가 부여된다. 이 구원은 심판의 경감이나 중지를 뜻하지는 않는다. 무서움과 두려움과 재앙이 지배하는 징계의 심판을 통과하지 않고는 구원의 때를 기대할 수 없다.
3. 해방과 귀환 약속(8~11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부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것이다. 7절의 “그 날”은 야곱이 환난을 당한 때이지만, 8절의 “그 날”은 미래에 있을 환난이 끝나고 구원이 시작되는 때를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목에서 멍에를 부수시고 그의 사슬을 끊으실 것이다. 과거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바벨론의 멍에로부터 그 후손들을 해방하실 것이다.
그런데 8절의 구원 선포는 예레미야에게 맞서 유다의 구원을 주장하였던 하나냐의 선포와 거의 일치한다(28:12). 하나냐는 2년 안에 구원 시대가 열릴 것을 예언했으나 예레미야는 멸망의 심판 이후에 여호와의 구원이 있을 것을 선포했다. 바벨론의 멍에를 벗어버린 자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분께서 일으켜주실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게 된다(9절). 우상을 섬기다가 멸망을 당하고 이방 왕을 섬기던 자들이 다시 그들의 구원자 여호와께로 돌아오고 다윗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된다. 여호와의 주도로 그분 백성의 종교와 정치가 온전히 회복된다.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이 단순히 다윗 왕조의 화복을 가리키는 것인지, 또는 구원 시대의 메시아적 통치를 시사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구원 시대에는 여호와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세워 다시 하나가 된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치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유배당한 자들을 “나의 종 야곱”과 “이스라엘”로 부르시며 그들을 먼 곳에서 구해내 “두렵게 할 자(적들)”가 없는 고향에서 안전하게 살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초점이 가나안의 남은 자들에게서 다시 유배민들에게 옮겨진다. “나의 종”은 이사야서를 제외하고 예레미야에만 나오는 표현이다(10, 46:27, 28). 야곱을 한정하는 나의 종은 여호와와 야곱과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로서 야곱을 표현하는 말이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한다. 이렇게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의도는 유다 배성의 유배지인 바벨론뿐만 아니라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로잡혀 간 앗수르까지 포함시키기 위한 것일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 행위는 야곱을 고향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야곱을 포로로 잡아간 민족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야곱도 죄를 범했기에 징벌을 받기는 하지만, 다른 민족들과 달리 완전한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 야곱은 여호와의 종으로 여호와의 보호 아래 있기에 여호와께서는 “법에 따라” 징계하신다.
나는?
-심판 이후에 있을 더 큰 소망을 선포하신다. 유다의 멸망을 목전에 둔 시기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는 심판이 끝나고 70년이 지나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함께 회복하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죄악으로 끊어졌던 두 나라가 여호수아 때 누렸던 약속의 땅의 축복을 다시 누릴 것이다. 심판이 아픔이 더 온전한 나라의 회복으로 이어지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 때문에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셨지만, 때가 되면 다시 돌아와 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1~3절). 또한 그 약속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하셔서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들이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신다. 혹시 내가 환난 중에 있다고 여기고 그것이 언재 끝날지 몰라 두렵다면 , 이 말씀을 상기하며 회복시킬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과 유다가 겪을 두려움과 공포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심지어 남자들마저 해산을 앞둔 여인들처럼 그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겁에 질릴 것이다. 선지자는 비할 데 없이 큰 슬픔의 날이요 환난의 날이 될 것이라고 탄식한다. 그만큼 이 백성이 지속적으로 또 지독하게 하나님을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만으로도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깊은지를 선명하게 실감하게 될 것이다.
-환난을 예고하시면서 동시에 구원을 약속하셨다(4~7절). 이제까지 겪은 것 보다 더 큰 환난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므로 두려워할 것 없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적 사실은 꺾을 수 없다. 큰 참혹한 심판 중에도 사랑과 언약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꺾지 못할 것이다. 가장 처절한 심판 속에서도 구원받는 이가 있을 것이다. 심판의 시련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면 속박의 멍에를 끊고 결박의 줄을 풀어 하나님을 섬길 백성으로 일으켜주실 날이 올 것이다. 정금같이 순전해진 백성이 메시아(왕 다윗)를 섬기며 그 통치에 즐거이 복종하는 나라를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야곱을 압제하는 세력이 아무리 강하여도 모두 꺾으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매인 것도 그렇게 해주실 것이다(8~9절).
-그렇게 회복된 나라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야곱을 구원하며 돌아와 아무 위협도 받지 않은 채 번영하게 하실 것이다. 또 그를 종 삼았던 바벨론을 심판하여 진멸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은 죄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면을 의미하지 않는다. “법에 따라 징계하실 것이고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신다. 진정한 회개는 이것까지 수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스스로 용서해주어서는 안 된다.
-죄인을 구원하시되 그 죄를 묵인하지 않고 징계하신다(11절). 한 번 구원 받았으니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징계하실 것이다.
*삶에서 고난을 만날 때가 있다. 그것도 견디기 힘든 고난이 억누를 때 오늘 말씀이 생각나기를 바란다. 견디기 힘들수록 회복이 곧 임할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고난도 허락하시지만, 회복도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당연히 따라와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고난과 재앙의 때를 지날 때는 회복과 구원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음의 눈을 떠서 바라보며 인내해야 한다. 어떻게 인내할 수 있을까? 너무도 당연하고 감사하게도 심판을 확정하셨으나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구원의 약속을 남겨두신 말씀이다. 내가 고난의 때를 능히 인내할 수 있도록 기록된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말씀이 인내의 동력이다.
*주님, 언약을 지키시려고 심판하시나 구원하시려는 뜻을 두루마리에 남겨 기억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단호하며 끝까지 그 책임을 지우시는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거쳐야 흔들리지 않는 구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주님, 나에게도 구원의 약속이 선명히 기록된 말씀의 두루마리가 있음을 압니다. 말씀 때문에 견디겠습니다.